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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통치원리로서의 ‘공의와 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약신학적 반추
2015년 4월 17일 오후 5:00
세월호 1주기를 지나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작년에 저술했던 소논문을 올립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시계는, 적어도 제 마음에는, 작년 4월 16일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내 가족이나 내 교회의 성도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면 모든 것은 분명해질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한 사람의 삶의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는 기독교사상이 우리의 사회와 목회의 현장에서 이루어져 가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 교회가 이러한 신앙의 실천에 더욱 힘쓰고 앞장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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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통치원리로서의 ‘공의와 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약신학적 반추
김희석 (총신 신대원, 구약신학), 신학지남 319 (2014): 7-32.
(각주는 괄호처리 하였지만, 히브리어는 깨져서 보일 것입니다. 양해바랍니다)

I. 들어가는 말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처절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이 논문을 완성하고 있는 2014년 5월 26일 현재 288명이 희생되었고 16명이 실종된 상태이며, 수색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http://media.daum.net/issue/627/newsview?issueId=627&newsid=20140526213708126에 2014년 5월 27일 오전 8:51에 접속.)
 
이 참사를 통해서 모든 국민들이 가장 가슴아파한 부분은, 스스로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구조작업이 시작된 후에는 승객들 중에서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원들은 구조되었으나, 객실에 남아있던 승객들을 목숨을 잃었다. 그중 대다수가 꽃다운 나이의 청소년들이었다. 이는 ‘가만히 있으라’는 잘못된 선내 방송 때문이었고, 또한 초기상황에서 신속한 구조를 진행하지 못했던 해경 및 관련기관들의 그릇된 대응방법 때문이었다. 그 후에 이어진 구조작업에서도 정부의 대응 및 관계기관들의 구조진행 방법 등은 국민들에 의해서 날선 비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릇되거나 지혜롭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사고의 당사자인 청해진 해운 및 관계된 여러 기관들에 대한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아픔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아마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며, 대한민국의 행정 및 사회체계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되는 국민적 반성의 시간이 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때에, 개혁주의 신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어떤 관점으로 이번 참사를 바라보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개혁주의 구약신학의 관점에서 돌아보되, 특별히 공의와 의라는 언약적 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별히 구약의 언약신학의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공의와 의가 어떤 모습과 함의를 가지고 나타났는지를 구약의 주요 본문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본 논문은 먼저 공의와 의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 주요한 용례들을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의 경우로 나누어 본문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공의와 의의 신학적 함의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약신학적인 반추를 시도해볼 것이다.

II. ‘공의’와 ‘의’의 어휘적 의미

‘의’로 번역되는 히브리 원어 ‘체다카’(hq'd"c.)는 구약성경에서 총 159회 나타난다. 이 단어의 어근인 qdc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의견은 이 단어가 ‘규범’과 ‘원칙’을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님에 해당될 경우 신적인 평가 즉 의로운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보응의 함의를 띠게 된다는 견해이다. 두 번째 의견은 이 단어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묘사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인 측면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의 뜻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두 견해에 대한 요약으로는 다음을 보라: B. Johnson, “qdc,” TDOT 12: 243-246. 또한 K. Koch, “qdc,” TLOT 2: 1051-1053을 참고하라.) 데이비드 라이머(David J. Reimer)는 qdc가 원래는 규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신학적 의미가 부과되는 문맥에서 사용될 때에는 관계적인 의미를 또한 지니게 된다고 보았다. (David J. Reimer, “qdc,” NIDOTTE 3: 747-754.) 더글라스(J. D. Douglas)는 ‘의’ 즉 ‘체다카’(hq'd"c.)가 가지는 신학적 함의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도덕적, 규범적 기준이라는 전형적인 의미 외에 하나님의 사랑/긍휼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부여하는 구속적 의미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J. D. Douglas, “공의,” 「새성경사전」 (서울: CLC, 1996), 134-137.)  ‘공의’의 어근인 ‘미쉬파트’(jP'v.mi)는 구약성경에서 총 424회 등장하는데, 그 의미가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된다. 존슨(B. Johnson)에 따르면, ‘미쉬파트’(jP'v.mi)는 구약성경 안에서 신탁/제비뽑기, 법적 판결, 권리, 규범, 관습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어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역시 정의, 판결, 규범 등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해석하였다. (B. Johnson, “jP'v.mi,” TDOT 9: 87-97. 또한 Robert D. Culver, “jpv,” TWOT 2:949-949를 보라.)  이 두 단어들은 이렇듯 다양한 의미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기계적인 원칙에 의해서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두 단어는 공의, 정의, 공평, 의, 법도, 규례 등 그 문맥에 따라서 적절하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함께 묶여서 등장하는 경우는 좀 다르게 판단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체다카’(hq'd"c.)와 ‘미쉬파트’(jP'v.m)가 하나의 쌍으로 등장하는 경우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이 두 단어가 함께 묶여서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개념을 도출한다고 보았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김재영 역 (서울: IVP, 2006): 353.) 구약의 시적 표현 방법 중의 하나인 중언법(hendiadys)으로 해석한 것이다. 특별히 라이트는 시 33:5에 근거하여 의와 공의(hq'd"c.W jP'v.mi)는 “사회정의”를 뜻한다고 보았다. 시편 33편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을 나타내는 어휘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된 언약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기에 결국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사회적 정의와 연관된다고 서술하였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353-358.) 그리고 그러한 여호와의 정의는 이 땅 가운데 실현되어야 하는 보편적 정의라고 해석하였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367.)
이러한 이해를 위해 라이트는 창 18장, 미가 6장을 비롯한 구약의 여러 본문을 살펴보는데, 본문 중심으로 언약사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공의와 의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나가기 보다는 주제적인 접근을 통해서 공의와 의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필자는 공의와 의가 하나의 중언법적 개념이라는 점에 있어서 라이트의 의견에 공감하며, 특별히 이 개념이 여호와의 언약적 성품과 연결되는함의를 갖고 있다는 그의 해석에도 동의한다. 다만, 라이트는 그러한 점을 주제적인 접근을 통해서 살펴보았는데, 기본적인 해석의 출발점이 언약을 다루고 있는 직접적인 본문이 아니라 시 33:5에서 출발했고, 관련된 주요한 언약의 본문들을 총괄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한 공의와 의를 단순히 보편적 사회 정의로 해석할 경우, 공의와 의에 대한 구약의 다양한 수준과 맥락의 이해들을 단순화시킬 수 있는 해석의 위험도 우려가 된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중심적인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라이트의 논의를 더 넘어서는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의와 의’라는 구절들이 등장하는 언약 본문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서 각 언약에서 드러나는 공의와 의의 함의를 연구해 볼 것이다.

III. 언약의 맥락에서 본 ‘공의와 의’

구약 성경에서 ‘공의’(jP'v.mi)와 ‘의’(hq'd"c.)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구절은 구약에서 총 46구절이다. (창 18:19; 신 33:21; 삼하 8:15; 왕상 10:9; 대상 18:14; 대하 9:8; 욥 37:23; 시 33:5; 36:7; 72:1; 99:4; 103:6; 106:3; 잠 8:20; 16:8; 21:3; 사 1:27; 5:7, 16; 9:6; 28:17; 32:16; 33:5; 54:17; 56:1; 58:2; 59:9, 14; 렘 4:2; 9:23; 22:3, 15; 23:5; 33:15; 겔 18:5, 19, 21, 27; 33:14, 16, 19; 45:9; 암 5:7, 24; 6:12; 미 7:9). 이중에서 ‘공의와 의’(hq'd"c.W jP'v.mi)라는 표현이 사용된 경우는 총 22구절이며(삼하 8:15; 왕상 10:9; 대상 18:14; 대하 9:8; 시 99:4; 사 32:16; 33:5; 59:14; 렘 9:23; 22:3, 15; 23:5; 33:15; 겔  18:5, 19, 21, 27; 33:14, 16, 19; 암 5:7, 24), ‘의와 공의’(jP'v.miW hq'd"c.)로 사용된 경우는 총 3구절이다(창 18:19; 시 33:5; 잠 21:3). 본 논문에서는 ‘공의와 의’ 및 ‘의와 공의’는 그 의미상 같은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되므로, 같이 연구해 보려고 한다. 총 25구절들 중에서, 우리는 먼저 아브라함 언약에 해당되는 창 18:9를 살펴보고, 그 후 시내산 언약에서의 의와 공의를 간략히 고찰한 후, 다윗언약에서 의와 공의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조사할 것이다.

1.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공의와 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공의와 의’라는 표현은 창 18:19에 단 한 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시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본 논문의 성경본문은 필자 개인의 사역이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jP'v.miW hq'd"c.)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 언약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이 본문에서 ‘의와 공의’에 대한 부분에 주목한 반면, 게르할더스 보스는 이 본문을 아브라함이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렸다는데 주목하였다. 구약의 그 어떤 인물도 아브라함에게처럼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신 일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본문을 신인동형론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게르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104-105.)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역할이 ‘공의와 의’를 행하는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직접 정확하게 밝히시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앞 구절인 창 18:18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한 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창 12:3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열방을 위한 복의 통로로 쓰임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기 않은 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나타나는 ‘의와 공의’는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그가 이루어내야 할 하나의 개념적인 목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대상자로서 열방을 향해서 ‘의와 공의’를 이뤄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적 기능을 왜 ‘의와 공의’라는 단어로 표현하신 것일까? 매튜스(K. A. Matthews)는 이 문구를 ‘옳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요구’로 해석하여 사회정의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Kenneth A. Matthews, Genesis 11:27-50:26 (NAC 1B; Nashville: Brodaman & Holman, 2005), 224.) 이는 앞서 살펴본 라이트의 견해와 유사하다. 이러한 견해가 ‘의와 공의’를 설명하는 충족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언약 본문인 창 11:27-25:11 안에서 의와 공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창 11:27-25:11 안에서 ‘의’(hq'd"c.)는 창 15:16과 창 18:19에서 각각 한 번씩 나타나고, ‘공의’(jP'v.mi)는 창 18:19, 25에서만 나타난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것을 알려주시는 창 18장 본문 밖에서는 오직 창 15:16 한번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창 15:16을 살펴보고, 그것을 근거로 창 18:25를 해석해 보기로 하자. 창 15:16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창 15:1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hq'd"c.)로 여기시고
 
이 구절은 개혁교회 전통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구절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중요성과 함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할 것이나, 본 논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의’(hq'd"c.)가 주어졌다는 결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둠브렐(W. J. Dumbrell)은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창 15:6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겼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적 신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아브라함이 “약속을 깊이 신뢰함과 동시에 그 약속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 이 시점에서 타당했다는 점을 성경기자가 강조하고자 하였다”라는 해석이다. 이는 구약에서의 의의 의미를 “이미 세워진 관계와 일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둠브렐의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구약에서의 의의 의미가 이렇게 고정된 범주 안에 갇히게 되는 둠브렐의 견해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의’의 원어인 ‘체다카’의 의미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할 때 잘 드러났듯이, ‘의’라는 단어의 신학적 함의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창 15장의 문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엘리에셀로 양자를 삼을 것을 하나님께 건의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설득해 가신 것을 보게 된다(창 15:1-5). 여기서 아브라함 자신의 언약적 성실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15:6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하신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W. J. 둠브렐, 『언약과 창조: 구약 언약의 신학』, 최우성 역 (서울: 크리스챤, 2009), 86-87. 필자와 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보려면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Matthews, Genesis 11:27-50:26, 167-168; 고든 웬함, 『창세기 1-15』, 박영호 역 (WBC 1; 서울: 솔로몬, 2001), 571-573.)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기셨고, 그는 ‘의’(hq'd"c.)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역사를 중심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해석하는 입장은 창 15:9 이하에 등장하는 언약체결의식에 의해서 지지된다. (이 의식에서의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태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Peter J. Gentry and Stephen J. Wellum, Kingdom through Covenants: A Biblical-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Covenants (Wheaton: Crossway, 2012), 248-258; 메리데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서막: 언약적 세계관을 위한 창세기적 토대』, 김구원 역 (서울: P&R, 2007), 368-373; 571-573.) 따라서 ‘의’란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성을 정의할 수 있는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위에서 ‘의’의 어휘적 의미군을 살펴본 바와 같이‘의’라는 단어는 규범적 의미와 관계적 의미를 모두 나타낼 수 있다. ‘의’라는 어휘 자체는 규범적 의미를 지니지만 언약적 맥락의 본문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성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원래 의인은 아니었으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었고 그 상태를 ‘의’(hq'd"c.)라고 명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5장 이후에서는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생각하면서 아브라함 내러티브를 읽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의롭게 된 의인 아브라함이 18장에서 감당해야 하는 ‘의와 공의’는 무엇일까? 의와 공의(jP'v.miW hq'd"c.)에서 ‘의’의 의미는 15장에서 밝혀졌으니 이제는 ‘공의’ 부분을 보아야 한다. ‘공의’(jP'v.mi)는 창 18:25에 나타나고 있다.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qyDIc;)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qyDIc;)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jpevo)이 공의(jP'v.mi)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5는 아브라함이 소돔 성읍 가운데 의인이 있다면 소돔을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탄원을 여호와께 드리고 있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의 탄원은 소돔에 있는 의인 즉 ‘차디크’(qyDIc;)를 위한 간구이다. 즉 의인인 아브라함이 소돔에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의인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디크’(qyDIc;)는 명사 ‘의’(hq'd"c.)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인 아브라함이 소돔의 의인을 구하려 했다고 보아도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공의’(jP'v.mi)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우리가 창 18:25에서 주목해야 부분은 이런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묘사하는데, 여기서 ‘다스리다’로 번역한 단어가 바로 ‘샤파트’(jpv)이다. 이 단어는 ‘심판하다’ 및 ‘다스리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공의 즉 ‘미쉬파트’(jP'v.mi)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25절에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요청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분 즉 ‘샤파트’(jpv)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공의’(jP'v.mi)를 이루셔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25절이 말하는 공의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소돔에 있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공의’이다. 의인이 악인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은 공의에 위배되므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행하실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논점이다. 즉 공의란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규범적 통치행위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이상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아브라함 내러티브에서 ‘의’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회복된 관계성을 말하며, ‘공의’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적 통치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 18:19에서 아브라함이 이러한 ‘의’와 ‘공의’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창 18:18-19의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18-19절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서, 열방을 위한 복의 통로로서 아브라함이 감당하고 있는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브라함이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으로서 합당한 일을 행한다는 아브라함의 자기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의미이며,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올바로 실행되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현실적인 사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와 공의’라는 문구는, 이러한 ‘의’와 ‘공의’에 대한 개념이 함께 융합된 통전적 문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사람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여 맺게 되는 열매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언약당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함을 표현하는 특별한 어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 18장에서의 ‘공의와 의’란 앞서 소개한 바 라이트가 말한 단순한 ‘사회 정의’의 개념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트는 창 18:19에서의 ‘의와 공의’란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 369.)
‘공의와 의’란 언약 당사자가, 새롭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생활 가운데 구현해 낸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해는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인 ‘열방을 회복하는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에 매우 잘 부합한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삶에서 구현함으로써,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복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다.
 
2. 시내산 언약에서의 공의와 의
 
시내산 언약에서 ‘의와 공의’(jP'v.miW hq'd"c.)라는 문구는 나타나지 않는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가운데 ‘공의’와 ‘의’가 함께 나타나는 본문은 오직 신 33:21뿐인데, ‘공의’와 ‘의’가 중언법으로 연결되어 나타나지는 않으며, ‘여호와의 의’와 ‘그의 규례’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특별히 ‘미쉬파트’(jP'v.mi)는 복수형으로 등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신 33:4는 본 논문의 연구 주제인 통전적 개념으로서의 ‘공의와 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에서의 공의와 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논점을 간략하게만 다루어보도록 하자. 첫째, 시내산 언약은 한 개인이 받은 언약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공동체 언약이다. 우리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살펴본 ‘공의와 의’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는데, 시내산 언약에서는 한 개인을 다루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 전체를 다루고 있다. 사실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 당사자의 정체성은 ‘공의와 의’라는 표현 대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뭇 다른 문구로 구성되었다 (출 19:5-6).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언약적 함의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둠브렐, 『언약과 창조: 구약 언약의 신학』, 147-151.)
 
둘째,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언약 백성에게 주어졌는데, 그 율법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십계명인데, 원문으로는 ‘열 가지의 말씀들’(~yrIb'D>)이다. 두 번째는 그 십계명을 언약 백성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규례들’(~yjiP'v.mi)이다. 이 ‘규례들’이라는 단어는 ‘미쉬파트’(jP'v.mi)의 복수형이다. 즉 규례들이란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통치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 삶에 구현되게 하기 위한 실천적인 지침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 언약의 ‘의와 공의’가 시내산 언약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의와 공의’라는 문구 자체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시내산 언약은 개인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닌 공동체의 언약이기에, 아브라함 언약에서 아브라함이 한 개인 언약당사자로서 ‘의와 공의’를 이루는 사명을 받았던 것과는 상이한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3. 다윗언약에서의 공의와 정의
 
이제 우리는 ‘공의와 의’가 다윗 언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다윗언약은 사무엘하 7장에 처음 기록되었고, 역대상 17장에서 재차 기록되었다. 본 논문은 ‘공의와 의’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범위를 사무엘서로 한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서는 다윗언약이 수립되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는 이미 무너진 다윗의 가문이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맥락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윗언약의 근원적 함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서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먼저 ‘공의’와 ‘의’가 사무엘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면, ‘의’(hq'd"c.)는 6구절에서 나타나며(삼상 12:7; 26:23; 삼하 8:15; 19:29; 21:21, 25), ‘공의’(jP'v.mi)는 12구절에서 나타난다(삼상 2:13; 8:3, 9, 11, 10:25; 27:11; 30:25; 삼하 8:15; 15:2, 4, 6; 22:23). 그리고 ‘공의와 의’(hq'd"c.W jP'v.mi)가 하나의 어구로 등장하는 경우는 삼하 8:15이 유일하다. 먼저 삼하 8:15를 살펴보자.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공의와 의(hq'd"c.W jP'v.mi)를 행할새

사무엘하 8:15는 사무엘하 1-8장에 걸쳐 나타나는 다윗의 통치 전반기 부분의 결말부에 해당된다. 바로 앞 장인 사무엘하 7장에는 다윗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즉,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하사받았고, 그 후 8장에서 다윗은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열방에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승리를 거두었고(1절), 모압(2절), 소바 왕 하닷에셀(3절), 아람(5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다윗의 승리를 묘사하면서 삼하 8:6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고 평가하였다. 다윗은 또한 하닷에셀에게 승리를 거두었고(7-8절), 하맛 왕 도이에게서 예물을 받았고(9-10절), 에돔에게 승리를 거두었다(13절). 이런 승리를 묘사하면서 삼하 8:14는 다시 동일한 어구를 사용한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이방 민족에 대한 계속되는 승리를 열거한 후, 삼하 8:15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공의와 의”를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삼하 8:15에 나타난 다윗의 “공의와 의”를 행함이란 다윗언약을 받은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삶의 열매를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이제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열방을 복종시키게 되었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공의와 의를 행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공의와 의’는 다윗언약에서 다윗의 통치행위를 나타내는 궁극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공의와 의’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삼하 8장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공의와 의’가 사무엘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러 용례 중에서 우리는 ‘공의’가 집중적으로 사용된 삼상 8-12장의 부분을 고찰해 보도록 한다. 여기서 ‘공의’의 사용이 중요한 이유는 이 단어가 사용된 맥락 때문이다. 삼상 8-12장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부분인데, 삼상 8:5이하의 본문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본문 및 주요 단어와 그 원어를 표기해보면 아래와 같다.

삼하 8:5-9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멜렉, %l,m,)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샤파트, jpv)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멜렉, %l,m,)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샤파트, jpv)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멜렉, %l,m,)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을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말라그, %lm) 왕의 제도(미쉬파트, jP'v.mi)를 가르치라

삼상 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왕정제도를 허락해달라고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요구하는 본문이다. 이런 백성들의 요청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무엘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에게 왕정제도를 만들어주라고 허락하신다. 비평학자들은 이 본문 안에 소위 친(親)왕조전승과 반(反)왕조전승이 있는데 왕정제도를 구한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내용은 반왕조전승이고 왕정제도를 허락해주었다는 내용은 친왕조전승이라고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깊게 통전적으로 읽어가 보면 이러한 역사비평적 읽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진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다스림’을 뜻하는 두 가지 동사들이 서로 사뭇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두 동사 사용의 차이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백성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는데(5절), 이 때 ‘다스리다’는 동사는 ‘샤파트’(jpv)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작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해주신 인간 왕의 통치를 표현하는 ‘다스리다’는 동사는 ‘샤파트’가 아닌 ‘말라크’(%lm)이다(9절). 하나님이 지금 허락해주시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왕정제도에서 인간 왕이 하는 역할은 ‘샤파트’(jpv)가 아닌 ‘말라크’(%lm)인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샤파트’할 왕을 구하자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6절). 그렇다면, ‘샤파트’ 동사와 ‘말라크’ 동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가 근접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요한 용례가 있는데, 바로 삼상 7:6, 15, 16, 17에 네 차례나 연속하여 사용되고 있는 ‘샤파트’(jpv)의 용례들이다. 그 내용은 모두 사무엘이 사사로서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왕정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사사제도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사사’의 히브리어 원어는 ‘쇼페트’(jpevo)로서 ‘샤파트’ 동사의 분사형태이다. ‘샤파트’ 동사는 사사 통치 제도 하에서 사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김지찬,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3), 159.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사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다스리시는 신정 통치 (theocracy)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을 드러내는 단어가 바로 ‘샤파트’인 것이다. 그런데 삼상 8: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왕정 제도를 요구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이 ‘샤파트’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왕이 ‘샤파트’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데이비드 퍼스(David G. Firth)는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를 ‘사사직분을 공식적인 기관/제도로 만들어달라는(institutionalization of the judge) 요구’로 해석하였다. 비록 ‘샤파트’와 ‘말라크’의 어휘 자체를 논하지는 않았으나, 퍼스의 견해는 필자의 생각과 유사하다. (David G. Firth, 1 & 2 Samuel (AOTC 8; Nottingham, Apollos, 2009), 113-114. ‘샤파트’동사에 주목하고 있는 다른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A. Graeme Auld,  I & II Samuel (O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1), 93. )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이제 인간 왕이 행사할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서, 사실상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정을 허락해주시기는 하지만, 그 왕정 제도에서 왕의 역할은 ‘샤파트’하는 역할이 아니라 ‘말라크’하는 역할일 뿐임을, 즉 매우 제한적인 통치권을 갖고 있을 뿐임을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말라크’(%lm)동사는 ‘왕’을 뜻하는 명사 ‘멜레크’(%l,m,)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바는,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통치권 ‘샤파트’를 대체하지 못하며, 단순히 왕이 다스리는 행정적인 제도가 주어질 뿐이고,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통치권인 ‘샤파트’ 행위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9절에 사용된 ‘미쉬파트’(jP'v.mi)의 함의를 밝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5-8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은 ‘말라크’이지 ‘샤파트’가 아님을 밝히시고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제도(jP'v.mi)를 알려주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서 ‘제도’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미쉬파트’(jP'v.mi)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샤파트’ 동사와 같다.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왕정의 제도는 ‘다스림’에 대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 원칙이 무엇일까? 이미 살펴본 대로, 삼상 8장의 문맥에서 볼 때, 이스라엘 왕정에 있어서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 스스로 통치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되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늘 인정하는 왕이 되어야만 했다. (김지찬,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구약 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9), 305-306.)
그럴 때라야 그의 왕정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되어 승리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10장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는데, 여기서 ‘제도’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도 역시 ‘미쉬파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왕정제도에서, 나라의 통치에 관련되어 사용되는 ‘미쉬파트’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인간 왕의 통치행위에 있어서 ‘미쉬파트’란, 궁극적인 통치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왕정제도의 ‘미쉬파트’의 핵심이다.
이제 다시 삼하 8:15로 되돌아와 보도록 하자. 다윗은 ‘공의와 의’를 행했다고 하는데 이 때 공의가 바로 ‘미쉬파트’(jP'v.mi)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미쉬파트’를 삼상 8장에 나온 하나님의 통치권을 뜻하는 ‘미쉬파트’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삼하 8:15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표현을 살펴야 한다. 이 구절에서 ‘다스렸다’는 동사의 원어는 다름 아닌 ‘말라크’(%lm)이다. 즉, 다윗은 ‘샤파트’한 것이 아니라 ‘말라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의 통치행위는 ‘말라크’ 동사와 ‘미쉬파트’로 묘사된다. 이것은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이스라엘의 왕정제도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된다. 사무엘상 8장을 기초로 사무엘하 8장을 읽는다면, 다시 말해 사무엘서 전체를 통전적인 하나의 책으로 읽는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모습을 선명히 보이고 있음은 매우 분명해진다.
만약 삼하 8:15의 ‘공의’ 즉 ‘미쉬파트’를 이렇게 해석한다면, ‘의’(hq'd"c.)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의’ 즉 ‘체다카’(hq'd"c.)는 사무엘서에 총 6회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 중 이 단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된 예가 삼하 22:21, 25이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삼하 22:21, 25
21 여호와께서 내 의(hq'd"c.)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hq'd"c.)를 따라, 그의 눈 앞에서 나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도다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노래인데, 장르로 구분하면 제왕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인 1-20절은 고난에 빠진 다윗을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내용이며, 두 번째 부분인 21-28절은 다윗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내용이며, 세 번째 부분인 29-51절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전쟁하는 방법을 훈련시켜 주셔서 다윗이 전쟁의 용사가 되어 열방을 다스리게 되는 내용이다. 즉 22장의 결론은 다윗이 열방을 다스리게 된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마지막 부분의 결말이 드러나기 전, 두 번째 부분인 21-28절에서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있게 서술하고 있다. 즉, 세 번째 부분에서 다윗이 전쟁의 용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두 번째 부분에 서술된 바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Firth, 1 & 2 Samuel, 519.)
그러한 서술 가운데 21절과 25절이 등장하는데, 매우 흥미롭게도, 21절과 25절의 내용과 어휘는 거의 유사하다. 요약하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의(hq'd"c.)를 따라서 그에게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1절과 25절에서 ‘의’와 평행되는 어휘는 ‘깨끗함’(rBo)이다. 21절은 ‘다윗의 손의 깨끗함’이라고 좀 더 선명히 이 단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손의 깨끗함이란,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짓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21절과 25절 사이에 위치해있는 22-24절을 살펴보면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앞에서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와 같은 서술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보았을 때, 21절과 25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의’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의’(hq'd"c.)는 다윗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신앙적인 관계성인데,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은 정결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의’(hq'd"c.)의 의미를 삼하 8:15의 ‘공의와 의’의 이해에 적용해보도록 하자. ‘공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통치를 인정하는 태도를 말하며, ‘의’란 하나님과의 관계성 즉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뜻한다. 그렇다면 ‘공의와 의’를 중언법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공의와 의’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언약을 하사 받은 이후(삼하 7장),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열방에게 계속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삼하 8:1-1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요약해서 표현하면, 삼하 8:15에서 ‘공의와 의’란, 언약당사자인 다윗이, 인간 왕으로서의 통치행위를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려고 하였으며, 그 통치 속에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삼하 8:15에서의 ‘공의와 의’의 경우, 앞서 살펴본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의와 공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라이트가 말한 ‘사회 정의’보다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보여줌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 ‘공의와 의’란, 단순한 통치의 의로운 결과물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그 통치의 결과로 사회적 정의가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겠지만, ‘공의와 의’는 그러한 결과물만을 뜻하기에 앞서서, 다윗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관계된 ‘통치의 원리’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당사자로서, 자신의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자신의 통치행위를 펼쳐나갔던 것을 알 수 있다.

4.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있어서 공의와 의

사무엘하 8장 이후로, ‘공의와 의’가 중언법으로 사용되어 등장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중요한 경우로는, 왕상 10:9 및 대하 9:8에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통치를 ‘공의와 의’의 행함으로 묘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솔로몬이 타락하기 전에는 다윗의 통치를 따라갔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이사야 33:5에서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공의와 의’로 행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외에 선지서의 여러 본문에서 ‘공의와 의’를 행할 것 을 강조하는데, 그 예로는 렘 22:3이 있다. 렘 23:5; 33:15은 다윗의 후손이 일어나 ‘공의와 의’를 행하리라는 예언을 전달하고 있으며, 겔 18:5, 19, 21; 33:14, 16, 19은 ‘공의와 의’를 행할 때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임을 선포한다. 중언법으로 사용되지 않은 채 ‘공의’와 ‘의’가 각각 홀로 사용된 경우는 훨씬 더 많으며, 선지서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그려지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러한 공의와 의가 바로 행하여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경고와 저주가 계속 임하게 되었으며, 공의와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복될 수 있다고 구약성경의 많은 본문들이 가르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용례들이 ‘공의와 의’ 혹은 ‘의와 공의’라는 중언법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에, 시간과 지면의 한계상 본고에서는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IV. 요약 및 신학적 함의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 언약에서 ‘의와 공의’는 언약 당사자가 새롭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생활 가운데 구현해 낸다는 의미이다. 2) 시내산 언약에서는 ‘공의와 의’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3) 다윗언약에서 ‘공의와 의’는 언약 당사자가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의 통치가운데 구현해 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켜간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의미와 다윗언약에서의 의미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전반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즉 다윗언약에서 의와 공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인하여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Firth, 1 & 2 Samuel, 399)
지금까지의 이러한 논의가 ‘공의와 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빛을 던져줄 수 있을까? 몇 가지 함의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공의와 의’라는 개념은 언약의 당사자 개인에게 해당되는 표현이었고 공동체 전체에 해당되는 표현은 아니었다.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서는 ‘의와 공의,’ ‘공의와 의’라는 문구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행함에 있어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에서 있어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행함에 있어서 이 문구는 언급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공의와 의’가 언약 공동체 전체의 의무와 책임이라기보다, 그 언약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언약공동체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의와 공의를 행해야 했고, 다윗 역시 다윗언약의 당사자로서 또한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국가의 왕으로서 의와 공의를 행해야 했다. ‘의과 공의’는 공동체의 리더가 공동체를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가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리더에게 요구되는 책임인 것이다.
둘째, ‘공의와 의’는 어떤 통치행위의 ‘결과물’이기보다는 바른 통치 행위를 이루기 위한 ‘통치의 원리’이다. 즉 ‘공의와 의’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회정의적 관념보다 훨씬 깊고 포괄적인 개념인 것이다. 물론 공의와 의는 사회정의로 해석될 수 있다. 특별히 선지서 등의 본문들에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경제적, 사회적 해악을 입히는 것을 공의와 의를 해치는 행위로 보며, 공의와 의를 다시 회복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공의와 의가 사회적 정의로 해석될 수 있는 맥락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사회정의는,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의 ‘원리’로서의 ‘공의와 의’가 잘 실현된 결과적 함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또한 다윗에게 있어서 사회정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고, 그 목표가 그들에게는 ‘공의와 의’로 이해되었다.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결과가 생겨나게 된 것은, 그러한 ‘공의와 의’가 바르게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선지서에서 ‘공의와 의’가 사회적 정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통치의 원리로서의 ‘공의와 의’가 실행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회적 정의가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와 의’란 공동체의 리더가 가져야 할 통치의 원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올바로 지켜나가 하나님의 통치가 그 공동체 가운데 실현되도록 하는 방향성 및 실천 지침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V.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신학적 반추

지금까지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세월호 참사를 반추해보도록 하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이유 및 참사 이후 구조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문제들은 사실 ‘리더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내용들을 살펴보면, 청해진해운 측에서 세월호를 무리하게 증축하여 운용하였고, 안전지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해운사의 리더들의 문제이다. 세월호가 사고 당일 침몰하고 있을 때, 선박과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조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을 한 후 자신들만이 탈출을 감행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보였다. 선박의 리더들은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감당하지 않았다. 구조가 시작된 후, 해경 및 관계된 기관들의 구조행동은 지혜롭지 못하였고 어리석었으며, 심지어는 여러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해경 및 관계기관의 여러 리더들의 문제였다. 구조가 진척되기 시작한 이후, 구조 전체를 지휘하는데 있어서 정부와 행정기관들은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정부 및 기관들을 이끌어나가는 리더들의 문제이다. 또한 정부 및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은 실종자 및 희생자들에 대하여 적절하지 못한 발언들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이 역시 리더들의 문제이다. 이에 각종 언론들 뿐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은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고 있으며, 잘못된 행정 체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언론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상황을 총괄적으로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나 기관은 찾을 수가 없다. 청해진해운과 관계된 구원파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발뺌하고 도망하려 하고, 이런 모든 문제의 책임의 정점에 서 있는 정부 역시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있으며 다가온 6월 4일의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움직임만 겨우 보이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실종자들의 시신은 다 찾지 못했고, 국민들의 마음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깊이 새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살펴본 ‘공의와 의’의 개념은 어떤 시사점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 ‘공의와 의’라는 통치 개념을 배워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갖고 있는 통치 개념은 ‘정치적 이익’ 및 ‘경제적 이익’이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만 움직이며, 손해를 보게 될 경우는 책임을 지지 않고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사회의 리더들의 가치관 속에 ‘공의와 의’라는 개념이 새겨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의와 의’라는 개념이 사회전반적인 리더의 자질과 가치관으로 정립이 되도록 노력해가야 한다. 더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러한 리더십의 가치관 변화는 필수적이다.
둘째, 이러한 ‘공의와 의’의 개념을 사회 정의적 개념으로만 제한하지 말고, 리더십의 통치 원리인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앞서서 살펴본 것처럼, ‘공의와 의’는 가치관의 문제이며, 리더십의 원리 자체이다. 우리가 ‘공의와 의’를 사회적 정의 실현의 결과물로만 이야기할 때, ‘공의와 의’에 대한 실제적 논의는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려 방향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가 생각하는 ‘공의와 의’의 결과물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복지의 확대를 공의와 의의 결과로 보는 반면,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체계 수호를 공의와 의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의와 의를 결과물로만 이해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도출해내려고만 하다가, 평소 품고 있던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하거나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의와 의’는 결과물 정도가 아닌, 통치의 원리와 방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되는 리더십의 본질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공의와 의에 합당한 결과물까지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이런 ‘공의와 의’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리더십의 원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본 논문은 ‘공의와 의’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본다면, 공의와 의는 기독교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원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공의와 의가 우리 사회에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당연히 생겨난다.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안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 공의와 의를 실현해 나가나는 방법이다. 물론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 방안은 본질적으로 매우 큰 허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공의와 의를 자신의 원리로 삼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실제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이지만, 사회에서는 공의와 의로 하지 않고 비신자들과 똑같은 원리로 즉 정치적 경제적 이득 계산으로 일을 해나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가 공의와 의의 원리를 실천하는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둘째,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공의와 의’의 가치관에 보다 부합하는 인물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육과 선거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먼저는 교회교육을 통해서 공의와 의의 가치관을 가르치고, 기독교출판 및 일반 출판을 통해 공의와 의의 세계관을 알리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 가운데 공의와 정의의 리더십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이 선거이다. 우리는 사회의 리더를 선출하는 선거를 통해서, ‘공의와 의’의 가치관에 보다 더 가깝게 부합하는 인물을 선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과 정치원리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와 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선택하여 투표하는 것이다. 그가 기독교인인가의 문제보다, 그가 과연 기독교 원리인 공의와 의의 가치관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 나가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세속적인 정책을 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공의와 의에 보다 더 가까운 정책을 추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정책적 측면을 잘 살펴 투표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인 공의와 의가 우리 사회에 실현될 수 있게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VI.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공의와 의’의 어휘적 의미 및 언약의 흐름에 있어서의 공의와 의의 용례 및 신학적 함의를 연구하였고, 그에 기초하여 세월호 참사를 반추해 보았다. 이러한 논의가 기초가 되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세월호 참사와 같은 가슴 아픈 일은 없어지고 성경이 가르치는 공의와 의의 가치관이 널리 알려지고 실천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notes/855471134527266/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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