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한국 교회는 확실히 그 전과는 다른 전환의 시점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전의 한국 기독교를 기복 신앙에 바탕을 둔 성장주의 +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보수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평가를 한다면,
현재 한국 기독교 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정당한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정의 + 인간의 아픔에 대한 공감을 강조하는 진보적 색채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아직 교회의 기득권에 있다고 판단되는 분들이 보수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기에 진보적 목소리는 아직은 외침에 머물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보여지지만 세대교체가 진행되면 될수록 한국 기독교의 색깔은 점점 더 진보쪽으로 바뀌게 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

문창극 지명자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대립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목소리의 대립이 극명하게 보여지는 사건일테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로 우려스럽다.. 보수적 관점을 가지신 분들의 독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진보적 신앙의 발전도 우려스럽기는 매 한가지이다. 이래 저래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우리 세대에는 기복신앙과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이 참 거세다. 나도 기복신앙과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점들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기복신앙과 성장주의가 한국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복신앙과 성장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폄훼는 결국 한국 기독교 100년을 깡그리 부인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부분이다.

한국교회 100년을 지배해왔던 기복신앙과 성장주의는 지금처럼 어느정도 먹고 살만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 선포되었던 메세지였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보릿고개가 존재했다고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이는 봄이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던 때였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인 기복신앙과 성장주의는 지금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람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자포자기 하게된다. 자신을 놓아버리면서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된다. 그 어떤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선포된 기복신앙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자칫 포기할 수도 있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희망을 주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윤리적으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 윤리적 행동도 자행하면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부정적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도록 도와준 점은 분명히 높이 평가가 되어야 한다.
문창극 지명자가 발언한 내용은 이러한 기조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때 한국 교회 신앙의 선배들이 의지했던 하나님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시는 부의 화신"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이 당시 믿었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었다. 내가 고통가운데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의 고통, 나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고통과 수렁 가운데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이러한 믿음에 실질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었고 배고픔이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당시 신앙의 선배들의 간구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풍요에 맞추어질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우리 선배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경험했던 이 신앙의 다이나믹을 우리들의 입장에서만 바라봄으로 평가 절하하거나 폄하해선 안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삶 가운데 믿고 경험하며 또 교재해왔던 이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로 폄하해서는 안된다. 이 전통은 우리나라 교회를 지탱해준 신앙이었고, 더 나아가서 우리 국가를 지탱해준 사회적 원동력이었다. 또한 우리가 계속 세대를 거쳐가면서 믿고 지켜나가야 할 위대한 한국 교회의 전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필요를 (그것이 물질적인것이 되었든, 정신적인것이 되었든)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공급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이 사실이 지금까지 한국 교회 100년사를 통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믿고 경험하고 교재해온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너무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자신들의 풍요와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가졌던 측면도 존재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적 가치관을 세워나가고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개인주의 신앙의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기독교의 핵심인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역사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사회적 시스템에서 십자가 정신과 부활 정신을 어떻게 접목시킬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우리의 앞선 세대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비난으로 연결되는 것은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어쩌면 우리 앞선 선배들에게 이런 정신세계를 고민하는 것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배움의 기회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 이런 정신세계의 가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슈퍼맨을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비판해야하는 이유는 그 분들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우리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들의 선배들이 물려준 신앙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존재들이니 말이다.
모쪼록 문창극 지명자의 입장을 비판은 하되 비난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상황으로 보아 총리 인준은 어려울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신앙 안에서 문 지명자의 세대가 져야 할 십자가를 성실하게 지면서 살아오신 분이신 것 같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세대에게 존경받을만한 부분도 존재하리라고 본다. 문 지명자가 부족한 것은 문 지명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다음 세대인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다.

분위기로 보았을 때 앞으로 한동안은 한국 교회에 진보적 바람이 심하게 불 것 같다.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신학색채를 조금씩 걷어내고 진보 신학영역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교회는 진보쪽으로 약간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기에 나도 이러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지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 교회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은 항상 그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이어지는 시소게임같은것 같다. 보통 보수적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게 되고 진보 신학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게 된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보수신학은 하나님과 세상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반면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진보신학은 하나님과 세상을 이해할 때 인간의 아픔에서부터 출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두 신학은 출발선이 달라짐으로 인해 차이를 발생시킨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는 보수신학은 종종 인간의 아픔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함으로써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반면 인간의 아픔에서 출발하는 진보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아픔을 돌보고 헤아리는 분으로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은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크게 도전하는 한계를 보이곤 한다..
이 두 가지 신학의 성향은 사실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고 하는 문제는 아니다. 양쪽 다 하나님의 관심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는 주로 하나님의 주권을 많이 강조해온 부분이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아픔이나 눈물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사회적 아픔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온 한계가 존재한다. 요즘 기독교계에 불고 있는 진보적 움직임은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불균형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문창극 지명자뿐 아니라 몇 몇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세월호 사건 관련발언에 쏟아지는 비판이 주로 인간의 아픔에 "공감" 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의 부재라는 점을 보면 인간의 아픔에서부터 시작하는 진보적 색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비판의 근거가 주로 "보수적 색채의 신학"이 아닌 "진보적 색채의 신학"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밝힌대로 한국 기독교의 이러한 좌향좌는 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간은.. (예상하기로는 적어도 10-20년 정도는?) 이러한 진보적 입장에서의 목소리가 커질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면서 한 편으로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다. 진보적 색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이해가 한국 교회 안에서 넓게 퍼진다면 그 결과는 기독교의 공멸로 나타게 된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가고 전파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 확장되고 선포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무시되고 부인된다면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전적 역사의 통로를 우리 스스로 제한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되었건 사회가 되었건 유지하고 만들어갈 최종적 책임을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떠 안게 된다. 따라서 진보적 신학의 색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기독교는 서서히 세상과의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우리 힘의 근원인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은 잃어버리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좌향좌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독단성이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함으로 기독교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향좌가 계속 이루어짐으로, 앞으로는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의 위기가 찾아오게 될 듯 하다.
이 위기는 금방 찾아올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20여년 후의 일이 아닐까 생각 되는데.. 피할 수 있는 위기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우리 다음 세대에서 이 위기는 본격화 되지 싶다.. 에고..

복음주의권 목회자들과 지성인들, 학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너무 한 쪽으로 매몰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신학적 진보와 보수 안에서 균형감을 유지 했으면 싶다.. 이런 문제는 시소게임으로 번지면 안된다. 균형감을 유지하며 한 쪽에 매몰되지 말아야 우리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런데 분위기로 봐서는 시소게임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래 저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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