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취업준비에 나선 대학생 김현진(27)씨는 영어 전공자다. 그는 4.0이 넘는 학점과 900점에 가까운 토익점수를 가지고 있다. 거기다 은행에서의 인턴경험도 가지고 있고 경영학까지 복수전공하고 있다. 남들 못지않은 스펙이라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받을 만도 하건만, 김씨는 "제 친구는 스펙이 더 빵빵한데 취업이 안 돼요"라면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최근 한 거대 유통업체에 지원했지만 실패를 맛보았다. 스펙이 비교적 높아 서류전형은 통과했지만, 이후 이어진 실무와 면접 등의 2차 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다. 김씨에겐 이와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기에, 한숨만 늘어간다.
나름의 이유를 고민해 본 김씨는 "방법이 잘못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쌓고 보자'며 맹목적으로 몰두했던 스펙 쌓기가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동시에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주변 친구들을 볼 때면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취업이 힘드니, 정확한 자기분석 없이 일단 성과를 드러내기 위해 스펙 쌓기에 골몰한다는 것이고, 그게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김씨는 "무조건 스펙만 쌓는 것보다는 자기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하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다른 것을 고치는 것보다 스펙 쌓는 게 더 쉬운 거라고 생각한다"고 아쉬워했다.
쌓아도 쌓아도 불안? 탄탈로스의 '스펙'
이렇게 김씨처럼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가지고 있음에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를 '스펙푸어'라고 부른다. 워킹푸어(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사람)나 하우스푸어(집이 있으나 가난한 사람)와 같은 이른바 신종 '푸어'족이다. 취업을 하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막상 취업시장의 평가는 냉혹하니 스펙푸어들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리스 신화엔 탄탈로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신의 노여움을 산 탄탈로스는 물속에 서있지만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야한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물에게 다가가면, 물은 그에게서 멀찌감치 달아난다. 취업 준비생에게 쌓아도 쌓아도 불안한 스펙은 마치 탄탈로스의 갈증과도 같은 답답함이다.
'혹시 본인도 스펙푸어라고 생각해요?'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대답이 왔다. '아뇨, 전 그냥 푸어'. 스펙이라고 내세울 것도 없다는 절규의 메아리가 이어졌다. 후배는 "제대 이후에는 항상 쫓기듯이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를 요즘 필요하다는 자격증을 수집하고 어학시험의 점수를 쌓고 있다.
오는 6일에는 컴퓨터활용능력시험을 친다. 그는 이미 국제공인 컴퓨터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개로는 불안하니 이것 말고도 한 개 쯤은 더 따놓을까 생각중이란다. 영어 뿐 아니라 일본어 1급 시험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소가 밭을 갈 듯 묵묵하게 스펙이란 밭을 갈고 있다. 영롱한 취업이란 과실이 언젠가는 그 단맛을 보여주리라는 믿음의 쟁기질. 하지만 아직까지 그 믿음은 대답이 없다.
토익 900점 학생들이 만점위해 학원 가는, 대한민국
"원래는 어려운 말 아녔던가? 그 스펙이란 말..."
학생식당의 2500원짜리 참치비빔밥을 앞에 두고 친구가 물었다. 하긴 'Specification'은 너무 길다. 2004년 수록된 국립국어원 신어자료집에서는 스펙을 '취업을 위한 학력, 학점, 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 정도로 간략하게 정의했다.
하지만 그 몇 단어로 정의하기에 이 나라 20대에게 스펙은 전부이자 필수이자 현재이자 미래이자 인생, 그 자체다. 막상 외국인이 다가오면, 속으로 깜짝 놀라며 굵은 침부터 꿀꺽 삼키는 토익 900점들이 만점을 위해 어학원의 불을 새벽까지 환하게 밝힌다. '남이 갖고 있는 건 기본으로 가지되 남보다 특출하게 할 수 있어야 해볼 만하다'는 인식은 지방대 학생들에게는 더 심하다.
지역 사범대학을 졸업한 친구 '강'은 요즘 기간제교사로 일하고 있다. 강은 임용고시에 몇 차례 도전했지만 그 만큼의 좌절을 맛보고 이젠 기간제교사로서나마 지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강에게 "교사로서의 네 스펙은 충분하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다. "아니! 그러니깐 이러고 있지."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물어본 내가 다 미안했다. 하지만 기간제교사로서의 스펙은 갖춘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이 말한 스펙이란 것은 '경력'이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누구나 경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물으니 "당연하지, 그래서 처음엔 기간제교사 자리 구하기도 힘들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가산점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을 땄지만, 너도 나도 가지고 있어 가산점이 아니라 필수가 돼버렸다. 마치 토익 800을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인 마냥 쉽게 부르는 것처럼….
봉사활동도 필수 스펙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고아원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했던 강은 '봉사활동도 스펙인가?'라는 물음에 대답 대신 어느 잡지에서 가져온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줬다. 그곳에 적혀 있는 질문은 '직접 취업을 하고보니, 스펙을 급조하기 위해 했던 활동이 취업에 도움을 주는가?'였다. 이 질문에 절반인 50.9%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더구나 봉사활동은 단기간에 급조 할 수 있는 스펙 중 두 번째로 꼽혔다. 첫 번째는 자격증이었다. 세 번째는 헌혈. 이쯤 되면 헌혈이 아니라 매혈이다.
높아지는 스펙인플레이션... 이유는 "남들도 하니깐"
윤현석(28)씨는 한 지방대학 경영학과를 나왔다. 유통관리사, 정보처리기사 등 관련된 자격증도 몇 개나 있고 토익 점수도 보통 이상은 된다고 자부한다. 몇 번의 이직을 했고 최근에 찾은 직장에 한 달째 출근 중이다.
윤씨는 "힘들게 만들어놓은 스펙이 막상 입사 후에는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한다는 이유에서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여럿 가지고 있는 윤씨지만 다시 컴퓨터 학원을 다녀야하나 고민하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나경(27)씨는 "막상 입사하면 회사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몇 달을 투자해 컴퓨터 자격증을 땄지만, 입사하고 보니 관련 프로그램을 다룰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김씨가 자격증을 딴 이유와 지금 기를 쓰고 자격증을 준비하는 이들이 말하는 이유는 같았다. "남들도 하니깐."
얼마 전 일본에서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구는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직장도 잠시 다녔다. "일본도 한국처럼 스펙 쌓는 것에 몰두해?"라는 질문에 친구는 "한국만큼 스펙 쌓는 것이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일본 경기가 예전만큼 호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과당경쟁까지는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이어 "한국은 줄 세우기를 참 좋아하잖아, 사실 스펙만큼 데이터화하기 쉬운 게 없지 않아?"라고 반문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에 학교 게시판에 붙은 한 취업사이트의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취업 전 키스 금지!' 입술을 들이미는 남자를 두 손으로 거세게 밀어내고 있는 여자. 취업 전엔 입술을 허락할 수 없다는 여자의 표정에서 완고함이 느껴졌다. 취업을 못한 청춘에겐 사랑도 어느덧 사치가 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스펙푸어들에게는 더 추운 계절이 될 것 같다.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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