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새 관점과 관련해 정리를 잘 해 놓은 사이트를 발견 하였다. 링크는 아래..
아래는 또 다른 링크인데 Dunn의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새 관점에 의해 이신칭의가 어찌 영향을 받게 되느냐의 문제인 것 같은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정리를 잘 해 놓으셨다.
http://orthodoxy.tistory.com/221
아래는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린 기사.. 여기서도 역시 요약이 잘 되어 있다... 이런 기사들이 왜 이제야 보이는거지??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7883
바울 신학에 대한 새 관점
일시: 2009.3.24-26
김세윤 교수 초청특강
장소: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 대강당
(아래 글들은 강의 시에 들은 바를, 참고할 것일 뿐, 직접 듣지 않은 가운데, 아래 글로 강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 적절치 않습니다. 단지 그 맥락을 이해하고자 작성한 다듬지 않은 것임) 오자와 탈자가 있고,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한 부분은 빠진 부분이 있음을 알림.
30년간 신약 학회에서 폭넓은 논의, 주제에 대하여 익숙한, 신학사적, 교회사적 중요, 종교 개혁, 16세기 이후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 바울 복음에 대한 중요한 표현방법의 칭의론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 옛관점에 대치하는 새 관점의 주장, 종교 개혁 이래로 혁명적인 사건, 역사적 예수의 탐구의 운동의 파장, 신학에 있어서의 혁명에 버금가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1977년부터 시작, 10년 후 역사적 연구에 대한 제3의 새로운 연구가 진행이 됨, 이는 19세기말 까지의 슐라이어 막허의 자유주의에 대한 재 탐구, 불트만의 제자들에 대한 재 탐구, 논점을 일으키나, 바울 신학에 대한 새 관점 만큼 혁명적이지는 않았다.
30여년간 두 중요는 역사적 탐구와 바울 신학의 새관점이 대두됨, 새관점의 발생과 통찰력, 전개와, 주장들의 대강, 평가는 어찌해야 하는가? 옛관점과 그것을 배양한 새 관점이 변증법적 합일 상태에 이르렀음, 앞으로 격렬한 토론을 통하여 이룬 것, 미진한 주제를 살피며, 마무리 함.
전통적인 종교 개혁운동에 있어서, 바울 신학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 십자가 죽음이해는 법정 주의적 대리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스도가 우리 죄 위하여 죽으심.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하고 죽으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죽음이 어떠했기에, 작용점은? 그 결과로서의 올바른 화해, 영어의 신학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순수영어는 별로 없는데, 속량, - 그리스도의 죽음의 작용과 죄 문제 해결, 창조주와의 화해, 관계성 회복을 법정적 범주로 다루어,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렸다는 것,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하여 용서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것, 법정적 범주로 풀어, 정죄에서 건져내심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로서의 저주 갈3:13,의 짐을 대신 지심으로, 그 결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회복의 길을 열어주심, 그 구원의 사건, 속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다. 역사적 구원 사건을 받아 들임이 실존적 사건이 된다는 것,
믿음을 통해 복을 입는, 은혜로 덕을 입는 것, 그 결과 최후의 심판에서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로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인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칭의요, 구원인데, 죄용서와 무죄선언되는데, 믿음으로 지레 체험하는 것이 이미, 그러나 아직아님, 신적 생명- 영생- 오는 세상의 삶, 내용적으로는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신적 생명을 가짐, 영광 회복, 영생, 하늘 성전에 들어감, 하늘 안식에 들어감, 등으로 풀어 진술한다.
주의 심판대에서 의인으로 판정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바를 믿음으로 지례 체험하는 것이 칭의이라는 복음의 재발견, 그 사건의 기술 복음선포는 바울 식, 그러므로 바울 복음이라 칭하며, 루터로 하여금 종교 개혁이라는 엄청난 혁명을 이룬 것임, 베버에 의하면 종교 개혁뿐 아닌, 사회 문화적으로 새시대를 열었음, 개신교 신학은 적어도 500여년 전통을 계승했다.
이러한 바에 도전이 일어났다. 종교사학 파들은 법정적 범주의 칭의론 이해에 대하여, 역사 비평적으로, 당시 종교와 비교하며, 당시 헬라주의 신비주의와 비교하여 볼 때 좀더 좁은 것으로 보았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내포된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의식의 드라마로 표현되듯,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아담적 자아는 죽고, 세례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내포되어 장사되고, 연합되어 새로운 의인으로 부활하는 바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중심 내용으로 보았다.
칭의는 유대주의자들과 대항하고자 한 논쟁적 교리이지,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 알버트 슈바이저가 잘 표현함, 설득력 있게, 칭의론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빌립보서3장에만 나오고, 나머지 바울 서신에는 없다는 것으로 봄, 이는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만 진술되었다는 것, 즉 논증적 교리이지, 바울의 윤리를 포함할 수 없다는 것, 로마 법정적 범주로 이해하면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이라, 이미 지례 받아서 의인이라면 마음 것 살아도 된다는 주장이 되지 않느냐, 또한 장로교 예정론에 대한 이해의 잘못으로, 만세 전부터 구원하고자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는 롬8장28절, 그러면 윤리가 바탕이 없는, 윤리가 필요 없다는 것인가? 하는 도전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바울의 후반부가 윤리적 삶인데, 바울 윤리의 근거는 그리스도와 연합에 근거한다는 것, 칭의론에 근거함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에 근거하는 윤리가 아닌가 하는 주장.전통적 견해에 대한 유대 학자들의 대항, 19세기 말부터, 신약 성경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몽트 피오레는,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교 이해와 맞지 않다는 것, 죄, 죽음과 연대한 악의 세력, 고전15장 이하. 롬7장,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당시 정통 랍비 유대교에 대한 이해가 없지 않았는가?
2차 대전후 독일 거주 유대인, 한스 요하스, 팔레스틴 유대교에 대하여는 모르고 다소 출신으로 헬라파 유대교만 알기에, 헬라말로 토론 될 때에 츠다카는 관계론적 개념인데, 디카이오스네, 의인 만든다 디카이오오로 번역하면 법정적 이해로 좁혀져서, 죄 용서, 죄에 대한 무죄 선언으로 좁은 의미를 드러내나 팔레스틴 유대교는 그러하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 하였다.
하버드에서 유대교 교수 조지 모어, 3권으로, 유대교가 율법의 미쉬나에서 규정된 600여개의 율법과 이해에 대한 랍비들의 전통적 전통을 지킴으로 율법 완수의 공로에 따른 의인으로 칭한다는 유대교로 이해했던 종래 해석은, 로만 가톨릭 신학 이해에 빠져서, 공로 신학, 덕행으로 연옥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 중세 신학과 1세기의 합일로 유대교를 율법을 완수하는 정도로 구원을 언급하는 바는 그렇지 않다는 것, 유대 학자들의 반발,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의 반론 제시.
E.P.Sanders가 1977년에 팔레스틴의 유대교, 기원 전후 200년에 다양한 유대 문서, 초기 랍비 문서를 점검하니, 팔레스틴 유대인들이 가진 유대교는, 헬라파는 거류민으로 헬라파를 사용, 자기들과 하나님과 구원을 이해한 바가 유대교 내부에서 바라본 바를 분석하니, 결론이 언약적 율법주의로 요약됨, 초기 성전시대에, 바벨론 유수 후 성전 이루고 유대 공동체를 이룬 시대, 헤롯 대왕이 재건후 주후70년에 무너짐, 기원전 5세기에서 주후 70년, 사실 미쉬나법이 만들어져 랍비 유대교로 전환하기 까지의 주후200까지, 이는 정통 율법을 지키고 구원 얻는 종교가 아니었고,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 였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주의(1977)의 주장하는 바, 제 2 성전 시대의 유대교는 율법 지킴-공로-의의 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의 종교 였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란,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은혜로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성 강조 2)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양면성이 있으니, 하나는, 3) 이스라엘 선택을 지키신다는, 지탱하신다는 약속- 언약-을 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하나됨이라는 것, 이를 이어받은 이해, 아비노릇, 왕 노릇, 목자 노릇 시23편, 신랑 노릇, 포도원 삼아 농부로, 거룩한 전쟁의 사령관, 언약에 바탕 한 그림, 율법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으로 지탱하심을 드러낸 언약이자, 둘째로, 동시에, 4) 언약 관계에 머뭄을 위한 상대자들에게 율법 준수 의무를 줌이며, 5) 하나님은 그들의 순종은 상주시고, 불순종은 벌 주신다. 6) 불순종이라 해도 율법은 죄에 대한 보완 장치로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니, 회개- 성전 제사드림, 레위기의 주요 사항, 다양한 죄에 대한 알고 모르게 지은 죄는 일년에 민족 전체를 한꺼번에 대 속죄일 날 언약궤, 시은소에 피를 뿌림으로, 새로난 아이 같이 시작하게 한다는 율법 자체 내의 장치, 속죄의 방도가 마련되었다는 것, 그 결과 7)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다. 8,) 율법에 대한 순종, 속죄, 하나님의 일방적 자비로 언약 관계가 지탱된 자들은 모두 종국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롬11:26절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진술은 랍비적 숙어이다.
은혜로 인한 선택과 언약, 하나님의 은혜로 난 선택과 언약이 우선하고, 언약 관계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였다는 것, 그러하기에, 유대교는 8 명제에 따르면, 은혜로 인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진입은- 의인의 관계- 창조주 노릇해 주심에 진입은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약속에 의한다는, 진입은 은혜로만, 율법 지킴은 올바른 관계에 머무름 위함이라는 것, 진입(getting in), 머무름(staying in), 곧 요약하면, 유대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구원)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름 하는 종교 였다는 것이 Sanders의 진술 요지이다.율법을 다 못지키니, 자체 내의 율법 장치에 따른, 전통적으로 종교 개혁의 바울 신학 이해는 바울이 대항한 그릇된 율법이해로 이해하고자 함으로 잘못된 것이고, 바른 율법 이해에 따른 바울 신학을 보아야 한다는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조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
[ 바울의 율법이해에 Sanders의 이해를 인정한다면, 바울 율법이해의 가능성 4가지 ]
a) Sanders 자신은, 바울이 율법 지켜 공로-의로 구원 받음을 비난한 것이 아니고, 바울이 유대교에 정진한 자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함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만을 통해서, 메시아를 통해서만, 구원의 배타적인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로서만,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모든 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배타성에 비추어 자신의 율법을 배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스로서만 이란 율법은 소용없다는 것이 된다는, 구원론의 배타성에 따라 율법을 배격하고, 또한 바울이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부름 받아, 율법을 중심으로 한, 언약의 표징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특수주의가 방해되니, 유대교를 선교가 방해되기에 바울이 배격했다는 것,이다.
b) Sanders 이전에, 라이스넨(H.Raisanen)이 1983년에 바울과 율법이라는 글에서(헬싱키 대학 학자, 모어씨백, 신약학 논총에서 학문적 연구 32권으로, 인자론, 김세윤은 33권으로 출판) 바울이 유대교를 율법지킴-공로-의의 종교로 억지로 '왜곡'하여 비판하며, 자신의 칭의론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라이스넨에 의하면, Sanders의 유대교 분석은 옳으나, 바울은 공로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바울이 회심 후 이방 선교를 위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에서 유대교를 왜곡했다, 바울 유대교 율법 이해는 상호 모순이 많다는 것, 논쟁 상황에서 극단적 견해로 공로 신학으로 유대교를 왜곡했기에, 논쟁적 상황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첫째, 구원자는 그리스도 뿐이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에, 둘째, 바울이 유대교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c)영국의 J.D.G.Dunn과 N.T.Wright등은, 바울과 유대 신학을 적절히 조화 가능하고, 바울 율법관은 Sanders의 이해와 같고 적절한 대응을 바울이 하였는데, 두 개념만 새롭게 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율법의 행위'라는 바울의 숙어를, 옛 관점에서는 미쉬나법에는 600여개, 세분화된 랍비적 규율을 다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인으로 인정받음으로 이해했는데, 예전과 같이 모든 율법 규례들을 지킴을 뜻하는 것으로 보지 말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이방인의 정황 속에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논쟁적 표현이므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됨의 표징들,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을 구분하는 법들, 즉 언약의 표징들- 할례, 안식일 준수, 정결례 음식, 이것이 거룩한 표징들이기에, 3가지에 집중해서, '언약 백성의 표징들' 거룩한 백성되게 하는 표징들, 언약의 표징, 특히 음식 가림, 이렇게 해석을 하면(좁은 의미), 바울이 Sanders가 밝혀낸 '언약적 율법주의'의 당시 유대교에 적절히 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이 유대교를 유대주의로 번역함에 유의-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율법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짓 선생들이 이것을 주장하였다는 것, 할례를 받아 첫 언약의 공동체에 들어가야 구원 가능치 않은가, 헌데 바울이 엉터리가 아닌가 하며, 이제라도 할례 받아 신령한 언약 속,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신학적 근거에 의하여, 뒤 늦게라도 유대 공동체에 폅입되어야 하니, 지금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바울이 반발하였다는 것이 던의 주장이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로서 옛 신학 체계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라는 것- 던의 주장, 선교의 정황 속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 곧 칭의란 말은 법정적보다 교회론적으로 이해, 사회학적으로 이해함-던의 경우,
곧 유대교가 행위-공로-구원의 종교라고 바울이 비판함이 아니고,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 인 종교로, 즉,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신들만 선민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자신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이방인들을 제외시키는 배타성을 가진 종교라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인 된다는 칭의의 교리를 펼친 것은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즉 유대 민족의 표징들인 할례, 음식/청결법, 그리고 안식일 법을 지킴없이, 즉 유대 민족의 구성원들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구성원들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는 것이다.
저희들의 의, 나의 의, 히3장, 자서전적 회심을 진술함에 있어, 유대인으로서 히3:3-5, 흠없는 의, 출생이 유대인,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 부모가 다 히브리인 이라는 것, 아람말을 쓰는 다소인 이라는 것, 헬레니스타인과 아람말 쓰는자는 헤브라이오이, 아람말을 모어로 한 유대인이라는 것,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자기의 성취를 통하여 얻은 의, 율법으로 바리새 운동에 동참한 자였다는 것, 제사장 민족으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자 한 자라는 것, 비느하스의 열성을 본받아, 주후 1세기 마카비 전쟁, 거룩 운동을 하던 셀레수스4세를 대항하여, 이스라엘 순결 운동,
그러나, 나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저희들의 의 롬10장, 자기들의 의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이방인이 구원을 얻음을 지적함,정통적 옛관점에서는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고자 했는데 이를 개정하여, 개인적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적 의라는, 이스라엘 민족만 의롭다는 이해, 언약의 백성이라는, 그 주장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에 이를 배격한 바울이라는 것, 사회학적 개념으로,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공동체 참여함을 허락치 않기에, 이방인 사도로서 이방인 선교를 유대인 거짓 선생들이 방해하니, 그것을 배격한 것이라는 것- 던의 주장, 이는 당시 유대교를 적절히 대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율법의 행위라는 바울의 숙어를 유대 규례 지킴으로 봄이 아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는 법들로 생각하면, 바울의 대처는 적절하고, 민족적 선민으로서 언약적 축복을 주장하는 그 같은 것을 배격하고 칭의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 유대 언약 공동체 규례를 지킴없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된다는 것-3번째 가능성,
d) 4번째 가능성은 소수 이론으로, 카나다 신학자 L. Gaston의 언약 종교(The Two-Covenant) 이론으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한 시내 언약(율법)에 의하여 구원 받고,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복음)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는 주장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 모세 통한 옛 언약으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으로 구원 받기에 장자, 차자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곧 바울의 새 관점은 4가지 주장을 포괄함으로, 요약하면, Dunn과 Wright는 새관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창자들로 새 관점을 주도한다. 두 사람의 관점이 영향력이 있으니, 다수의 사람들이 이들을 추종한다.
3. 새 관점의 시대 정신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히틀러 학살이후의 신학으로,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에 대한 깊은 반성에 따른 친 이스라엘, 친 유대교적인 정신이다. 히틀러는 기독교도 유대교적으로 보았음, 유대교와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회를 없애고, 기독교 들어오기 이전의 신화로 새로 구성하고자 했음, 서양 기독교를 보편화 한 국가들의 연장 선상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침묵과 동조, 독일 루터 교, 교황청이 다 알고 있었음, 친 이스라엘 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대교는 공로 종교라는 정신이 있으나., 새 관점은 민족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공로 종교라는 하등 종교 관을 벗어나, 자기 백성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함이 민족주의 자라는 역설을 펼침으로, 가장 인종차별 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종교로 해석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4. 새 관점의 문제점들.
특강: 김세윤 교수
일시 2009.3.25.
지난 시간에는, 칭의론에 대한 개신교의 전통주의의 관점을 새관점이라 함으로, 옛관점의 핵심을 언급하였고, 문제 제기가 있었다. 기독교 내에서도, 또한 유대인 학자들에게서도, 20세기전반만 해도 루터 관점을 효과적으로 불트만이 주장한고로, 불트만은 루터 신학의 신실한 대변자 역을 한 꼴이 됨.
1977년의 Sanders의 바울과 유대교라는 저서로 인한 새로운 이해가 있었기에, 바울 신학의 재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운동이 있었고, 4가지의 가능성이 있었고, 중심적인 것은 Dunn와 Wright의 주장이었다. 2차대전 후의 Holocaust의 시대정신에 따른 결과적 산물로서, 새관점 학파는 그 추종자들의 공통점은 5가지인데, 유대교의 새해석에 따른 바울 신학의 새로운 해석함에 있어서는,
ㄱ. 기본 전제로서의 언약적 율법 주의(Covenantal Nomism)를 전제한다.
ㄴ. 사회학적 접근방법을 표명하기에,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 선교라는 두 개념들이 바울 신학에 결정적 동력을 제공하기에, 교회론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전체의 교회론을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인가 하는 언급을 하게 됨, Dunn과 Wright의 바울 신학 해석에 있어서, 바울이 칭의론을 주창함은 안디옥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식탁교제문제가 대두 됨으로, 언약 관계 속에 믿음으로만 들어올 수 있는가?
ㄷ. 바울의 칭의 교리의 의미를 축소, 곧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 시키기 위하여, 즉 이방 선교를 촉진하기 위하여 고안된 교리로 취급하며, 바울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cf. wrede/ Schweitzer). 신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의 언약백성, 할례를 받음을 요구한 이유, 안디옥에서 음식 규례, 심지어 베드로 까지도 물러가는 상황, 바울의 칭의론은 처음부터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에 문제시하고 진술한 것이라는 것이다.유대인 됨 없이, 즉, 신의 언약백성의 표징들 없이(3가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언급하는 가운데 칭의 론을 바울이 언급하였다는 것임, 이들이 자연히 사회학적 신학방법이 되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됨에 관심을 둠,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선교라는 난제가 바울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는 것, 종교 개혁은 구원론, 칭의 론에 두었다면, 종교사 학파들의 반발이었는데, 바울 신학은 칭의 론 보다 교회론에 중심을 두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방인이 들어오는 것에 염두 하였다는 것이다.
이방 선교를 촉진하고자 고안된 교리가 칭의 론이라 보았음, 유대교로 개종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 백성의 표징 없이라는 것, 종교 개혁신학 개신교의 경우는 법정적 개념을 중심 하였는데, 무죄 선언 됨, 의인이라 칭함 받음, 최후의 심판에서 법정적 범주에서, 설명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전통이나, 새 관점은 이점을 논하지 않고, 단지 이방인들이 유대교 개종 단계 없이, 유대인 됨 과정 없이, 신의 언약 백성 단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되는가를 지적함으로 칭의론 보다 교회론, 사회학적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19세기 슈바이저의 관점을 승계하게 된 바이다.
ㄹ. 바울의 율법/ 유대교를 비판함은 바울이 율법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한 바, 그 결과 이방인들에게 불리한 장벽으로 만든 것을 비판한 것이라고 새 관점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유대교를 율법주의라는 비방으로부터 보호한답시고, 도리어 가장 배타적인 인종차별주의 종교로 묘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 거룩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법이라고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구약의 재적용이 많음, 루터신학 측면과같이 적대적으로 대함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오해와 오용을 비판한 것이라는 것, 언약적 율법주의 관점에서, 자신들만 언약적 백성으로 보고, 유대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지탱하고, 이방 개 돼지로 언급하는, 개들을 삼가라(조심하라-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사용하던 말을 악한 유대인들에게 사용한 경우).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담장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오용과 같은 것에 비판한 것이지, 율법 자체에 대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것, 새 관점 학파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공로주의적 종교라는 오명을 벗기고자 하다가 인종차별적 종교로 만들어버림,
ㄹ. 칭의 교리의 후대의 발전: 안디옥 사건과 갈라디아 논쟁이 발단.
칭의 교리가 갈라디아서 논쟁이후 만들어진 교리이라는 것, 갈라디아서가 초기 기록이라면, 롬-56-57년, 갈56년? 갈라디아서 기록 시기가 중요함, 안디옥 사건을 49년에 일어났고, 살전후는 52-3년으로, 소수는 갈 48년으로, - 칭의론의 발생이 갈라디아에서 바울 교회에 유대인들이 도전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칭의론의 복음을 선포함에 유대인들이 대처하였다는 결론에 이르나., 새관점은 살전이 먼저, 안디옥 사건은 49년에, 나중에 갈라디아 사건에 직면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될수 있다는, 이방 선교를 촉진하고자, 이미 20여년 동안 31년에 바울이 성도가 되었다 보기도 함, 신학 훈련을 받은 저자가 예수 운동에 초기부터 참여하여, 사도적 교리에 공헌하였다는 것, 31-48, 49년까지 근 16, 17년 어간 창조적 유대 신학적 기반에다가 이방선교라는 혁명적 사건, 그리스도의 사활, 다메섹 계시 체험으로, 새관점 학파는 56년에 갈라디아서가 쓰였다는 것, 칭의론의 기원이 늦다는 것이 새관점 학파의 주장이며, 바울 복음의 중심에 칭의론이 자리하지 않는다는 것, 유대주의자들과 의 논쟁 상황에서 칭의론이 대두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개혁이래로, 19세기의 자유주의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 교리에서 해방시켜서 갈릴리 유대 상황에서, 밀이삭 먹었다고 안식일 시비를 받고, 바리새 사두개인들과 논쟁도 하고, 거짓 메시아라는 기소로 빌라도에게 처형된 역사적 예수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신학사적 운동에 버금가는 것이 바울의 새관점이라는 것, 당시 정황에 비추어 바울을 새롭게 이해하자는 것, 자연히 토론이 격렬하게 일어남, 종교 개혁 유산을 중시한 전통보수적 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음, 첫 제안자들이 잘 다듬어진 제안이 아닌, 다양한 난제를 정돈한 통합적 제안이 아닌, 루터 신학을 공격하는, 코드워드, 루터만 칭의를 주장한 것은 아닌데, 칭의론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고, 슈바이저는 칭의론을 논쟁적 교리에 불과하다고 언급하였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5. 새 관점에 대한 반격
a) 바울 해석에 대한 비판
- 바울의 율법/ 유대교에 대한 태도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4가지 견해들 모두 다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주종을 이루는 Dunn과 Wright의 견해에서, 그들의 '율법의 행위'와 '나의/ 그들의 의'라는 바울의 숙어들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Dunn이 지목한 자신의 이론을 위한 두 'test cases': 바울의 회심/ 소명과 갈3:10-14의 해석의 오류(김세윤, 바울 신학과 새 관점, 1장, 4장 참조). 바울이 율법을 죄, 육신, 죽음과 더불어 역사하는, 인간을 속박하는 악한 세력들의 연합의 일부로 보는 관점(롬7장의 사례)을 완전히 무시하고,바울이 율법과 육신을 어떻게 한 묶음으로 하여 성령과 대조하는 가를 무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Gundry, Snodgras, Westerholm, Stuhlmacher 등). I.H.Marshall에 따르면, 엡2:8-10, 딤후1:9, 딛3:4-7, 행13:39; 15:10-11을 증거로 제시한다.
b) 유대교에 대한 전제 비판
이와 같이 새 관점 학파의 바울 신학 해석이 실패함으로, 그들의 전제인 Sanders의 유대교 이해를 새로 검토하여 보아야 한다.
-F.Thielman
-M.A.Seifrid
-C.L.Quarles
-G.Stanton,
-M.A.Elliot, The Survivor of Israel (Eerdmans. 2000)
-Carson, O'Brien and Seifrid, Justification and Varigated Nomism (Mohr Siebeck& Bakee, 2001)
-Laato; Eskola; A. Das, etc.; "(covenant) NOMISM"과 신인 협동설(synergism)
-S. Gathercole, Where is Boasting? : Early Jewish Soteriology and Paul's Response (Grand Rapids: Eerdmans, 2002)
- 결론:
- 유대교는 큰 틀에서 보면 원래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이나, 제2성전 시대에 종말론적 심판/구원에 대한 기대와 개인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점차 개인적 율법-공로주의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전통적 신앙고백자들이 새 관점에 대치함, 2갈래로, 새 관점의 전제하는 바가, 샌더스의 전제가 옳은가? 함에 지적함,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샌더스가 강조하고자, 종교 개혁자들이 유대교를 미세히 율법을 지켜 심판에서 다하면 의인이라 하고, 죄 많으면 심판받는다는 샌더스의 주장을 그르다는 것,
바울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은 4가지 가능성이 설득력이 없다, 주종을 이루는 던과 라이트의 주장에서, 율법 행위들을 재해석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보나, 이때에 율법의 행위들이란 율법 전체를 지킨다는 것이나, 논쟁의 상황에서는 유대인들과 분리하여 이방인들만 걸러내는 유대인들의 정체성 표징-할례, 안식일, 음식규례-을 지적하였다는 것,율법의 행위들이 유대인들의 버클과 같다는 것, 그 모든 사용례에서 드러나는 3표징을 염두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르는 것만을 언급하는가? 좁은 의미로 축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도전을 받음,
나의 의- 옛 관점은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빌3장1-5절, 나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었다는, 비느하스와 마카비 혁명자들의 영적 유산을 따른 열성으로 이단자들을 핍박하고자 기독인들을 죽임에 참여 했던 자신의 의라는 것이, 새 관점에서는 민족적으로, 나의 의를 해석하여, 유대인들만 언약 백성되어, 덕입는 관계로 설명하여, 바울이 민족적 구성원으로서 의를 가졌다는 것이지, 자기의 의를 드러냄이 아니라는 것,롬10장, 하나님의 열성은 있는데., 지식을 동반하지 않은 열성이라는 것,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으로 온 것을 인정 못하고, 무지 상태에서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한 것이 틀렸고, 자기 의를 추구함 없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 이방인들이 의를 입었다는 것으로 봄,
- 유대 민족적 의로, 자기들만 의인들이라는 것,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성을 띠고 해석함이 옳은가?
유대인들의 정체성 표징들로만 해석함이 옳은가, 또한 나의 의 그들의 의에 대하여서도, 김세윤 1장, 4장에 지적함.
빌3장3-10절까지 나의 의, 자서전적 진술에서, 자신의 의를 2가지로, 출생의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베냐민 지파- 우월감, 북과 남이 갈릴때에, 남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같이하여 사울 왕이 났다는 것, 유대이름 사울, 로마이름 바울, 다메섹 도상을 누가가 3번 되풀이 하여 중요성을 언급함, 12, 13장까지 사울, 바울 세계 선교로 하면서는 바울 이름을 사용함, 3표징이 민족적 의라 하고, 3문장은 바울 자신의 개인적 업적, 바리새인- 율법의 관점에서 바리새 운동은 원래 유대 중산층 평신도 운동이었음, 출19장5절에 제사장들의 민족이라는 언급을 근거하여, 그 이상을 민족 전체가 구현해야 한다고 보아,
레위기 정결례법- 제사장의 성결법을 평신도들도 민족 전체가 성결해야 한다는, 성별(바리새),
열성으로는 특수 범주임, 민수기의 비느하스 이야기와 다니엘서의 마카비 직전에 기록된 것인데, 유대인들을 헬레니즘화 하려는 셀류키 왕조 4세에 대항하여, 일어난 열성으로 유대교를 핍박하는 자들을 죽이는, 그 피로 속죄한다는 의미로, 주후 40년 경부터 다시 로마에 반하여, 열성당-셀롯당이 일어남,
영광과 언약과 율법에 신실함으로 흠없는 자라는 것, 빌3장2절에는 빌립보에 침투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상대하여, 같은 유대인들과 차별하여 언급하는 문맥임, 교리를 혼란 시키는 자들을 개놈들을 조심하라고 함, 그 개놈이란 유대인들 거짓 선생을 언급함, 고후11장, 아브함의 자손인줄 아느냐 나도 그렇다.. 내가 더 하다는 것, 자기를 민족적 의에 포함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 개인이 그들보다 우월하나,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알고 나의 의를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
대차 대조해보면,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보니 지난 유대인으로서의 행위, 자기의 가 손해였다는 것, 땅에 속한 자들- 율법, 결례를 헐렁하게 지킨 자들을 언급함,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단자들로 보았으나, 자기 의를 주장하던 자신이 그러했다는 것,
현재적으로 사도직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 바울의 개인의 의를 민족적 의로 새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롬10장4절, 그들의 의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놓쳤다, - 이를 민족적 의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의 언약의 관계에 하나님이 은혜의 선택, 의의 관계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은 그런 연유로 자신들만 의인이라는 것, 자기 의란 그것이라는 것,
헌데 할례받지 않고 유대인 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는 자기 의를, 이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의로 본다면, 언약으로 불러주신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의인데, 또 다시 이를 하나님의 와 대립 개념으로 새 관점 학파들이 보는가?
하나 하나 주석적으로 풀어보면 이치에 맞지 않음, 주석적으로 토론을 해야 판 가름 됨, 던이 자신의 새 관점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실례로, 바울의 다메섹 소명 사건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갈3장10-14절을 해석함이 자기가 볼 때 옛관점이 틀리고, 자기 새 관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 -김세윤 1장에서 점검함, 4장에서 점검함,
다메섹 소명 사건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계시와 이방 사도의 소명 사건이 바울 복음의 기원이라 함,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이해까지 다메섹의 계시와 이방인 사도로 부름받음에 심취하여 궁국적으로 키워간다는 것, 모든 새 계시는 옛 계시(쓰여진 성경)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 바울은 훈련된 신학자 였다는 것,
지난날 유대 신학자 였다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자신의 체험 계시를 구약 성경으로, 이 6. 49장. 겔1장 등에서 해석하고, 또 한편 그리스도 사건을 핍박할 때 증거하던 바에 대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옳다는 교리 확인을 받고, 자기 메시아 사상을 예수가 어떤 메시아 였는가로 고치고 확인하게 됨, 먼저 사도 된 자들의 교리로 확인하고, 이방 선교에서 문제를 발견하여 다시 해석하고,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에 도장이 찍힘, 바울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형상 기독론), 구원을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 됨으로, 하나님의 형상 얻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되어감(롬8:29, 고전19:45-53- 아담적 형상을 입어, 종말에), 다메섹 현현에서 겔1장 전승(랍비 전승에서 중요)에 기초하여 형상 기독론을 언급하게 됨, 요하킴 예레미야스(19세기 말부터) 바울의 칭의론도 다메섹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빌3장, 율법의 의로는 흠 없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이것이 결정적 다메섹에 근거한 칭의론 단서, 갈1장에서 유대인들을 대항해서 사람들을 통하여, 사람들 깨우침으로 아닌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다- 자기가 지난날 어떤 자였는가를 열성 갈5:15, 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자인데, 구약에 근거하여 보니, 사49장 주의 종의 노래, 렘2장5절, 어머니 태로부터 성별,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유앙겔리조마이, 소명을 받았다는 것, 갈1:11절을 뒷받침 함,
아라비아로 가서 묵상이 아닌 복음 선포를 위하여, 다메섹 성밖이 아라비아 임, 이스마엘 자손, 통치자 아라파스 2세가 체포하고자 하니, 다소로 도망갔다는 것,
칭의론이 율법에 의한 의를, 나의 의를 얻으려다, 극단이 열성 유대인,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옳게 인정하셨다. 신27:23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거짓 메시아로 정죄 하였던 율법이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게 하였다는 것, 율법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과한 하나님의 의로 우리 죄 짐을 벗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 이라는 것에서, 다메섹 사건에서 칭의론이 근거한다.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음,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 곧 구원, 형상과 구원이 같음, 본질에 참여, 영생 얻음,
던이 새 관점을 주장하고자 김세윤를 공격함, 다메섹의 사건이 복음의 계시였는가? 혹은 열방의 빛이 되라는 것이었는가? 둘 다 임. 헌데 전은 열방의 빛, 이방의 사도 노릇만 하라는 것이 다메섹 사건이었다고 주장함, 갈1:11, 오로지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복음을,
바울이 이방 선교 하다가 이방 교회에서 도전 문제가 일어나니, 처음으로 칭의가 나왔다는 것, 주후32, 33년에 성도가 되어, 이방인 사도, 48년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면, 바울이 무슨 복음을 선포했는가? 살전에 칭의가 안 나온다는데, 율법이 명백히 오도해서, 그때에 이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재고하지 않았는가? 살전에서 율법이 나오지 않음, 살전 복음의 요약이 나옴,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기다린다. 진노(최후의 심판)에서 건지심,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건 살전1:10, 롬8:34, 최후 심판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한 분,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대적하리요, 오직 그리스도의 변호, 중보가, 갈3:10-14절, 김세윤, 4장 참조.
롬7장, 고전15:55-56,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 롬7장임, 바울이 죽음이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삼켜진바 된다는 것, 죽음이 우리 실존에 어찌 독침(죄)을 쏘아 들어오느냐! 죄를 짐으로 죽음을 품삯으로(롬6:23), 죄의 삯은 사망, 죄의 힘은 율법, 율법이 있기에 죄라는 것을 알게 함, 율법, 죄, 죽음은 우리를 멸망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연대 속에 있다는 것, 유대 신학자 였던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지적함(롬7장), 그 계명이 도리어 탐심을 일으켜서, 계명이 우리 생명을 보호하고자 먹지 말라 하나, 율법은 딴 길로 못 가게 막을 뿐, 생명을 주지 못함, 율법이 우리 육신(자기 주장)을 자극해서, 도리어 계명을 어기게 하여, 죄를 만들어, 생명을 보호함이 아닌, 정죄의 역할을 하게 함, 롬7장 마지막 절- 오호라! 탄식.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 아들을 보내사, 속죄 제사로 아들 몸으로 정죄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
바울이 율법을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가르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인가? 자기들만 언약 백성으로 담장 치움에 대한 것이 아닌, 율법 자체의 문제성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고전15장55-56절을, 롬7장을 무시하고,
율법에 의한 삶과 성령에 의한 삶 갈5장, 롬8장, 육신에 의한 삶과 율법과 육신을 한 묶음 삼아, 육신의 열매, 성령에 의한 삶- 빌1장에는 의의 열매로, 성령의 열매로,
새 관점에 마샬이 문제 제기, - 바울의 복음을 요약하는데, 누가는 바울 신학을 속죄 신학과 칭의 신학을 부각 시킴없이 약화되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칭의론을 언급함,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유산을 새롭게 바울 이름으로 해석한 것으로 봄(1세기 말 정황에 따라), 이때에 바울의 칭의론 해석이 나옴- 옛 관점인가 새관점에 의한 해석이었는가? 엡, 딛, 딤, 직접 배운 제자들이 바울을 이해한 자들과 19세기 지난 던이나 라이트가 잘 이해했겠나? 옛 관점식으로 해석했음.
5. 새 관점에 대한 비판
a) 바울 해석에 대한 비판(유대교회에 대한 전제 비판)
- 바울의 율법/ 유대교에 대한 태도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네 가지 견해들이 다 설득력없다.
- 주종을 이루는 Dunn과 Wright의 견해에서, 그들의 '율법의 행위'와 '나의/ 그들의 의'라는 바울의 숙어들에 대한 해석의 오류
- Dunn이 지목한 자신의 이론을 위한 두 'test cases';바울의 회심/소명과 갈3:10-14d이 해석의 오류(김세윤, 바울 신학과 새 관점 제1장과 제4장 참조)
- 바울이 율법을 죄, 육신, 죽음과 더불어 역사하는, 인간을 속박하는 악한 세력들의 일부로 보는 관점(예 롬7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바울이 율법과 육신을 어떻게 한 묶음으로 하여 성령과 대조하는 가를 무시함
- Gundry, Snodgras, Westerholm, Stuhlmacher, 등
- I.H.Marshall: 엡2:8-10, 딤후1:9, 딛3:4-7, 행13:39, 15:10-11의 증거
-
3.26.2009
기독교 신학의 역사, 성경 신학의 역사가 종교 개혁 이래로 역사적 예수의 탐구의 중요성에 버금가는 20세기 말의 바울 신학의 새관점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새관점에서의 칭의론, 기원과 의미를 재 해석했는가? 신약 유대교의 재해석에 비추어 바울의 칭의론 범주를 해석한 바를 고찰하였고, 새관점의 공통 주장과 격론과 반론이 대두되었다.
바울 신학에 대한 해석이 새관점 학파가 옳은 지, 언약적 율법 해석이 옳은지, 두 주제가 제기 되었다. 제임스 던이 자신의 새 관점이론을 뒷받침 하고자 내세운 본문 실례, 회심과 이방인 사도의 소명, 갈3:10-14, 새 관점 학파의 두 개념들, 율법의 행위들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에, 사회학적, 선교학적으로 축소하여 해석함이 적합한가? 지적했다.
하나님의 의와 대조적으로, 빌3장의 나의 의, 롬10장의 그들의 의는 개인의 의가 아닌 민복적 의로 해석하는 바가 옳은가? 살펴보았다. 율법을 이스라엘 성별을 보장하는 울타리로 민족적, 이스라엘 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종말에 구원을 보장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담장으로 오해함으로, 이방인의 하나님 백성 됨을 막는 담장에 대하여 바울이 반대한 것이라는 논지를 살펴보았다.
육신을 충동하여 죄를 지어 죄의 삯, 사망, 아담적 타락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힘으로 율법의 역할을 지적함으로, 죄라는 벌침과 죄의 독성은 율법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원래 보호하도록 주신 바가, 계명이 육신을 자극하여 탐심을 도발하여, 자기 주장하게 하여, 스스로 자존할 수 있다는 아담적 삶의 방식을 택하게 함으로, 율법은 정죄하는 기능을 주는 몽학선생 노릇을 함이 되기에, 독생자를 보내사 율법으로부터 속량하게 하셔서, 초월자의 영광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으로 새 관점자들이 설명하였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토론, 인간의 아담적 실존에 대한 토론이 수박 겉핥기 식이 되었다는 것, 살전에는 칭의론이 없다하나, 살전1:9-10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요약, 하나님의 아들을 다림에 하나님의 진노함에서 구출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예정함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을 받도록 했는데, 속죄 제사로 말미암아, 최후 심판에서 구속함을 받도록 예정 받았다. 갈4장- 윤리적, 하나님이 악행자들을 복수 하신다는, 에크디코스, 최후의 심판은 즉 죄인들에게 의를 세우고자, 의를 저버린 자를 정죄한다는 것, 바울이 법정적 범주로 선포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진노와 속죄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성령, 겔 36, 37장을 반영하여, 종말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성취하게 하신다는 것을 롬8장에서 바울은 전개하고 있다.
율법과 육신은 한 묶음, 고전15장, 율법을 죽음 각오하던 열성 신학자가, 옛 아담적 육신의 열매를 맺음을 진술, 갈5:19이고, 대치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을 새 아담적 삶,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정당한 요구들 롬8:4, 의로운 요구들, 빌1:10- 의의 열매, 갈5:22-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는 칭의론의 구조적 문제임,살전4:8절에 함축되어 있음,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의 논쟁 상황에서 이방 선교 촉진을 위한 교리가 칭의론이 아니라는 결론, -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 후기 바울 학파가 칭의론을 새 관점이 아닌 옛 관점 학파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이 증거가 된다.
b) 유대교에 대한 전제 비판(새 관점에 대한 비판)
이와 같이 새 관점 학파의 바울 신학 해석이 실패하므로, 그들의 전제인 Sanders의 유대교 이해를 새로 검토하여 보아야 함:
첫째, 새 관점의 바울 해석이 적절치 못하고, 둘째로 유대교 해석이 과연 무었이냐? 하는 샌더스의 전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M.A.Seifrid는, 샌더스가 유대교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언약함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의 구원 관계 속으로, 진입했다, 율법을 지킴은 올바른 관계에 머무르기 위하여 요구되나, 율법을 다 못지키고 죄 짓는다, 그러나 장치, 속죄 제사라는 과정으로 속죄를 이루어 신의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은 올바른 관계를 이어가기에 의롭다는 것, 언약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 아니면,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는 샌더스의 주장이 적절한가?
신약 초기의 부흥운동이 하시딤 운동의 여파로 일어났는데, 각 파의 견해에 의하면, 타 파의 노선이 적절치 않은 것으로 봄, 쿰란의 에센파가 사두개 파를 보기를, 언약 관계에 서있지 않다고 보았다. 민족적 의에 참여하여 구원 받음이 아니라 율법 준수로 라는 것, 그러나 머무름에 있어서, 율법 준수는 공로 신학 요소가 깊이 나타나서, 신인 협동설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봄이 적절하다는 제시를 하고있다.(샌더스의 전제가 맞기는 하나, 약간 고쳐야 한다는 것)
마크- 구약 선지서부터 남은 자, 의인들- 지혜 문서에서,의 개념, 다수의 패역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언약에 신실한 자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자, 의인들이라는 것, 의의 본질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마카비서- 다니엘7장에, 안티옥4세의 유대인들을 헬라화 함에 대하여, 강제로 돼지고기 먹이고, 동네마다 제우스 신전 만들고, 제사케 함에, 지극히 높은 성도들만이 남아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 차별화에 따른- 하시딤- 하나님 언약에 신실한자, 바리새 운동, 에센파 운동- 율법에 신실함에 준거한 공로주의,
F.Avemarie,-독일인- 랍비문서에 의하면, 랍비 문서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언약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을 병행하여, 율법을 준수하여 구원받음, 논리적 긴장 해소 없이 랍비들이 다 강조한다는 것, 공적과 어김을 저울에 단다는 랍비문서, 샌더스는 중요시하지 않음, 두개의 구원론,- 은혜에 의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다 내포하는,
Laato; Eskola; A. Das, etc.; "(covenant) NOMISM"과 신인 협동설(Synergism)- 핀란드인,
A. Das,-인도인, 더 깊은 연구에서, 유대교를 샌더스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우선하고, 언약 관계성에 머무는 지탱, 이는 적절한 말이나, 샌더스는 자신의 유대교 해석에 근거하여 언약 관계성에 머뭄을 더 강조해야 한다는 것, 신인협동론적 구원론으로 보아야 함
S.Gathercole, Where is Boasting?(김세윤, 바울신학과 새 관점, 1장, 4장)
-비교: 공관복음서들의 증언: 눅18:9-14(바리세인과 새리); 15:10-35(탕자)
- 종말의 심판이 가까워,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이 강조되던 때에 바울이 렘9장을 근거하여, 주 안에서가 아닌, 주를 자랑하라는 것, 주가 우리 구원자이라는 것을, 고전에도 인용함.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바울이 유대 신학자 였으니, 이 사람이 반영하는 유대교, 종교사적 관점에서, 바울 서신이 1세기의 원 자료가 될 수 있으니, 랍비문서는 주후 2-4세기가 됨, 쿰란 문서 못지 않게, 신약 성경 자체가 원 자료로 중요하니, 바울의 유대교 자료는 비평적으로 진술한 것을 가만하여 보면, 그래도 바울은 갈3:10-13에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탕자 이야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눅15장-탕자는 아담이야기를 든 것이라는 것, 아담적 인간의 실존이 그러한데,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고 있고, 신적 풍요에 들어가는 고로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잔치를 베푸는 구원, 아담적 이스라엘 모습을 맞아들로, 자기 공로로 반대급부로 구원받는듯, 샌더스의 논지에 따르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사나, 그 관계는 율법 공로, 반대 급부 관계에 놓여 있다는 김세윤 교수의 논지.
칭의론에 피상적인 새 관점, 유대교에 대한 해석 역시 좀더-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것은 맞으나, 그대로라면 공로를 주장함이요, 그 속에서 율법주의 행위의 공로를 적절히 지적못함이 잘못.
7. 새 관점에 대한 평가- 문제점들과 공헌
a)문제점들
-앞서 살펴본 대로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비판을 설명하는 새 관점 학파의 네 방법들과 그 학파의 다섯가지 공통점들 모두 수용하기 어려움, 그러므로 그 학파의 기본적인 전제인 유대교에 대한 이해가 조정되어야 함
-바울의 칭의론의 축소주의- 바울 복음의 왜곡
(4가지 주장과 5가지 공통점 모두 수용하기 어렵고, 조정되어야 한다.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해석이 왜곡을 가져오고, 사회학, 선교학적 좁은 이해는 문제, 단지 죄 문제를 롬10장의 신학적 깊은 고민에는 이르지도 못함으로 왜곡이 이루어졌다.)
b)공헌
- 신약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 '언약적 율법주의'의 원칙 속에서 개인적 율법-공로주의 강조
- 더 나아가서 새 관점 학파는 우리들을 도와서
- aa)칭의론이 명백히 전개되는 역사적/사회학적/선교적 맥락을 더 잘 이해하게 함: 이방선교
- bb)칭의론의 언약적 구조와 공동체적 평면(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해 증진.
- Cc) 바울의 칭의론이 'Covenantal nomism'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게 함
(M.D.Hooker). 그러나 바울의 은혜론과 성령론에 의하여 이 구조가 유대교의 구조와 다르게 나타남: 성령과 육신/ 율법 대조. 구원의 '벌써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성령(은혜)에 의한 '진입'과 '머무름'
- Dd) 바울 속에 있는 두 개의 법적, 신비론적 구원론 시스템 사이의 일치를 더 잘 이해하게 됨
- Ee) 칭의와 윤리 사이의 일치를 더 잘 이해하게 됨
공헌은 신약 유대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가져왔다. 원칙은 맞으나, 개인적 공로주의가 있었다는 것, 언약적 은혜에 대한 공로, 유대교에 대하여 보다 섬세히 옳게 이해하게 하여고, 칭의론이 전개되는 역사적 선교적 사회학적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명백한 formulation.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한, 진노로 부터의 구속, 반대 개념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의인으로 불의한 자로 판정 받음,- 바울 칭의론의 기본 개념이 됨
살전에서 진술됨, 그러나 율법 용어가 아닌, 살전4:8 대신 성령과 은혜로, 칭의론이 갈라디아 논쟁 이전에 이미 칭의론을 엿볼 수 있다는 김세윤 교수 논지, 이런 복음 선포를 바울이 하엿는데, 거짓 선생이 갈라디아에 와 요구하는 규례에 대하여, 칭의론의 명백한 구도는 이방 선교의 장에서 드러났다.
갈라디아와 안디옥에서 유대 그리스도인에 따라 생각하게 되고, 칭의론을 사회 선교학적으로 생각함은 문제이나, 지난날의 이해, 공동체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무죄 선언과 종말의 확인이 형법 법정주의적으로 이해된 잘못도 분명히 있음, 사회 문화학적 상황에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으로 의인되고, 성적 구분, 이방인 유대인 차별없고, 사회적 신분 구분 없음을 사회적 선교적 함의에 크게 집중하지 않았다.
1970년에 노르웨이 학자가 칭의론의 사회론적 함의을 논하였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 구원 받음이란 칭의론 적 관점이, 사회적 선교적 해방으로 보았다. 그나 새 관점 지지자들이 이 것이 칭의론 전부로 봄이 문제이지, 중요 사항으로 봄은 공헌임.
셋째로, 갈3:2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질서, 옛 창조의 전형적 구분이 무용, 다 하나라는 것, 고전7장에 부부 상호주의적 동등성 원칙을 주장함. 유교 가부장적 사고를 제하여야함, 남편이 제사장? 사회 신분적 차별은 안됨, 복음 제대로 전파하면 바른 질서가 세워진다는 것, 여성 해방과 노예 해방,
칭의론에서 알게 된바, 바울의 칭의론 자체가 언약적 율법주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왜냐하면, 신약은 종말론에 이미와 아직 아님의 구조 속에서 나오기에,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 오심으로 출범하였고, 부활 하심으로, 그러나 이세상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여 죄와 죽음으로 지배하는데, 사망 권세로 죄를 빌미로, 용병에게 주는 쌀알- 품삯, 탕자의 비유로 아담적 실존을 의와 생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서 오는 세상의 생명, 영생, 헬라어로 오는 세상이 형용사적으로 영원한, 즉 신적 생명,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함, 하나님의 상속자 됨, 롬8:29절, 하나님과 같이 됨,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함, 하나님의 상속자 됨, 예수 재림 때에 완성이 된다?( 완성이 보다 명확히 드러남 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 의인 됨을 의미함, 무죄 선언 의인으로 칭함 이상의 관계론적 개념임,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덕 입어서 영광에 참여하는 관계,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음- 옮겼느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덕입어 사는 관계에 지금 있고,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으나, 사단의 주권에 노출되어, 돈 벌도록 이웃 착취하고, 자연 파괴하고, 이윤 극대화 추구, 하나님의 통치가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옮,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 함으로 옮, 일용할 양식, 이웃을 사랑, 그 통치를 받을 때에 의를 행함으로 의가 평강을 이룸, 이웃과의 갈등이 해소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의 제품으로 정당한 대가는 받으나 이웃을 이롭게 함을 이루어야 함,
롬12:1-2 세상을 본 받지 말고, 롬1-8장, 그러므로, 마음이 새롭게 함 받아, 하나님 통치를 분변하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 의인 되었으니, 하나님의 의의 통치를 받아 생명을 누리고, 생명을 확대하라는 것 롬12-15장의 윤리의 대명제가 바울의 칭의론임,
바울의 칭의론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관계 이상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음, 한번 구원받음으로가 아닌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성화의 관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 구원을 받아간다.
바울의 칭의론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칭의론과 윤리의 관계를 보다 잘 알게 되었음, 한국 개신교에서 칭의 개념을 잘못 선포함으로 싸구려 구원이 된 상황, 징벌 받은 것은 분명하나, 의인으로 선포 됨 분명하나, 수반하는 윤리 의무가 상실되는, 의의 열매 빌1:10,
인구의 1/4 이상이 교회에 앉아서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 세상의 빛이라는 설교를 들으나, 의의 열매, 윤리가 맺어지지 못하고 있음,
차이는 둘, 은혜성 강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강조와 어찌 서 있는가? 이것 역시 성령의 은혜에 의함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종말론적 임재하심- 성령, 그리스도의 사활로 성령이 그의 교회에 부어짐, 누가 신학에서 40일, 요20장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을 내쉬어서 성령을 주심,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집행하는 ? 요한 복음적 오순절, 바울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령 임하심이 놀라운 초대 교회의 체험임, 사도행전 전반부의 누가 신학,
롬8갈, 갈5장이 의인된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에 의한 깨우침과 조명과 강권의 은혜로 의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 요13-16장-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대치하는 보혜사로서 주의 계시를 깨닿게, 순종하게하는, 성령은 모세의 율법이 아닌 고전9:20, 갈6:2-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도록,
그리스도의 법은 크게 종교사적, 구도를 새 관점과 같이하나, 그리스도 사건과 지금 현재의 성령 인도에 따라, 자기 노력에 의한 육신적 노력-롬7장 대신, 성령의 노력-롬8, 갈5장 으로,
그러나 바울의 은혜론 십자가 과 성령론에 의하여 다르게 드러난다. 성령의 은혜에 의한 진입과 머무름이 강조됨이 차이이다. 칭의론에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8. 새로운 해결책의 모색
최근 주창자들과 반대자들간의 상호접근
반대자들의 이해: 7 b. aa) bb) cc)
주창자들의 반성: 예, 특히 F.Watson
30여년간 새 관점 주창자의 주장으로 인하여, 과도한 종교 개혁적 관점에 냉소적이었으나, 10여년간 양쪽에서 서로의 반성이 일어나, 주창자와 반대자의 접근에 따라, 과거에 경시됨에 대한 공헌을 인정과 수용을 하게 되었고, 반면에 주창자들 역시 반성하였다. 프란시스 왓슨(F.Watson), - 원래 과격한 주장자가 2008년 제임스 던 출판,(2005년 튀빙겐 개정판) 새 과정 전개 수정본, J.D.G.Dunn의 최근책, The New Perspective on Paul (revised ed.; Grand Rapids: Eerdmans, 2008), Ch.1 (pp.1-97)
비판자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오해'를 불러 일으킨 과거의 주장들(적어도 그들의 일방성)을 많이 교정 하면서, 자신의 새 관점이 옛 관점의 요점들을 경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두 관점들의 화해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새 관점을 재 천명하되, 옛 관점의 주창자들이 대체로 놓친, 그러나 새 관점이 회복한 칭의론의 사회적 선교적 평면을 강조한다. 즉, 처음 97 쪽을 정황 소개함, 자기 반성을 많이 함, 그러나 옳다 함, 비판자들의 토론으로 오해 여지 있는 것에 일방적인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
다메섹 도상의 체험 내용이 복음의 계시 였는가 혹은 사49:8, 42장, 소명의 체험이었는가? 하나만을 지지하던 제임스 던, 갈1:8 복음이 계시이고, 이방의 사도라 분명히 언급하였는데, 초점은 복음의 계시 이며, 열방의 계시 전달자이지, 하나가 아님.
칭의론적 법정적 의를 거의 무시하였으나, 이제는 칭의론 재 발견에 대한 배반이 아닌, 경시함은 아니라는 것(던의 주장), 갈라디아서와 안디옥 논쟁이 칭의론 시발점이라면, 근 16여년 간 어떻게 율법에 관한 문제점을 정리 않고 복음을 증거하러 갔는가!(김세윤의 반론).
두 관점의 화해와 함께, 옛 관점 주장자들이 예일대 n.a. 달? 신학자가 1960년대에 이미 사회적 칭의론이 있음을 밝힘, 루터 신학자들은 불트만의 철저한 계승자 였음, 불트만의 칭의론 해석을 인간론적으로 풀기도 했고, 칭의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하나님 노릇 해주심이라는 것이라 지적함, 곧 주권의 전이, 지금까지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 하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의의 통치 영역으로, 주 예수의 통치 시110:1로, 고대 근동의 궁정 의식에서 국무총리가 국정을 맞는, 아들이라는 의미는 상속자라는 의미임, 대행, 그리스도가 그런 의미에서 주(큐리오스)가 되었음, 예수님이 대행하는 하나님 나라로 보아야 한다는, 인간론적이 아닌 골1:13 흑암의 권세에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칭의와 주권, 그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는 기독론 적으로 보아야,
라이트는 2006년에 바울을 새로운 관점, 더 새로운 관점,
N.T.Wright, Paul: In Fresh Perspective (Minneapolis:Fortress, 2006)
-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에서 죄 용서와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함의 평면들을 무시함(36쪽).
- 옛 관점은 칭의론의 교회론적, 선교적 평면들을 무시함
- 그러므로 이 두 관점들이 엡2장에서와 같이 통합되어야 함(116-122쪽)
- Wright의 이 주장은 원칙적으로 옳으나, 그는 아직도 칭의론의 교회론족/ 선교적 평면들(엡1, 2:11-21)을 그 교리의 기원이나 의미에 있어, 더 우선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무죄선언/회복 평면(엡2:1-10)은 전자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어서, 그의 '신선한 관점'은 약간 화창한 '새 관점'에 불과하다.
- 올바른 통합: 엡 2장의 순서대로: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의인 됨의 복음은 필연적으로 이방선교를 촉구하게 하며,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통합시킨다. 그러므로 은혜/ 믿음으
로의 칭의라는 보편적 원칙이 우선함을 인정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가족으로의 진입은 그 교리의 구원사적/ 선교적/ 교회론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 Wright의 Paul: In Fresh Perspective에 대한 나의(김세윤) 서평 참조: RBL 06/2006)이라는 책에서 새 관점은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한 새 관점의 잘못을 지적하고, 반면에 옛 관점은 칭의론의 교회론적 선교론적 관점을 무시했기에 엡2장에 언급한대로 통합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미 성서학회에서 서평한 바 2006년 6월 자에 김세윤의 서평, 옳으나, 라이트는 아직도 칭의론을 교회론적 평면 엡2:11-27은 무시하고, 엡2:1-10까지는 파생된 것으로 보나, 이는 옳지 않다. 개인적 죄 용서와 하나님의 회복, 그 결과로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십자가의 속죄로 하나님과의 장벽을 종적으로, 없애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함이 적절하다. 에베소서 2장 순서로 함이 적절하다는 것. 갈3:28- 믿음으로만 회복되면 더 이상 차별이 없는 것임, 바울이 오네시모를 로마법에 따라 주인에게 보내나 형제로 대하라는 것, 노예 해방하라는 직언을 우회적으로 한 것, 빌레몬의 아름다운 사회적 적용, 칭의론은 필연적으로 사회론적, 칭의론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신분, 성별 차별이 사라졌다. 믿는 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편입하여, 구원사적, 선교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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