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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과 야만족들의 침입(부수적인 요인)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이라 함은 ... 로마제국의 역사에는 분기점이 되는 사건들이 여럿 있는데 ...이 사건들 모두가 .. 로마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고 여기에 야만족의 침입이 겹쳐 ..결국 로마제국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를 계승한 콤모두스가 마르쿠스의 원대한 게르만 정복사업을 단행하지 않도록 결심한 것
- 황제 발렌스가 378년 아드리아노플의 전투를 앞두고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기로 판단한 것
- 테오도시우스가 ..제국을 두명의 남자상속자에게 분할함으로 제국을 항구적으로 분열시키는데 기여한 것
- 서고트족을 진압할 충분한 능력이 있던 스틸리코가 살해된 것

위 같은 사건들이 모두 로마제국에 안좋은 쪽으로 결정되었고 여기에 야만족의 침입이 겹쳐 로마제국의 붕괴가 촉진되었다는 것이죠 이 설명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앞서에서 예로 들은 ..사건들 중의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다른쪽으로 결정이 났더라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로마제국의 멸망에는 이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합니다.

2. 로마제국의 지리적인 구조

로마제국은 중간에 지중해를 둔 도우넛 모양의 지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지중해는 로마제국에 있어서 큰 자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중해는 고대 세계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해상수송이라는 가장 유용한 운송수단을 제공했고 지중해 연안 전역을 단일 제국으로 묶어 둘 수 있게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반대로 육지의 국경선이 사람이 거주 가능한 면적에 비하여 지나치게 길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따라서 국경지대에 심각한 위협이 있을때 그것들을 방어하는데 막대한 인원과 자원이 소모되었고 군사 이외의 다른 중요한 활동들에는 보다 적은 인력과 자원을 할애하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경선 방어의 난점은 동방보다는 서방의 제국에서 더욱 극심하였고 이때문에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한 것입니다. 서로마제국은 약 2400km의 국경선을 방어하여야 하였고 더욱 동로마를 침입한 이민족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철벽에 가로막혀 서로마로 방향을 돌리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지요. 이에 비하여 동방의 제국은 잘 정비된 군대와 관료조직이 존재하고 있었고 국경도 서방보다는 안전하였었습니다. 동쪽에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초거대 위협세력이 존재하였었지만 문명국이었던 관계로 외교적인 협상 을 통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죠.

3. 인력의 부족

방어해야 하는 국경선은 넓고 극심해져 가는 야만족의 침입은 많은 인력수요를 유발 하였습니다만 이에 비하여 로마제국의 인구는 정체됨으로 극심한 인력의 부족이라는 문제점을 유발하였 습니다. 왜 인구가 증가하지 않았는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낮은 의료수준과 (로마에는 특이하게 군단기지를 제외하면 전문적인 종합병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국이 부유해져 감에 따라 출산율의 저하라는 문제점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4, 경제적인 취약성

실상 제국의 크기에 비하여 로마제국의 경제는 매우 취약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제국의 번영이 정복전쟁을 통한 전리품의 유입으로 유지되었었습니다만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의 정복전쟁이 중지되고 정복전쟁이 없어짐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에도 쳐들어갈 곳은 있었습니다. 게르만과 사산조 페르시아. 하지만 게르만은 쳐들어가봤자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사산조는 매우 부유했습니다만 쳐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력했지요)

로마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과 사치품의 교역이었는데 농업은 뻔한 사람과 가축의 노동력 공급에 의존했기 때문에 노력에 비하여 부가가치의 생산이 너무 적었고 사치품의 교역도 더이상 정복전쟁으로 확보할 수 없게된 귀금속들을 고갈시켰던 것입니다. 귀금속의 고갈이라는 문제점은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고대는 아시디시피 화폐와 재정체계가 正貨라고 하는 액면상의 무게와 가치를 지는 귀금속주화(주로 금,은)에 의존하는 체계였고 역대 로마의 황제들은 귀금속주화의 순도를 계속 떨어뜨리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금과 은대신 비슷한 금속을 섞어치기 하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황제들의 악화의 남발은 필연적으로 화폐가치의 하락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후 치명적인 인플레이션 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국방상의 이유로 재정상의 필요가 폭증하게 됨에 따라 로마의 후기로 가면 갈수록 농민들에 대한 세금은 점점 무거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에따라 자영농의 몰락과 농민의 소작농화 현상이 점점더 심해져갔던 것이지요(자영농의 몰락은 필연적으로 국방상의 질 저하라는 문제점으로 나타났습니다.)

5. 고대의 저급한 과학기술

로마제국의 고질적인 인력부족과 경제적 취약성이라는 이면에는 좀더 고질 적인 문제가 한가지 깔려 있었는데 그것은 고대의 과학기술이 극히 저조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 입니다.(왜그런지는 7에서 설명) 역동적인 과학기술의 부재는 바로 경제성장의 부재를 의미하였지요. 왜냐하면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는 한 뻔한 노동력만으로는 생산성을 향상시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 불안정하고 부패한 정치문화

로마제국 멸망의 또다른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는 바로 제국의 불안정하고 부패한 정치문화였습니다. 야만족이 쳐들어오는 긴급한 상황에서조차도 후기 로마인들은 제위를 계승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관리들은 착복, 뇌물수수에 몰두하였습니다. 안그래도 부족한 인력자원이 파괴적인 제위 쟁탈전에서 소모되었고 이러한 권력투쟁은 국경의 방어 를 약화시켰던 것이지요. 제국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부자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부과되는 세금과 같은 재정적인 부담은 모두 피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담은 모두 중하층 농민이나 상인들에게로 전가되었고 농민들이 고통을 당하게 됨에 따라 안그래도 약한 경제를 더욱 취약화 시켰습니다.

7. 고대사회의 귀족적인 가치관

고대 로마귀족들의 이상 한가운데에는 독립된 권력을 갖춘 부유한 지주가 되어 전쟁이나 공직에 참여하지 않을때는 문화 생활을 즐기며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귀족들은 또한 여러가지 실무에(농업, 상업, 과학) 종사한다는 것을 매우 천하게 여겼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지요. 실제적으로 제국을 이끌어가는 노동을 창출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농민들이나 상인들로서 대자본으로부터 유리되었던 것이지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문제에 대하여 ...귀족들은 관심조차 없었고 실제 생산을 담당했던 계층에서는 과학을 발전시킬 역량이 없었던 것입니다.자금도 없었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과학적인 혁신을 이끌어 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제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정체되었고 뻔한 수준에 머무르게 됨에 따라 역시 경제도 침체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였던 정치적 불안과 내전은 귀족들이 권력과 명예와 영광에 팔려있음으로 해서 갈수록 증가하게 됩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최고의 권력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에 외침의 위기가 상존해있는 기간이라 할지라도 내전을 통해 황제가 되고자 하는 시도를 감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대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대귀족처럼 행동하며 생활하기를 원하였는데 제국 후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국의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에 오르는 것이었고 이렇게 군대나 정부에 진출한 사람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압제와 독직을 일삼아 치부를 하였고 이것이 사실상 제국 후반기에 관료와 군대 내부에서 부패가 횡횡하였던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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