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서구 신약학에 대한 反省(반성)과 提言(제언)

                 -“역사적 예수연구”와 관련하여- 

    Retrospect and Proposal of New Testament Studies of the 20th Century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Jesus Quest   

  최갑종 교수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장, 신약학, Ph.D.)

*이 글은 지난 4월 27일 서울 신학대학교에서 개최된 제 37차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신약학분과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I.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지난 1세기 동안 서구 신약학의 가장 중심적이며, 지속적인 주제중의 하나가 되어왔던 “역사적 예수연구”를 중심으로 그 동안 서구 신약학이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추적해 보려고 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학문적 反省을 위해서이며, 둘째는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방향과 과제를 모색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일찍이 신학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시작되고, 교회에 의해 발전되었다. 기독교 초기의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어지는 사도 바울이 그랬고1), 누가와 요한이 그랬다. 그들의 뒤를 이은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교회를 위하여 썼고,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어온 성경을 또한 교회를 위하여 해석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지난 몇 십년 동안 서구 신학은 주로 교회 안에서보다도 교회밖에 있는 대학교 안에서,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도 그들과 관계없이, 때때로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주로 신학대학원이나 대학교의 종교학부에 소속된 학자들을 위하여 논의되고 발전되었다. 그 결과 신학과 교회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괴리는, 마치 호수를 떠난 고기나 고기 없는 호수처럼, 결국 신학과 교회 쌍방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신학은 그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학이나 인문학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생명력 있는 신학을 잃어버린 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을 점점 잃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한 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인 우리는 서구신학의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면책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인터넷을 통해 국경과 인종의 장벽이 무너진 같은 지구촌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과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서구신학과 서구교회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선교사들을 통해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우리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대다수 서구신학의 산실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아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지난 세기 서구 신약학 분야에 대한 우리의 반성작업은 어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성일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오늘과 내일을 대비하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방향과 과제의 준비이기도 하다.

    II. 지난 세기의 “역사적 예수연구”에 대한 회고

    신약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의 “역사적 예수연구”의 두 가지 방향의 길을 연 사람은 Adolf von Harnack(1851-1930)과 Albert Schweitzer(1875-1965)이다. 전자는 非終末論적, 비유대적 예수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終末論적, 유대적 예수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다.2) Harnack은 1901년에 출판된 책, What is Christianity?3)에 서 새로운 다음 세기를 위하여 교회의 전통과 교리 및 철학 등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das Wesen")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은 바로 무시간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父性과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 예수의 메시지라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Harnack의 주장은 새로운 주장이기보다도 H.S. Reimarus(1694-1768)에 의해 시작되어 D.F. Strauss(1808-74), E. Renan(1823-92), H.J. Holtzmann(1832-1910) 등에 의해 滿開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연구,4) 곧 역사적 예수를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인류의 죄를 代贖하신 구원자로 보기보다 단지 인류에게 普遍妥當한 윤리적 교훈을 준 모범적 교사로 보려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체적인 결론이기도 하였다.5)

    Harnack 의 예수연구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면, Schweitzer의 예수연구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단절과 함께 새로운 유대적, 종말론적인 예수연구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Schweitzer는 1906년에 출판된 Von Reimarus zu Wrede6)에 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 곧 근대적인 역사적 비평방법에 의해 교회의 전통적인 도그마에 의해 채색되어지지 않은 순수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를 철저히 재조사한 다음 결론 내리기를, 그들이 재구성한 예수는 주후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실제로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 당대의 사상적 이념이나 윤리적인 체계에 의해 창조되거나 재구성된 예수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그 대신 그는 1892년 J. Weiss가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7)에 서 제시한 종말론적인 예수상, 곧 ‘예수는 후기 유대교 종말 사상에 심취하여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한 유대 묵시적 예언자이다’라는 주장을 발전시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제시한 비유대적, 비종말론적, 비초월적인 예수가 아닌 주후 1세기의 유대적, 종말론적, 초월적인 예수를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Schweitzer가 제시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위해 스스로 인자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한 한 영웅적 유대인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다.8)

    R. Bultmann은 Schweitzer의 역사적 예수 無用論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던 나아가 아예 역사적 예수연구의 不可能을 천명하였다. 일찍이 Martin Kähler가 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9)에서 역사적 비평방법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에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구분된다는 주장을 하였을 때, Kähler의 본래 의도는 양자 사이의 연속선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10) Bultmann은 양자를 완전히 서로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비평 방법의 대상이 되는 복음서 그 자체가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전승이 아니라 신앙의 산물이라는 전제 아래,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연구의 자료로 사용하는 그 자체를 아예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양식비평의 집대성인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을 통하여, 복음서에 수록되어있는 예수에 관한 전승들이 주후 28년에서 30년까지 활동을 하셨던 역사적 예수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후부터 기록된 복음서가 나타나기 시작한 주후 60년 때까지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마치 고대의 희랍 사람들과 이스라엘 주변의 근동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자기 이해의 표현으로써 여러 가지 형태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저들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와 교훈, 선교를 위하여 공동체 자체의 신앙적 자기이해의 표현으로써 만든 일종의 창조적인 산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11) 그래서 그는 자신의 Jesus and the Word라 는 책에서 “나는 참으로 우리가 예수의 삶과 인격에 관하여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 자료는 예수의 인격과 삶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 자료는 너무나 단편적이며, 종종 신화적이며, 그리고 그밖에 예수에 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2)라는 주장을 하면서, 복음서에 대한 非神話的 접근, 곧 복음서의 역사적 접근 아닌 實存主義的 접근을 시도하였다.

    복음서의 모든 역사적 信任性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배격과 함께 결국 기독교를 일종의 가현설(Docetism)에 빠뜨리게 하였다고 볼 수 있는 Bultmann의 주장은 1960년대 이후에 와서 그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즉, 역사와 신앙[케류그마]을 철저히 분리시킨 Bultmann의 주장은 역사와 신앙[케류그마] 사이에 다시 다리를 놓으려는 E. Käsemann, E. Fuchs, G. Bornkamm, H. Conzelmann등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New Quest)와13) 복음서의 예수 전승과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선을 회복시키려는 J. Jeremias, B. Gerhardsson, R. Riesner, H. Schürmann등의 유대 문맥에서의 복음 전승사 연구 등에 의해 허물어졌다.  Käsemann을 위시한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그들의 스승에 반대하여, 복음서 안에는 역사와 케류그마가 서로 함께 얽혀져 있다는 전제 아래, 교회의 그리스도, 혹은 복음서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연속선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복음서를 다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Jeremias는 C.H. Dodd와 함께14)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비유들은 예수 그 자신의 말씀(ipsissima verba Jesu)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고, 그의 Gleichnisse Jesu를 통해서 독창적인 진정성의 기준을 따라 순수한 역사적 예수의 비유 말씀을 회복시키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15) 그래서 그는 그 New Testament Theology: The Proclamation of Jesus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인격을, 단순히 신약신학의 전제로 삼은 Bultmann과는 달리, 신약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았다.16) Gerhardsson은 그의 Memory and Manuscript17), The Origin of the Gospel Tradition18)에 서 본래 유대적 문맥 안에서 시작되고 전승되었던 예수 전승들을, Bultmann이 유대교 문맥에서 보지 않고 오히려 희랍적 배경에서 본 그 자체가 잘못이며, 그리고 Bultmann이 예수 전승들이 그토록 짧은 기간동안에 초대교회 안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구체적인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방법론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9) Schürmann도 그의 논문, “Die vorösterlichen Anfänge der Logientradition”20)에 서, 복음전승이 부활절이후 초대교회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Bultmann에 반대하여,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제자 선택과 교육, 선교파송 등의 구체적인 실례에 근거하여, 복음전승은 이미 부활절이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21)

    1960 대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 와서 소위 역사적 예수가 살았던 유대적 문맥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는 “제 삼의 예수 연구”(The Third Quest)를 주도하는 학자들(B.F. Meyer, E.P. Sanders, J.H. Charlesworth, N.T. Wright, G. Vermes, J.P. Meier, B.D. Chilton, M. de Jonge, P. Stuhlmacher, J. Becker, J. Gnilka, B. Witherington III)과22), 예수의 사건보다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에 의해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소위 “예수 세미나”(The Jesus Seminar) 학자들(R.W. Funk, J.M. Robinson, M. Borg, B. Mack, J.D. Crossan)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23) 어떤 의미에서 Schweitzer의 종말론적 예수 연구를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제 삼의 예수연구”는 역사적 예수연구에 관한 획기적인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연유하고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불투만이 허물었던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신임성의 재회복과,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를 헬라문맥에서 보지 않고 예수 당대의 유대교 문맥에서 보려는 강한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제 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세기와 20세기초의 “옛 역사적 예수연구”(Old Quest)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연구”(New Quest)보다도 역사의 예수를 찾는데 있어서 훨씬 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이점을 Sanders가 1985년에 출판한 그의 책 Jesus and Judaism에 서 “오늘날 지배적인 견해는, 예수가 무엇을 성취하려 하셨느냐에 관하여 우리가 매우 잘 알 수 있으며, 그가 무엇을 말하였느냐에 관하여 상당하게 많이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이들 두 가지가 1세기 유대교 사회의 문맥에서 볼 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4)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25)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유대적 문맥에 한정시키는 제 삼의 예수 연구가들이 Old Quest나, New Quest와 달리 진정한 역사의 예수 회복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이점을 제 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는 E.P. Sanders, N.T. Wright, J.P. Meier, J. Becker등이 제시하는 예수가 한결같이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26)

    1985 년부터 주로 北美의 서부 California에서 모이는 “예수 세미나” 운동은 일찍이 복음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수의 초월적인 인격과 그의 사역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 대신 예수의 윤리적인 교훈의 말씀에서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을 찾으려고 시도한 Harnack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The Jesus Seminar를 주도하고 있는 R.W. Funk, J.M. Robinson, B.L. Mack, J.D. Crossan등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예수가 과연 무엇을 행하셨는가?라는 질문보다도, 예수가 정말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주 의제로 삼아 복음서로부터 역사적 예수 자신의 믿을 수 있는 말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을 찾는데 있어서 자주 비정경복음서인 도마나 베드로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어떤 비유들과 어록들이 정경복음서보다 더 고대의 것이고 더 信任性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를 정경복음서로부터 진정한 예수 말씀을 찾는 잣대로 활용함으로써 복음서의 정경성과 역사적 신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27) 바로 이점에서 예수 세미나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28) The Jesus Seminar 모임의 학자들은 복음서 전승들의 진정성과 그 가능성 여부를 참가한 학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하였는데 그 결과 놀랍게도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예수 말씀 어록 중 실제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간주되는 말씀은 18%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복음서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예수, 곧 갈릴리 출신의 비종말론적인 지혜 선생 예수를 제안하고 있다.29) 

   III. 제기된 문제점과 反省

    우리는 지금까지 지난 100년 동안 서구 신약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가 되어왔고, 사실상 모든 신약학의 방향을 좌우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30)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예수연구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31) 우리가 살펴본 대로 Old Quest든, New Quest든, Third Quest든, 혹은 The Jesus Seminar든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학자들이 제시한 예수는 서로 동일하지 않고, 때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32) 그 주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수 자신이 수많은 얼굴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자신을 탐색하려고 하는 질문자들에게 자신을 그때 그때 각각 다르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역사의 예수와는 관계없이 서구의 신학자들이 제각기 그들 자신의 예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가?33)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대상과 자료에 대한 적합하지 못한 전제와 방법론 문제 때문일 것이다.34)

    우리가 어떤 문제를 추구함에 있어서 그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어떤 자료와 함께 방법론을 사용할 것인가는 패러다임의 문제, 곧 방법론의 문제는 연구하고자하는 대상이나 내용 못지 않게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패러다임으로 그 문제를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35) 사실상 그 동안 예수에 대한 수많은 서구신학자들의 그림이 제각기 달랐던 주된 이유는, 학자들이 찾으려고 한 예수 자신이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었거나, 혹은 예수에 관한 자료들이 학자들마다 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수에 대한 접근 방법론이 학자들마다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신의 방법론이 역사의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인지를 철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지난날에도 그래왔고, 오늘날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탐색함에 있어서 먼저 자신의 방법론이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 없이 자신의 방법론에 의존하여 어떤 문제를 접근하고, 그리고 그 방법론에 의해 제각기 다른 그림들을 산출하고 있다.36) 그런 다음 자신의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진 그 그림이 마치 그가 애초에 그리고자했던 실제 인물이나 대상과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연구에 있어서 역사의 예수에게 접근하는 가장 정당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먼저 규명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방법론을 거기에 일치시키지 않는 한, 역사의 예수는 그에게 숨어 있거나 혹은 그 스스로 참된 역사의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만들 놓고, 그리고 자신이 창작한 예수가 마치 역사의 예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위험을 벗어나기 힘들다.37)

    패러다임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자료에 대한 규정과 그 사용에 대한 문제이다. 고대 역사의 어떤 인물에 관한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설사 고대 세계의 어떤 인물이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현존하는 자료가 없다면, 혹은 자료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자료의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지식을 확립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도 이 점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에 관한 한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어떠한 자료를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그 자료가 얼마나 역사적 信任性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역사 비판학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38) 그런데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 자신이 직접 썼다고 보이는 그 어떤 自書傳的인 기록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예수의 言行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찍은 그 어떤 비디오 테이프나 예수의 육성을 담은 그 어떤 녹음 테이프도,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직접 썼다고 보아지는 그 어떤 傳記物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역사의 예수에 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현존하는 주후 1세기 자료들로서는 예수의 사후 약 30년 뒤에 쓰여졌다고 보아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와, 50-60년대에 쓰여졌다고 보이지는 바울서신, 복음서와 거의 동시대에 쓰여졌다고 보여지는 그 밖의 신약성경과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유대고대사]외에는 없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다.39)

     1947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팔레스틴 유대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쿰란문서는 최근의 구약과 신약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40) 우리는 2000년만에 발굴된 쿰란 문헌을 통해서 현존하는 우리의 구약성경과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구약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다라는 사실과,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중심적인 종교적, 문화적 사상 배경이, 그 동안 R. Bultmann을 위시하여 적지 않은 학자들이 추측한 것과는 달리, 헬라사상(Hellenism)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Judaism)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41) 이와 함께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초대교회가 형성된 이후인 주후 67년경 멸망되었기 때문에, 쿰란 문서로부터 역사의 예수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기대감은 사실상 채워지지 않고 있다.42) 1945년 이집트의 낙 하마디 지역에서 도마복음서를 위시하여 많은 위경복음서들이 발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학자들이 낙 하마디 문서들로부터 역사의 예수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었다.43) 물론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예를 들면 The Jesus Seminar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도마나 베드로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어떤 비유들과 어록들로부터 진정한 예수 말씀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의 역사적 기원이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그 연대도 정경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가 실제로 정경복음서와 독립적으로 역사의 예수 연구에 결정적인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가, 주후 2-3세기에 익명의 여러 크리스챤들이 당시 비기독교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널리 읽혀지고 있었던 고대 헬라의 文人인  호머의 작품들의 영향을 받아썼던 많은 위경복음서들, 이를테면, [도마의 유년복음서], [나사렛인의 복음서], [히브리인의 복음서], [마가의 비밀 복음서], [에집트인의 복음서]들처럼, 2세기이후 고대교회안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을 받아 정경복음서의 예수 말씀이나 사건들을 재구성하였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44)

    그렇다면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유대 고대사]는 어떠한가? 非크리스챤인 Josephus는 그의 [유대 고대사] 18권 3장 3절에서 예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짤막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이때에, 실로 우리가 그를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찐데, 예수라는 한 현자가 출현하였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자였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드린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는 유대인들과 헬라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메시야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에 대한 추종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한 헤아릴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에 대하여 말한바 그대로, 제 삼일에 다시 살아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크리스챤이란 종족들은 소멸되지 않고 존속하고 있다.” 이 글이 참으로 Josephus자신의 글인가, 아니면 후대의 크리스챤들이 첨부한 것인가 하는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45)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John P. Meier의 글에서 여실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의 경향은 적어도 이 글의 상당한 부분이 Josephus자신의 것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46) 하지만 설사 우리가 이 글을 Josephus자신의 글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Josephus의 이 단편적인 증언으로부터 우리의 예수 연구에 핵심적인 질문들인, 이를테면, 예수는 어떤 메시야였으며, 예수는 자신에 대한 어떤 자기 의식을 가졌으며, 자신의 생애에 대한 어떤 프로그램을 가졌으며,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으며, 왜 그가 자신의 유대 종족들로부터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고소를 받아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죽음 및 부활과 초대 기독교회의 태동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을 가지고 있느냐 등등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소위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있는 非마가적인 공통자료로 간주되고 있는 Q자료는 어떠한가? 우리는 Q자료를 통해서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는가? 오늘 날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Q자료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믿을 수 있으며, 따라서 Q로부터 순수한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B.L. Mack은 Q자료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예수, 곧 非메시야적이고, 非신적이고, 非구원사적이고, 非종말론적인 예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47) John Kloppenborg는 심지어 Q를 Q¹, Q², Q³로 분류하여 Q신학의 흐름 및 Q를 발전시킨 공동체를 추적하려고 한다.48) 그러나 설사 마태와 누가가 저들의 복음서 구성에 있어서 非마가적인 자료를 활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슨 기준으로, 무슨 근거에서 마태와 누가에 의해 사용되기 이전의 수수한 Q자료를 재구성할 수 있으며, Q의 신학과 공동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가? 소위 Q 주창자들이 재구성한 Q와 예수가 일치하지 못하고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데 누구의 Q와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인가?49) 따라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Q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를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50)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역사적 예수연구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역사적인 자료로는 신약성경, 특별히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정경 복음서 외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결코 과장되거나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51) 따라서 이제 우리의 예수연구는 결국 우리가 신약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성경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네 복음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드리고,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52) 만일 우리가 복음서의 역사적 진정성과 신임성을 거부하고,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관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정경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역사적 예수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53) 물론 우리가 복음서의 신뢰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복음서를 예수 연구의 결정적인 자료로 삼는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예수 연구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준다거나 통일된 결론에 도달해 주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는, 복음서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특성에 따른 복음서의 해석에 관한 문제 때문이며, 둘째는 역사적 예수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맥이 되고 있는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재구성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복음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예수에 관한 傳記로 보기는 어렵다. 마태와 누가 복음서만이 예수의 출생과 소년 시절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너무나 단편적이다. 그리고 네 복음서 모두 예수의 마지막 생애 3년간의 행적, 그것도 주로 최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에 하셨던 말씀들과 행위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가 3년 동안 이 땅에서 하셨던 모든 말씀들과 행위들을 정확하게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움을 복음서 자체가 보여주고 있다.54) 예를 들면 모든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마 14:15-21; 막 6:34-44; 눅 9:10-17; 요 6:1-15), 공관복음서와 바울의 고린도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성만찬 말씀(마 26:26-29; 막 14:22-25; 눅 22:15-20; 고전 11:23-27),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 막 4:3-9; 눅 8:5-8),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등등의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공통점도 있지만 또한 서로간에 적지 않은 차이점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55)

    우리가 복음서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다르게 반복하여 말씀하셨거나 행동하셨으며,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들이 이 들 중 하나를 보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론적으로 각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예수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만찬말씀의 경우 예수께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조금씩 다르게 네번 반복하여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극히 어렵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복음서 자체의 현상을 볼 때, 설사 우리가 복음서가 수록하고 있는 예수 전승들이 초대교회나 복음서 저자들의 창작물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역사적 예수 자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예수 전승들이 그 전승과정과 기록과정에 있어서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나 혹은 각 복음서 저자 자신의 선교적, 목회적, 신학적, 문학적인 필요성과 강조점의 차이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에게 어느 정도 편집상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56)

    이처럼 복음서 자체가, 주후 28-30년에 있었던 예수의 언행에 관한 전승들이 예수 자신으로부터 예수 전승의 첫 전파자와 관리자가 되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거쳐 주후 60년 이후의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예수에 대한 傳記가 아닌 예수를 증거하는 福音이라는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집이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하여 학자들이 복음서의 자료들을 사용할 때, 때때로 그 자료들이 예수 자신의 역사적인 언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아니면 편집과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위하여 복음서를 접근 할 때, 문학적 접근이든, 편집사적 접근이든, 수사학적 접근이든, 사회.경제적학적 접근이든, 우리의 역사 과학적 비평 방법 자체를 지나치게 맹신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장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는 순수과학이라고 할지라도 탐구자 자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절대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은 없다.57)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과학적인 비평적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복음서의 자료자체를 비판적인 안목에서 보는 것과 똑같이, 복음서 그 자체가 또한 탐구자 자신과 그의 방법론 자체를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두는 것을 말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탐구자는 자신의 방법론이나 전제를 우상화하는 반면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복음서 자체를 상대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58)

    다음으로 둘째 문제인 주후 1세기의 유대교(Judaism)의 재구성(Reconstruction) 문제를 생각해 보자. 주후 1세기의 유대교의 정확한 복원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예수연구는 물론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위시하여 그 밖의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또한 긴요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 당시의 유대교의 모습을 정확하게 復元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점은 최근에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복원 문제를 둘러싸고 신약학자들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59)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이후 전통적으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인간 자신의 율법적 행위나 공로를 통하여 의나 구원 혹은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려는 일종의 “율법주의”(Legalism)였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1977년 E.P. Sanders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 서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믿어 온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일종의 율법주의적 종교나 행위 구원적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적 백성 가운데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Not getting in),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적 공동체 가운데 머물러 있기 위해서 (But staying in) 율법을 지키려고 힘썼던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였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60)

     J.D.G. Dunn, H. Räisänen, F. Watson, J.M.G. Barclay등은 기본적으로 Sanders의 주후 1세기의 새로운 유대교 구성에 찬동하면서 신약성경을 이와 같은 새로운 전망에서 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61) 반면에 C.E.B. Cranfield, G. Klein, D.J. Moo, S. Westerholm, F. Thielmann, C.G. Kruse, Brendan Byrne, S.J., T.R. Schreiner, D.A. Hagner, M.A. Seifrid, T. Laato, I.H. Marshall등은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오히려 이와 같은 새로운 전망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62) 이 둘 중 어느 입장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느냐에 관하여 우리가 쉽게 단언을 내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하여 복음서 등 신약의 자료들을 해석하기 위해 주후 1세기 유대교를 재구성할 때는,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이 충분하게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①주후 70년 이전의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혹은 최근의 새로운 전망을 주창하는 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획일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63)

    ② 설사 우리가 저명한 유대교 학자 J. Neusner의 충고를 따라 주후 70년 이전의 유대교 상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해서 주후 2세기 이후의 규범적인 유대교 랍비 자료보다 현존하는 주후 70년 이전의 자료들을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할지라도,64) 현존하는 이들 자료에 의존하여 당시의 다양한 유대교 상황을 정확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선 자료가 너무나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자료도 참으로 당시의 다양한 유대교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느냐는 문제는 항상 남아 있다.65)

    ③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연구를 위해서 당시의 유대교 자료가 진지하게 사용되어야하는 것과 꼭 같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유대교 문헌 못지 않게 복음서를 위시한 신약성경의 자료가 진지하게 사용되어야할 것이다.66) 이와 같은 순환적인 접근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예수는 물론 예수 당대의 유대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상황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알지 않고 어떻게 유대인인 예수와 바울을 알 수 있겠으며,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감히 바울 자신보다 주후 1세기 유대교를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으며, 그리고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복음서의 예수보다 예수 당대 유대교의 상황을 더 잘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와 똑같이 오늘 우리 중에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보다 역사의 예수를 더 잘 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67)

    IV. 제안: 나사렛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身分과 그의 죽음 理解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한편으로 역사-과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의 역사적 신임성의 확신을 가지고 정직하게 복음서를 접근한다면 복음서를 통해서 어떤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 이해를 중심으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33살이 되던 기원 후 30년 4월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기 중에 예루살렘 근교에서 로마제국 당국자에 의해 그 당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하고, 또한 모욕적인 사형제도인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은,68) 그가 기원전 4년경 유대나라의 왕인 헤롯이 사망한 해에 팔레스틴 유대지역에서 출생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69) 그렇다면 예수는 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는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처형이 예수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인가? 아니면 예수 자신의 독특한 신분과 그의 사명에서 나온 필수적인 사건인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기독교의 시작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대답은, 예수는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유대사회에서 유대나라의 독립을 가져오는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하다가, 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간주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70) 예수 당대에 있어서 주로 로마제국의 반역자들에게 십자가처형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자료도 우리에게 이점을 시사해 주는 듯 하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너가 그리스도, 곧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요한복음 18:33), 예수는 빌라도에게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18:37)라고 하면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23:2,5절에 따르면, 예수를 재판한 산해드린 공의회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 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는 제목으로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결국 이러한 고소장에 의거하여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도록 판결을 내렸고, 그리고 예수의 처형 때에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가 붙여졌다(참고 막 15:12-15).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을 하였는가? 혹은 예수 그 자신은 의도적으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언행과 그의 언행의 여파가 실제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로 비추어졌기 때문에, 그는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실제 반역자로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는가?71)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첫 째,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가 당시 유대지역의 치안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들에 의해 먼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복음서와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글에 따르면, 예수를 실제로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한 자들은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먼저 예수를 체포하고, 재판하고, 처형하기로 결정한 다음,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 넘겼다.72)

    둘 째, 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그 어떤 추종자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처형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예수 당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자는 본인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도 함께 붙잡아 처형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복음서는 물론 신약성경의 그 어떤 외적인 자료에서도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남아 예루살렘 교회를 형성하고 예수 운동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73)

    셋 째, 우리가 복음서로부터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실제로 로마제국에 반역하였다고 할 만한 일들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복음서로부터 예수가 그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을 무장시켜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는 단 한 줄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예수 자신은 후일 유대 독립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의 근거지인 갈릴리 출신이었지만, 예수가 열심당에 동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을 우리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74)

    이처럼 나사렛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반역행위자에게 부과되는 십자가처형을 당하였다면, 예수가 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였는가? 예수는 그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기 전에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으며, 그리고 자신이 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여만 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아셨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자기이해를 가졌었는가? 예수의 사후 기독교 운동을 최초로 일으킨 초대 기독교 교회가 선포하고 가르친 교훈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나타나 있는 내용, “예수는 우리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혹은 예수는 우리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라고 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하셨으며,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기 이해와 해석이 초대교회가 믿고 선포하는 핵심적인 교훈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후대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전승되었는가? 기독교의 가장 초창기 문서를 남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고린도전서 15: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로마서 4:25절에서는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허물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다(역시 고후 5:21; 갈 2:20; 로마서 3:25-26; 8:3-4절 등).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 서신을 위시하여 초대교회 메시지 가운데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하셨으며,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자기 이해와 해석이 초대교회 메시지의 근간이 되었는가?

    예 수의 죽음 사건과 관련하여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몇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이 중요하고,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이 예수 처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또한 예수와 당대 유대인들, 특별히 그 당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의 반목관계는 마지막 한 주간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예수의 행동 중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반목을 불러일으킨 몇 몇 실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①예수의 죄용서 사건(막 2:1-12; 마 9:1-8; 눅 5:17-26); ②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먹은 사건(막 2:13-17; 마 9:9-13; 눅 5:27-32); ③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일(2:18-22; 마 9:14-17; 눅 5:33-39)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2:23-28; 마 12:1-8; 눅 6:1-5); ④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예수에게 찾아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하고 불평한 일(7:1-23; 마 15:1-20; 눅 11:37-41).7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는 그의 마지막 생애 한 주간 전에 이미 그 자신의 사역 중에 죄 용서문제로 인한 신성 모독죄, 안식일 날 병고친 일과 밀 이삭 잘라먹은 일로 인한 모세의 토오라 위반,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 위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인한 귀신의 왕의 힘을 얻는다는 모함 등을 받았다. 특별히 그는 바리새인들과 많은 대립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예수와의 갈등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보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다고 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76)

    그런데 예수의 처형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공관복음서에 발견하는 특이한 현상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 이전에는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통한 당대 정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 등등과 같은 예수가 처형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자신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3번이나 알려주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마가복음 8:31-33절(역시 마 16:21-23; 눅 9:22)에 따르면,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인자가(마태복음에는 ‘그가’) 예루살렘에 마땅히 가서(마가와 누가 복음에는 ‘예루살렘에 마땅히 가서’라는 말은 생략)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가르치셨다. 둘째, 마가복음 9:30-32절(마 17:22-23; 눅 9:43-45)에 따르면, 예수는 두 번째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요, 그런 다음 그가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하였다. 셋째, 마가복음 10:32-34절(마 20: 17-19; 눅 18:31-34)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3번째 제자들에게, “인자가 기록된 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어지게 될 것이요, 그리고 그들은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선고하고, 이방인들에게 그를 넘길 것이요, 이방인들은 그를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요, 그리고 삼일 후 그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예고하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 자신의 죽음 예고를 초대교회의 신앙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최근의 적지 않는 독일의 신학자들, 이를테면, O. Betz, M. Hengel, J. Jeremias, L. Goppelt, H.W. Wolf, P. Stuhlmacher, W. Grim-m77)등도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예수자신에게 있어서 그의 독특한 죽음 인식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3번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한 다음 제자들에게 “인자(예수 자신의 자기 호칭)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라고 하면서,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당국자들과의 결정적인 대립과 갈등을 갖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의 이유와 그 의미를 명백하게 밝히셨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그의 사명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라는 사실도 밝히셨다. 심지어 제자 베드로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을 방해하였을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 8:33)라는 말로 강하게 베드로의 말을 반박하고 자신의 죽음은 이미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하였다.78) 이점은 예수께서 자신의 게셋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중에 자신의 죽음을 자기가 반드시 마셔야할 아버지께서 주신 잔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되어 진다.

    예수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예수가 자기 당대의 메시야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당대의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민족 해방적이었으며, 메시야가 민족의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낯선 사상이기 때문이다.79) 오히려 우리는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을 받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신분과 사명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80)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인자(단 7:13-14)와, 메시야와 야훼의 종으로 불리어지는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사 42, 43, 53장) 하나님의 백성의 죄사함과 회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희생하여야할 자이다라는 자기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81) Hartmut Gese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는 이사야 53장 및 구약의 희생제사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화해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화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한 댓가의 지불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셨음이 분명하다.82)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와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고 있는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죽음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83) 모든 공관복음서와 바울의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의 말씀은 예수 자신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 희생적 죽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84) 이뿐만이 아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도래와, 이 나라에 참여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하여서는 그 자신을 통하여 그들을 대신하는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 사건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내다 보셨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방해하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이 정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셨을 것이다.85)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과 그의 성전 파멸과 새성전 회복에 대한 예언,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한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선언, 산해드린 공의회 석상에서의 메시야,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개적인 시인등이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할찌라도,86) 이들이 예수 자신의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 자신의 독특한 인격과 그의 사명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걸어가도록 하였고, 그러한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의 행로를 위해,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중에 있었던 그와 같은 모든 언행들이 있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7)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상과 같은 우리의 주장이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서신은 물론 전 신약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속죄적, 구속적 설명은 단순히 예수의 참흑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 자신의 신학적 해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기이해에서 유래되었다고 단언 할 수 있다.88) 사실상 우리가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죽음이해를 거부하게 될 경우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모든 행위와 말씀은 물론 예수에 대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그렇게 빠른 기독교적 고백의 형성과 선교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 밖에 없다.89) 이처럼 예수 자신이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독특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 복음서의 예수와 교회가 고백하여 온 예수가 각각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

   V. 나가는 말

    그 어떤 분야의 학문이든 전제나 목적 없이 시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약성경 연구에 종사하는 신약학 학자들도,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런 것처럼, 앞으로도 자기 나름대로 어떤 전제 아래 신약성경을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위해 신약성경을 연구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신약성경이 단순히 삼위 하나님(아버지, 예수, 성령)에 대한 인간/초대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이나 탐구 혹은 역사나 서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접근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신약성경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삼위 하나님 자신의 구원 계시와 역사의 규범적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9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세기 동안 서구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그가 신약성경의 가치 기준을

① 윤리적 이상에 둔 19세기의 Ritschl과 Harnack의 舊자유주의 노선에 속해있었던지, 아니면 ②살아있는 종교경험에 둔 W. Wrede, H. Gunkel, W. Bousset의 종교사학파의 노선에 속해 있었던지, 아니면 ③인간의 실존적 결단에 둔 20세기의 R. Bultmann의 양식사학파의 노선에 속해 있었던지 상관없이, 신약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경험이나 사색, 혹은 역사나 서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접근하였다. 따라서 지난 세기 동안 서구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신약성경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는 물론 신약성경이 전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적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와 그리스도로서의 메시야적 자기의식, 그의 代贖的 죽음과 3일만의 육체적 부활, 오순절의 성령강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 교회를 통한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들의 역사적 眞正性을 거부하였다. 이처럼 많은 서구신약학자들이 신약성경의 규범적 계시성과 구원역사성과 초월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약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고대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으로 간주하면서부터 신약성경은 서구 사회에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하는 規範性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과학적 비평방법에 의해 얼마든지 비판되어야하고, 재해석되어야하는 상대성을 지닌 사람들의 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서구신학자들에 의한 신약성경의 상대화와 비역사화는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신약성경을 역사적 信任性을 가진 규범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접근할 때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역사의 예수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상대화시키면서부터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와 역사에 살았던 실제 예수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와 다른 역사의 예수를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떠나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서, 그들의 증언을 불신하고서는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마치 21세기에 사는 자신이 역사적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보다도 역사적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오만이며,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91) 예수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결국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싶은 예수를 찾는 것에 불과하다.92) 하지만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아닌 학자들이 만들어낸 예수는 예수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예수는 교회의 유익도, 구원과 생명도 가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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