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전도사’ ‘용병 소방대장’ ‘야생마(재벌) 조련사’….

이헌재(67)란 이름에 붙는 수식어다. 경제 관료로선 아주 많은 편이다. 그만큼 유명세를 치렀다는 얘기다. 그는 스스로를 “약간 개혁 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라고 말한다. 시장주의자요, 성장을 중시하는 친기업 성향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경제 정책 총수로 활약한 건 DJ·노무현 정권 때다. 운명은 그를 취향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끈 셈이다. 그만큼 갈등과 사연도 깊고 많았을 터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다물어왔다. 그는 평소 공직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일정기간 침묵하는 ‘묵언(默言)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기간은 한 정권이 지날 정도가 적당하다고 봤다. 그런 그가 비로소 중앙일보를 통해 입을 열었다. 외환위기 후 14년 만이다. “이제야 묵언 기간이 끝났다”며.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14년 전 외환위기 때 금융·기업 체질을 확 바꿨습니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위기가 재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개혁은 잘됐어요. 그러나 위기 극복 이후 프로그램이 없었지. 이 나라의 경제 모델 중 성공한 거라곤 박정희 모델 하나밖에 없어. 역대 정권이 죄다 그걸 따라 했지. 그러나 60년대 체제, 박정희 흉내론 나라 경제를 제대로 일굴 수 없어. 세계는 복잡해졌고 금융·기업·외환은 동시다발적이 됐지. 달라진 세상, 새로운 경제에 맞는 새 모델이 나와야 해요.”

-군사정권은 몰라도 DJ·노무현 정권까지 ‘박정희 흉내’를 냈단 말인가요.

“박정희 흉내 내기의 원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야. 노태우 정권도 똑같이 하다가 북방 외교 하나 더했지. 김영삼 정권도 마찬가지. 개방이란 개념을 추가하긴 했지만 관리는 못했어요. DJ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합리적·이념적 어젠다로 세팅하는 데 성공했지. 이념은 진보했지만, 방식은 박정희식 60년대 체제를 답습했어. 노무현은 서두르고 미숙했지. 그 바람에 주저앉은 거야. MB는 콘텐트와 방식까지 ‘박정희 따라하기’야.”

-박정희 모델이 뭐가 나쁩니까.

“개발 독재의 특징은 선택과 집중이야. 삼성·현대 밀어줘 대표선수로 키웠지. 그것도 밀실에서. 에너지·자원·시간 낭비는 줄였지만 부작용이 왔어. 닫힌 사회가 된 거야. 사회는 닫히면 썩지. 요즘 젊은이들 불만도 그런 것 아닌가. 닫힌 취업, 닫힌 공부, 닫힌 인생…. 빨리 열린 사회로 바뀌어야 해요.”

-‘준비된 대통령’ DJ도 박정희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깁니까.

“DJ는 가장 준비를 많이 한 대통령임이 틀림없어. 집권 초·중반까지는 아주 잘했지. 효율적·대승적·통합적 정치를 했어. 그러나 집권 후반기엔 치열함이 떨어졌지. 특히 용인(用人)에 힘들어했어. 워낙 청탁이 많고 봐줘야 할 사람이 많았다고 해. 설송 스님의 전언에 따르면 2000년 청와대에서 독대한 DJ가 ‘딴 정책은 어떻게든 되는데 사람 (써달라는) 요청은 물리치기 정말 어렵더라’고 털어놓았다고 해. 그 말을 할 때의 DJ 표정이 어찌나 처연하고 애틋하던지 듣던 설송 스님은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하더군.”

-설송 스님이 누굽니까.

“경북 봉화 현불사의 큰스님이야. DJ의 대통령 당선을 예언했지. DJ는 물론 측근들과 두루 친했어. 재작년 입적했지. 나와도 야인 시절부터 오랜 인연이 있었어요.”

그는 정책 구상이 취미인 사람이다. 경제나 위기를 보는 시선도 남다르다. 현 정부에 대한 고언(苦言)도 직설화법으로 던졌다. 그는 “최근 2년 새 한국 금융은 10년 후퇴했어. 신한금융·저축은행 사태에서부터 우리금융·산은지주 문제까지, 다시 따라잡기 불가능할 정도야”라고 말했다.

-MB 경제·금융 정책이 그렇게 잘못 처방됐나요.

“4대 강이 대표적이지. 올해부터 당장 수질관리 비용이 문제될 거요. 재정 적자도 해법이 없어 보이고. MB는 균형 재정 이루고 싶어하지만 대안이 잘 없어. 재정 잘 모르는 장관, 잘못된 인사를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가고 있거든. 이 정부의 전반적 무력함이 다 여기서 비롯됐어요.”

그가 ‘묵언’의 금제를 깨기로 한 건 올 3월 초. 막 유럽 재정위기가 커져갈 때였다. 그는 “만사유전이라더니, 또 심상찮은 조짐이 느껴졌다”며 “외환위기 극복의 기록을 하루빨리 남겨야겠다”고 말했다.

-기록을 왜 합니까. 혹 다음 정권에 한 자리 노리시기라도 하는 겁니까.

“우선 개인적 정리가 필요할 때가 됐어요. 국가 경제로 봐도 타이밍이 맞는 것 같고. 이제는 위기가 일상화하는 ‘뉴노멀’의 시대야. 경험이 있으면서도 공유하지 않아 (국가가) 실수를 되풀이해선 곤란하잖아.”

-외환위기 후 14년이 지났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는 게 지금 적절합니까

“요즘 유럽이 많이 어려워. 어디서 본 듯한 장면도 많이 나오지. 그런데 우리가 겪었던 것과 좀 달라. 예컨대 그리스를 보면서 사람들이 물어요.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했나’ ‘그리스가 우리랑 다른 게 뭔가’. 그리스는 우선 수출 산업이 별게 없어요. ‘배째라’로 나오면 돈 빌려준 이들만 괴로워. 돌이켜보면 우리도 모라토리엄을 각오했어야 했어. 당시 그런 주장도 하고, 계산도 해봤지. 우리도 견딜 만했어. 그러나 DJ 정부는 ‘금리 불문, 어떻게든 갚는다’ 쪽으로 외채협상 가닥을 잡았지. 복기해보면 아쉬운 부분이야.”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은 겁니까.

“경제 관료, 국정 책임자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경제는 생물이자 역사야. 돌고 돌지. 경제정책도 그래. 다 생장의 과정을 겪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책은 없어. ‘과거에서 배워 미래를 살찌운다’가 정답이야. 이런 걸 얘기하고, 알려주고 싶어요.”

-갑자기 든 생각입니까.


이정재 경제부장
“나와 우리 세대는 복 받은 세대야. 단군 이래 최대 수혜자들이지. 하루가 지날수록 더 부유해졌어. 최악의 빈곤에서 시작해 기적의 ‘코리안 드림’까지 맛본 거야. (뭐 물론 약간의 반론은 있겠지만)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세대였어. 아메리칸 드림 저리 가라지. 그런데 우리 다음 세대는 아니야. 우리보다 불행해. 일할 기회조차 잡기 어려워요. 고용 없는 성장 때문이지. 대기업들이 글로벌화하면서 글로벌 인재를 쓰다 보니 되레 국내 고용은 줄어든 거야. 국제 경쟁력 높이자고 한 구조조정이 우리 다음 세대 일자리를 없앤 셈이지. 어쩌면 우리 누린 세대 모두가 빚쟁이인 셈이지. 그 빚을 갚고 싶어요.”

-어떻게 갚나요.

“해법을 제공해야겠지. 지금 세대, 다음 세대가 잘살고 나라가 부유·부강해질 해법.”

- 그런 게 있나요.

“찾아야지, 지금부터. 없으면 만들어 나가야지. 우리 국민은 물꼬만 터주면 알아서 잘 헤쳐나가요. 미래를 위한 물꼬가 필요한 시점이야. 내 경험이 그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


이정재 경제부장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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