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온누리 교회의 수요예배에서 문창극 지명자가 한 강연이 워낙에 논란이 되고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쭉 들어보았다. 일제 침략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발언이 어떤 context에서 나온 발언이었는지 말이다..

전체적인 내용들을 듣고난 후에 내린 결론은, 만일 문창극 지명자가 신학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이었다면 날카로운 비판을 날려야 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전문적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닌 평신도임을 감안하고 내용을 듣는다면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의 교육 수준을 고려했을 때 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이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썰을 풀어보자면


1. 한국인 비하발언에 대해

한국인들은 게으른 DNA가 있다는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발언의 앞 뒤를 잘 살펴보면 한국인 비하 발언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보다는 조선시대 말기 조선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런 관점은 보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크게 특별할 것은 없다.
한 외국인 선교사가 남긴 기록을 인용하면서 먼저 조선시대 이방들이 했었던 당시의 전횡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일반 백성들의 집에 뭔가 여유가 생기면 이방들이 귀신같이 알아 채고 그것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의 원인은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사회 구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후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러시아로 이주해 간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한국인들의 집은 조선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또 한국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더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처럼 같은 한국 사람인데 이처럼 다른 삶의 질을 가지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유재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보수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인간은 일한 댓가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열심을 내서 일을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 것이 되지 않으면 게으름을 부린다는 논리로 문창극 지명자의 이야기도 "사유재산의 정당화"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보수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는 이야기를 조선말기 시대 상황에 맞게 풀어서 설명을 한 것일 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문창극 지명자가 비판한 대상은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일한 결과가 자기 것이 되지 않는 당시의 사회 제도와 국가 전체에 만연해 있는 정부관료들의 비리 문제이다. 이를 한국인 비하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엮는 것은 언론들의 억지이며 왜곡이다.


2. 친일 발언

내용을 보면 일제 식민지를 정당화 하는 듯 한 발언이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한 full wording은 대략 아래 영상에서 28분 즈음부터 시작이 되는데 아래와 같다.

"그럼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왜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항의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서두에 말씀 드렸다시피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에요.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해서 하나님은 저희들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가나안 40년 세월을 보내고 난 후에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난 다음에 대한민국에 독립을 허용 하신 거에요"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wording을 잘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일제 식민지를 정당화 하려는 발언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해 하듯이 이 땅의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을 터인데, 하나님이 한국의 한일 합방을 막으셨다면 이 일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학적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해답을 개인적으로 찾는다.
이러한 논리는 어려운 일을 겪어낸 후의 기독교인들이 아주 흔하게 쓰는 논리이다.
"나한테 이러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일을 겪어낼 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원망도 하고 했었는데.. 지나고 나니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이 있어서 그런 일을 겪게 하셨나 보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뜻은 이러 이러 했던 것 같아" 라고 이야기 하는 매우 기독교적 방식의 고난에 대한 해석이다.

이 발언은 논란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친일적 발언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지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장소가 교회였고 또 문 지명자가 5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위와 같은 기독교적 논리의 전개에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 등을 고려해보면, 내가 보기에는 친일 발언으로까지 몰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이야기이다.


3. "하나님 뜻"의 신학적 문제

일반인이 아닌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 지명자가 한 이야기는 평신도 수준에서의 발언으로는 크게 문제될 점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지적할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문 지명자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문 지명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우 견고한 보수주의자이다. 여기에서의 보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신앙의 보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 관점에서의 보수를 의미하는 말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어서 이 강연 내내 강조했던 것이 근면성이었다. 근면, 성실은 보수적 가치를 가진 분들이 매우 강조하는 항목으로 문창극 지명자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대한민국을 바꾼 가장 큰 원리가 바로 근면이라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적 기조 안에서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뜻하셨던 것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아울러 대한민국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일제 식민지, 6.25라는 큰 이벤트를 넘기면서 하나님은 계속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이끄셔서 결국 대한민국이 부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이 역시 보수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로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이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이 발언 속에서 한국 기독교가 그 동안 가르쳐왔던 기복신앙적 가치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 민주주의
하나님의 뜻 = 시장경제
하나님의 뜻 = 부,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단순 도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도식에 대해 추가적으로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 째, 하나님과 정치제도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정치제도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회 민주주의도 자유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귀족 정치제도, 독재 정치제도 어떠한 정치 제도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제도는 그 주권의 출발점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렇다. 그 어떤 정치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 하신다. 따라서 이 땅에서 현재 활용되는 어떤 정치체제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추구하셨다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단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고 보호하시기 위해 위의 정치제도를 활용하시기는 하신다. 헌데 하나님께서 민주주의만 고집하실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사회가 차용하고 있는 정치 제도를 사용하신다. 군주제에 의해 통치를 받는 사회는 군주제를 그대로 사용 하신다. (ex. 고대 이스라엘과 로마, 그 이후 중세 사회들) 민주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를 그대로 사용하신다. 공산 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나라는 공산주의를 그대로 사용 하신다. (중국과 북한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있다.)
우리나라 정치적 보수를 추구하시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은 흔히 민주주의 = 하나님의 뜻이라는 도식으로 사회를 설명하고 따라가려 하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전혀 지지 받을 수 없는 이해이다. 신.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로마의 정치제도를 민주주의로 전복시키시려 하셨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원리를 충분히 공부하고, 그 정치체제가 최대한 정의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일 터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당연히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틀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흘러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해야 한다.


둘 째, 하나님과 경제제도

시장 경제와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자유 시장경제를 지지하지는 않으신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경제체제의 원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창세기 2장을 보면 우리 인간의 노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노동을 통해서 얻게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 공급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적 경제체제의 시작점이다.

자유 시장경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인간의 사유재산과 자유를 강조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유 시장경제가 가지는 헛점은 경제 체제 유지의 궁극적 책임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완전한 시스템을 인정하신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전혀 지지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 복지주의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이다. 단지 정치제도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이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를 활용하셔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떠한 경제 체제도 하나님의 체제는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경제 체제에 대해서도 매여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현재 사회에 적용되어 있는 경제체제를 활용하셔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시스템이기에 적용되어 있는 경제 시스템이 정의롭게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관리할 책임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시장경제를 배척해야 할 이유도 없다. 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경제 체제가 인류와 사회의 안녕을 뒷받침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따라서 한 가지 이념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이념 싸움은 치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러한 사회제도 자체가 우리를 먹여 살리고 우리의 생존의 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것이며, 어떠한 사회적 제도라 할지라도 충분히 그 제도들을 이용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어느 한 쪽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떤 제도, 이념이 되었든 장점도 있는 반면 단점도 있다. 충분히 살펴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이 있을 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터이다.


셋 째, 하나님과 부(wealth)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창조될 때 부터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에게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 한국 교회를 완전히 휩쓸었던 기복주의 신앙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복주의 신앙에 대한 비판은 유효한데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뜻을 물질적인 부분에만 국한시켜서 강조해왔기 때문에 그렇다.

이 강연에서 문창극 지명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이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땅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뜻은 창조세계의 회복에 있다.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슈브(שׁוּב)에 있다. 그것은 절대로 부(wealth)가 아닌 것이다.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예수의 복음선포가 마가복음 8장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뉜다. 전반부는 주로 일반 군중을 대상으로 기적과 이사를 활용한 선포가 이루어졌고, 후반부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예수의 메시아성(고난, 죽음 부활)을 가르치시며 제자교육이 강조된다. 후에 십자가 사건을 살펴보면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가지만 예수와 인격적 만남을 하고 예수가 어떠한 메시아인지를 보고 듣고 배운 예수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제자로 남게된다.
이 마가복음의 대조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남게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게 만드는 것은 예수의 이해에 있다. 특히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할 때에는 물질적 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기복신앙은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 안에서의 삶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다는 것일 터이다.

이러한 세 가지 논점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문창극 지명자가 이야기 한 문맥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 이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설득력은 약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언급 하지만, 이는 문창극 지명자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교회들의 교육의 문제로 이 부분에 대한 부담은 문창극 지명자 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내용은 아닌 것 같다. 한국 교회 전체가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슈브(שׁוּב) : 히브리 단어로 그 뜻은 회개(repent), 돌이키다(return)의 의미를 가진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돌아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sojd0AqJ4Q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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