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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에서 성령운동을 하는 그룹들은 그 지명도 여부를 떠나 거의 모두 성결운동 계열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외적인 그룹으로는 케네스 헤긴 계열의 분당 예닮교회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결운동이란 한마디로 '죄씻음'을 강조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러한 계통의 성결운동은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청소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또한 성령의 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거룩과 성결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얼핏 들으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드려지는 익숙한 말들이지만 좀더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이 말들은 다음과 같은 모순과 문제점들을 담고 있는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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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연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죄를 청소할 수 있으며 거룩과 성결을 유지할 수 있는가?

2. 1번 또한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라고 답변한다면

그렇다면 아직 성령세례를 받기 전의 인간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성령과

그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야 임재하고 역사하시는 성령은 서로 다른 분이란 말인가?

성령세례 이전과 순간에는 성령님의 주도에 피동적인 입장이었던 인간이 성령세례 이후부터는 갑자기 능동적인 입장이 되고 성령님이 오히려 인간의 주도에 의해 부려지는 피동적인 입장으로 바뀔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성령 세례를 기점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우리의 자세가 확연히 달라져야만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성상학 형제님 주)

또 성결을 유지하도록 도우시는 성령과 성령의 임재의 당사자가 되시는 성령은 서로 다른 분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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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리는 아무리 성령의 역할에 대한 복잡한 이론으로 해명하려한다 할지라도 성령님을 한 분이 아닌 두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말로는 성령으로 행한다지만 사실 자신의 힘으로 노력한다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가 지지하는, 이에 대한 반대적 입장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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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행위적 노력으로는 결코 거룩과 성결에 도달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성결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나 축사가 그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어둠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은 오히려 어둠에 대해 선에 반대되는 이원적인 권세를 부여하는 것이며 심지어 어둠을 찬양하는 것까지 될 수 있다. 어둠을 몰아내려고 싸우지 말고 빛을 사모하라. 빛이 임하면 어둠은 더 빨리 도망친다.

2. 거룩한 성도(saint)는 100% 죄인이자 100% 의인이다.

100% 죄인이라는 것은 현실의 시간 안에서의 성도의 실존적 상태를 말하며, 100% 의인이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완성된 사역(The Finished Work of Calvary)으로 인한 칭의의 은혜 안에 있는 영원 불변한 법적인 상태를 말한다.

3. 따라서 성령의 충만 또한 이러한 영원한 법적인 상태에 완전하게 근거한 것이다.

이 사실은 성령의 충만이 결코 감정의 충만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성령의 충만은 휴대폰 밧데리 충전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영원한 법적 사실들을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모를 결코 놓을 수 없다.

흔히들 말하는 성령의 충만 또는 성령의 세례는 성도의 완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강렬한 믿음에 의한  법적인 상태의 현상계 로의 발현(manifest) 및 침투인 것이다. 따라서 현상보다 진정한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 현상은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즉, 성령의 충만은 하늘에서 뜻이 이미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그런데 이것을 위해 성도의 행위적 노력은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 성도는 거룩함과 임재를 지극히 사모하고 이미 이룬 줄로 아는 강렬한 믿음 안에서 기다릴 뿐이다.

성령 세례와 충만의 주체자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실 뿐 인간이 결코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성도는 단지 강렬하게 더욱 사모하고 기다리며 그분의 일하심에 그분의 은혜로 연합하게 되어 반응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충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고 보이는 행위를 문자적으로 전부 멈추고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진정한 기다림과 믿음에서 터져나오는 행위는 진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으로 똑같이 보여지는 행위라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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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입장은 상당히 개혁주의 노선(장로교, 침례교)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운동을 배격하는 쪽이 아닌 성령 운동 안에서의 논리라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의 역사는 결국 웨슬레와 진젠도르프의 논쟁까지 올라갑니다.(앞 글 참조)

웨슬레는 모두가 인정하는 알려진 부흥 운동가였긴 하지만 제가 볼 땐 진젠도르프한테는 상대도 안 됩니다.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의 신앙은 훨씬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신앙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경건주의자였던 진젠도르프는 율법주의적이고 의지적인 경건주의 운동이 지속적인 생명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독자적인 경건주의 노선을 갑니다. 루터파인 그는 잔느 귀용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며 그의 가르침은 토론토 공항교회의 존 아놋 목사의 신학과 매우 유사해보입니다. 루터가 객관적이고 지적인 칭의에 치중했던 반면 진젠도르프는 칭의에 근거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강조하며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면까지 칭의의 은혜를 확장시킨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이러한 쟁점은 미국의 19세기말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오순절 계열이 하나님의 성회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근거를 제공하며 현재 미국의 성령 운동의 흐름을 크게 양분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 내에서 "성령세례=성결"이란 공식이 성립했었으나, 남북전쟁을 통해 인간에 대한 낙관론의 추락으로  오순절적 성령 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령세례=성결 or 권능?"이라는 과도기적 물음이 대두됩니다. 파머 여사는 성결이 곧 능력임을 주장했지만 큰 호응이나 겨를 없이 어윈의 불세례성결교회가 등장하여 성령세례를 1차(성결), 2차(권능)로 아주 쉽게 나누어 버리며 나중에는 3,4,5...차까지 더 나갑니다. 찰스 파함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2차(권능=방언)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며 오순절 운동을 부흥시켜 갑니다. 여전히 1차(성결)의 논리는 유지되다가 마침내 시카고에 부흥을 일으킨 침례교 출신의 윌리엄 더햄에 의해 1차(성결)의 교리는 제외되며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이 제창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더햄의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 교리를 따르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 진영으로부터 확실하게 이탈하게 됩니다.)

그 두 흐름이라는 것은 결국 실존적 구원(노력적 성화)를 강조하는 그룹과 법적인 구원(칭의)를 강조하는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성결운동의 배경을 가진 그룹은 성화를 강조하는 반면 하나님의 성회를 포함한 오순절 계열은 칭의와 권능을 강조합니다.

이 두 그룹은 영적전쟁에 대한 해석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전자의 그룹이 현상계 내에서 적들과의 직접적인 싸움(잔당 처리)에 치중한다면 (피터 와그너, 신디 제이콥스)

후자의 그룹은 오히려 현상계를 무시하며 영원 불변한 법적인 사실을 믿음으로 적용하고 선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딘 셔만, 케네스 헤긴)

따라서 신사도적 개혁운동 노선과 함께, 개혁주의 배경에도 불구한 빈야드는 오히려 전자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반면, 빈야드에서 이탈한 토론토 공항교회 쪽은 의외로 법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경향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그룹을 더 소개한다면 캐트린 쿨만, 베니 힌, 케네스 헤긴, 라드니 하워드 브라운, 존 아놋, 랄프 네이버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두 흐름에 대해 소개하는 이유는 국내 성령운동이 편협되게 성결운동적으로만 이해되어 흐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성결을 의지적으로 강조하는 그룹은 매우 바리새화되기 쉬우며 권위주의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룹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최고 리더는 가장 성결한 자로 받들어지기 쉬우며 상하 거리를 만들어 내며 계급구조를 낳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거룩과 성결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으로 예속되거나 착취당하기 쉽습니다. 근데도 당사자들은 찬양과 경배 같은 영적인 공급이 마치 마약처럼 작용하여 그러한 착취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양과 경배 때 만큼은 놀라울만치 자유하다가도 교회 생활에 있어서는 여전히 종교적이거나 가면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놀라운 자유와 해방과 감사와 찬양 그리고 진정한 의와 성결과 치유가 넘처나는 성령운동이 이 땅에 나타나길 갈망하며 두서 없이 적어보았습니다.

ps. 이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선한 것이라는 난상 토론의 핵심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 올려 보겠습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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