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사실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의 기초는 바로 이 구원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구원론이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또 현실이기도 한 것 같다.. 이 구원론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본다.

 

I. 현재, 과거, 미래의 관점에서 본 구원

 

1. 구원의 미래적, 궁극적 접근: Glorification

구원받은 우리의 최종적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구원론은 여기에서부터 접근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화된 것을 우리의 최종적인 모습으로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된 모습이 우리의 최종의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완벽한 아담의 모습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회복해야 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이 땅에 창조하셨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그 모습은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해서 우리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모습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다시 나타나게 된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인해서 우리는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완벽하게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Glorification(영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모습은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고, 이 땅에 궁극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을 때 우리가 입게 될 형상으로 이해를 한다.

 

2. 구원의 과거적 접근: Justification

Justification(칭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장 대중적인 구원의 성격이다.. 문제는 이 Justification이 구원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Justification은 법정적인 구원의 법정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정의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들어온 죄악의 영향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문제는 죄악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죄인들인 것이다..

Justification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죽음을 넘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사건을 이야기 한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사해서 우리가 다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Justification은 그 특성상 반복해서 일어나는 이벤트가 아니다. 이 이벤트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또 주인으로 인정하는 그 순간.. 단 한 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따라서 Justification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다수의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Justification은 과거적 접근으로 정의를 했다..

문제는 구원은 Justification 만으로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구원의 현재적 접근: Sanctification

Justification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됨을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는 사건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을 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우리의 최종적인 모습은 창조시 아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죄성이 가득한 우리의 모습에서 아담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부분을 Sanctification, 즉 성화라고 부른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구원을 Justification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서 Sanctification의 모습이 상당히 약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Sanctification도 우리가 구원을 받게되는 Process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Sanctification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바로 이 Sanctification을 이루기 위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며, 따라서 Sanctification은 우리의 영적전쟁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논의들이 몇 있다.. 구원을 이야기 할 때에 죽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그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해는 구원을 Justification으로만 한정시켜서 이해를 하는 것인데 .. 구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또 한 가지는 평소에는 편안하게 살다가 문제가 생길 때에만 기도를 하는 신앙의 패턴이다.. 이러한 신앙의 패턴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패턴이 될 수가 없다. 기독교인은 하루 하루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주어진 삶에서 처절한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기독교인들 삶의 패턴을 생각을 해 볼 때 기도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편안한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도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II. 현세와 내세의 관점에서 본 구원

 

1. 내세적 구원

내세적 구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구원론으로 아직 이 땅에 도래하지 않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면서 살 것을 기대하는 구원론이다.

그 곳에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완벽한 파라다이스가 될 것이다.. 이 내용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니 크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현세적 구원

그런데 구원은 내세적 구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세적 구원도 분명히 존재한다. 즉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옮기는 사건이다. 그 이전에는 세상에서 나의 힘으로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공급함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삶.. 이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Not Yet과 Already로 구분되어 이해되어 지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Already Kingdom of God.. 즉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왜 매일 성경을 묵상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원하고 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III. 현세적 구원의 실체

 

1. 구약적 관점에서의 구원

구약적 관점에서 현실 가운데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구원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설명하실 때 종된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을 말씀을 하신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구원은 애굽에서 나오는 사건이 출애굽 자체가 구원인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구원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모세에게 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느냐고 묻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 문제들이 다분히 반영이 되어 잇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원 받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원 받은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재미있는 모습이 있다. 적어도 애굽에 있는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추와 다양한 먹거리들은 있었고, 또 물도 마실 수 있었다. 현실이 녹록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먹고 살 수는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외관상으로는 이집트에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전혀 나아진 점이 없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안 좋아 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마주쳤던 사건은 홍해 앞에서 이집트 바로 왕에 의해 몰살될 위협을 겪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처지에 있었고, 마실 물이 없어서 탈수로 죽어나갈 위험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또한 광야생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만나와 메츄라기 그리고 물 뿐이었다... 과연 이 생활이 이집트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생활이었을까?? 아마도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집트로 돌아가기를 원했었다...

이 것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통해서 베푸신 구원의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파라다이스만은 아닌 것이다.

 

2. 신약적 관점에서의 구원

신약에서의 구원도 구약에서의 구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고 원했었던 구원의 모습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당시의 정치,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예전 다윗 왕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 신약적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꿔왔었던 구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눈에 보이는 구원을 가지고 오시지 않으셨다. 신약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현실적으로 얻은 특권은 거의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핍박의 대상이었고, 그리스도인인 것이 발각되면 항상 형상의 이슬로 사라질 것을 염려하면서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회적으로 불안한 지위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구원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구원의 현실적 모습들을 비춰볼 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환상은 깨져야 할 것이다.. 내세적 구원, 앞으로 이 땅에 도래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우리들은 그 모든 특권들을 다 누리면서 살 수 있겠지만,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결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Posted by yy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