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바로 앞 절까지의 Prologue에 이어서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시작이 됩니다.
구조를 보면 두 가지 가르침이 서로 대조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는 가르침을 제시를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그때까지 당시 예수님의 청중인 1)갈릴리 사람들이 들어왔었던 가르침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 더해서 한 가지를 덧붙이십니다. 실제로 살인을 한 경우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도 역시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마 5:17절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닌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중 6번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대해 예수님이 재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만 내더라도.. 또는 욕을 하더라도 (5:22절의 라가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욕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할 때 충분히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죽음의 기원은 창세기 2:17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 말씀을 하셨을 때 그 죽음이 2장 17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결과를 보면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죽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큰 결과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즉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이지요.
죄악이 이 땅에 들어오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이 아무리 애타게 찾고 불러도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시고 또 보여주셔도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 죽음에 해당하는 관계인 것이지요.
죽음의 상태가 바로 이러한 관계의 단절 상태입니다. 부모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을 여윈 자식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엄마 잘못했어.. 아빠 사랑해요" 이 짧은 한 마디..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자녀를 낳고 또 키우면서 부모님들의 어렵고 힘든 마음을 이제는 이해를 했는데.. .. 어린 시절.. 철 없는 시절에 부모님한테 했었던 모질고 거친 말들.. 그런 말들을 듣고 부모님들이 얼마나 상심하시고 얼마나 낙심하셨을까.. 이제 철이 들어서 그런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 했는데.. 그래서 부모님들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고 아껴줘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앞으로는 잘 해 주겠다고.. 이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 이야기를 해야 할 대상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현실.. 그 현실이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문제는 관계의 단절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부모님과는 더 이상 관계를 맺고 만들어 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상대의 죽음이 나에게 주는 충격의 주요 원인은.. 바로 이 단절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또는 이성간의 교제에 있어서도 이런 부분은 같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 그리고 스트레스가 바로 부부의 헤어짐이라고 하는데요.. 부부간의 헤어짐 또는 이성간의 헤어짐에 있어서도 사별이 되었든.. 아니면 이혼이나 교제의 중단이 되었든 서로 헤어짐으로 인해서 받게 되는 충격은 작지 않다는 것 같아요.. 그 이유도.. 그 헤어짐에서 받는 충격의 원인은 단순히 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더 이상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일겁니다.. 저도 교제하던 자매와 헤어진 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안부 문자를 할 곳이 없을 때더군요. 항상 일어나면 타먹던 미숫가루를 타먹으면서 안부문자를 하곤 했었어요.. 아침에 잘 일어나서 지금 미숫가루 타먹고 있다고.. 잘 자라고.. 그런데 자매와 헤어지고 이 단순한 문자를 보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더군요.. 관계의 단절이 주는 충격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인격을 비하하고 무시할 때.. 이때 만들어지는 결과가.. 바로 이 단절의 상태입니다.. 일단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상대를 비판하고 비하하고나면 남는 결과는 둘 사이의 관계의 단절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둘이 서로 서로를 피하게 되지요.. 저 멀리 상대가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고. 설령 마주 보더라도 못 본척 지나가게 되고.. 상대가 뻔히 살아서 내 눈앞에서 움직이는데도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는 죽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살인은 꼭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버릴 때, 그때에도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는 마치 죽음 사람과 같아 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화를 내고 욕을 하여도 그것은 살인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관계를 단절 시킬 수 있는 그런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관계를 깨지 않고 싶은데.. 건강하고 평화로운 그런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데.. 그런데 그게 제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환경..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괜시리 마음이 아퍼지네요.. 어쨌든.. 이 말씀도 지켜보려고 많이 노력하고 발버둥치고 하기는 하는데..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네요.. 제가 원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수 밖에는...
1) 여기서 당시 예수님의 청중이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수 주변의 사람들이었는데 당시 여기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B.C. 722년에 앗시리아에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10개 지파의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혼합 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보면 이방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신 7:1-11) 하지만 이 율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에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이어지는 율법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의 재건운동이 벌어지면서 양상이 달라집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절에 쓰러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성벽을 건축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게 되고 그 후로 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로 다시 들어가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앙 전통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문제를 삼았던 율법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방인과의 혼인 문제는 대대적인 회개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중에서 이방인 여인과 결혼을 한 사람의 조사가 있었고, 결국 이방인과 결혼을 한 제사장들은 아이까지 낳아 길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결정을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결혼을 하는 것은 크게 죄악시 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경멸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정통 유대민족의 피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유대의 민족적인 순수혈통을 이어가지 못했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어려움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잘못 한 것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마음 깊이 깔려있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여다봐야 유대인들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린 이유를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자신들의 선조들에게서 찾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경우 로마의 속국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나라가 다시금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방인들과 자연스럽게 인을 하고 떳떳하게 신명기 7장에서 주어진 율법을 어기면서 살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용납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위협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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