대략 3세기쯤 그 이후 기독교 신앙에, 특히 영성 부분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 한 사람 나타납니다. 안토니라고 불리웠던 이집트 사람인데요.. 이 이집트 사람은 18세부터 105세 죽을때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수도생활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이 안토니의 삶을 당시 교부였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글로 써서 책으로 편찬을 해서 냈고, 그 이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면서 안토니의 삶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안토니 이후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에게 신앙훈련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안토니가 홀로 은둔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를 따라 사막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안토니의 삶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교부들 중에는 어거스틴, 바실, 그레고리등의 교부들이 있습니다..

 

안토니의 삶을 이해를 함에 있어서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안토니는 대략 18세쯤에 안토니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를 떠나서 그 이후로는 쭉 혼자서 지내는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외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것이었지요.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데.. 만일 안토니가 교회를 떠나서도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면 현재의 교회론이 상당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혹자는 이러한 안토니의 삶은 성경적이지 않다거나 옳지 않다고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안토니의 삶 가운데에서 분명히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연관해서 이 안토니의 삶을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개교회 중심적으로 교회를 이해해 왔었던 교회론의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교회를 우주적인 교회, 전체적인 교회의 관점에서 안토니의 삶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했을 때 안토니의 삶에서 보이지 않게 안토니에게 영향을 미쳤던 교회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안토니가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 안토니까 사용했었던 훈련 방법들 안토니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들.. 이 모든 것들은 안토니가 스스로 개발해낸 것이 아니라 모두 교회에서 공급을 받은 것들이고, 그러한 교회의 공급에 의지해서 안토니가 신앙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부분을 일단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안토니가 홀로 신앙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안토니의 친구들이 안토니를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안토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록 육체는 물리적으로 교회와 떨어져 있었을지 모르지만 안토니는 여전히 교회의 일원이었고 교회로부터 공급을 계속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안토니의 삶은 이후에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을 하게 되고 수도원은 이후에 영성의 보고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을 하는 것은 안토니에서부터 시작되어 흐르기 시작한 수도원의 영성이 종교개혁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외면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이러한 수도원 운동과 비슷한 유형의 운동이 있습니다.. 기도원이지요. 그 형태와 의미는 천주교의 수도원과 상당히 다르지만 나름대로 개신교쪽에서는 영성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운동입니다.. 개신교 입장에서 안토니를 이해를 할 때에는 이러한 기도원 운동과 연관지어서 이해를 하면 좀 이해가 빠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을 연상하시면 좋겠네요.. 대천덕 신부님 같은 분이 신앙적으로 바로 안토니의 라인이시니까요..

 

그러면 이러한 안토니와 같은 신앙훈련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갑바도기아 지역의 대 학자이자 또한 감독이었던 당시의 교부 대 바실의 대화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나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두려워한다니요? 당신의 말대로 무엇이 저를 두렵게 할 수 있을까요? 재산 몰수, 추방, 고문, 죽음이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면 이런 것들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물론 그렇습니다. 재산 몰수라 하셨는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빼앗길 것이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란 다 떨어진 누더기 옷과 몇 권의 책뿐입니다. 추방이라고 하셨는데, 갈 곳도 없고 거할 곳도 없는 나에게 추방이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그네로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고문이라 하셨는데, 곧 땅에 묻힐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셨는데, 죽음은 저의 은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고, 그리고 그분에게 되돌아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교회사인물(제8강) 대 바실|작성자 예레미야

 

당시 로마의 장군에 대항해서 바실이 대답하는 부분입니다. 자세한 상황은 위의 링크를 따라가셔서 참고하시고.. 죽음을 포함한 외부의 위협에 의연하게 대응하는 바실의 모습은 하루 아침에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닐겁니다. 오랜 신앙 훈련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데, 바실을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킨 동력이 바로 안토니가 했었던 신앙 훈련이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누가 되었던 공포가 있습니다. 홀로 남겨짐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등등 상당히 많은 두려움들을 본질적으로 소유하면서 살게 됩니다. 사람이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인간 내면의 공포와 어려움들이 사람을 엄습해오게 되지요.. 그때 그 인간의 내면의 본질적인 공포와 어려움들을 다스리는 훈련이 바로 은둔 훈련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그 공포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내게 되면 바실과 같은 위대한 고백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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