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본문은 소금과 빛의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바라보는 일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5:13-16은 소금과 빛의 비유가 나오고 5:17-20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계시는 지가 나옵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에 소금과 빛이 이 세상에서 하는 역할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설명을 해야 할 거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소금의 짠 맛은 부패를 방지하거나 부패하더라도 그 진행이 느리게 진행이 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역할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또 특유의 짠맛을 내서 음식이 싱겁지 않도록.. 우리가 먹기 좋도록 해 주는 역할을 감당을 하지요...

우리의 세상에서 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설령 부패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 진행 속도가 느리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빛의 경우에는 세상을 비추는 용도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빛의 더 명확한 의미는 5:16절의 착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15절과 16절의 문맥으로 보았을 때 1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의 의미는 분명히 16절에 나타나 있는 착한 행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소금과 빛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통 설교를 듣게 되면 위에 정리된 내용에 여러가지 비유를 붙여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들으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에서 소금과 빛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거리가 조금  더 있는 것 같아요...

먼저 마 5:13-20절의 말씀은 마 5:1-7:29절까지의 큰 주제 안에 있습니다. 보통 이 부분을 산상수훈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산상수훈의 큰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보고 있습니다. 마 4: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 하시고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제일 처음 했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천국.. 조금 더 신학적이고 유창한 용어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이지요. 제가 공부하고 있는 고든콘웰의 교수님중 한 분이셨던 Gary Parett 교수님은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사건 자체가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구약은 도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종종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국가를 일으켜 세울 위대하고 영원하신 왕의 탄생으로 귀결이 되곤 합니다. 그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해서 왕으로 좌정하게 된다면 그 왕이 그때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대적들을 격파하고 결국 이스라엘을 높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야 예언에 상당히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오셔서 말씀하셨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언을 하셨던 이스라엘을 통치할 영원하신 왕의 도래를 의미를 하는 것이고, 이 것은 결국 구약 예언의 성취를 의미를 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의 영원하신 왕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역시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구약 예언의 성취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영적 이스라엘이 이 땅에 세워졌다는 선포를 하시고 나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신 내용을 제일 먼저 기술한 것이 바로 이 산상수훈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이스라엘을 이 땅 위에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독립과 그 독립을 성취시켜줄 이스라엘의 왕을 기대했었지만 예수님은 물리적인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이 땅 위에 새로이 선포하신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좌정하시고 군림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들이 기대했던 나라가 서로 상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으로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선포하신 그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을 제일 처음 기록한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왕으로 좌정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핵심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지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빛과 소금의 의미를 생각을 해 본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착한 행실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성실하게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행실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잠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는데.. 행실의 착하고 착하지 않고를 판단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인 나라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는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법은 바로 율법이었고요.. 따라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의미를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주신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기준에서도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착한 행실이 꼭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선하다고만 말을 할 수는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착하다는 것 자체를 정의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경향들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마 5:16절의 착한 행실을 이해를 할 때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과 입장에서 착한 행실을 이야기 한다는 부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명령을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지키면서 사는 것을 의미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 또는 천국 시민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후에 이야기 되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보시면 알겠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학자들이 율법을 해석하던 방법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도전을 하십니다. 산상수훈에도 예수님이 율법을 당시의 전통과는 다르게 해석을 하시는 장면들이 몇 몇 나오는데 아마도 이러한 예수님의 해석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때까지의 율법을 폐핫고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서 예수님이 예수님의 율법관을 딱 잘라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존의 율법을 폐하고 없애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으시고 온전케 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20절의 내용이 상당히 인상깊은데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의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몇 몇 바리새인들에게는 가식적인 부분들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만 전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를 매우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혹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를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그랬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이유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이야기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암튼 각설 하고..

마 5:19절은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이 부분은 행함과 가르침에 있어서 율법을 준하고 따르는 것이 마치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마 5:16절에 그런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 따라서 가르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율법에 나와 있는 것을 지키면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지 못하지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율법을 지키면서 율법을 지켰을 때 율법이 주는 유익과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등을 모두 경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율법의 진정한 정수를 알 수가 있지요. 그냥 머리로만 알아서는 이런 깊이 있는 내용은 나오지 않거든요.

하지만 꼭 가르치기 위해서만 율법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어상으로 보았을 때 행한다는 동사와 가르친다는 동사가 둘 다 subjunctive동사이고 이 두 동사는 kai(그리스어로 and를 뜻함)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부속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두 동사가 같은 중요성을 가지는 동사들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더 정확한 해석은 "누구든지 이를 행하고 그리고 가르치는 자는"으로 바꿔서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율법을 행하는 것이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사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르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 5:20절의 부분을 읽어보면 언뜻 생각을 하기에 우리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많은 율법을 더 열심히 지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건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해하셨던 율법과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율법과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취했던 방법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방법으로 의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이.. 항상 하나님이 저한테 기대하신 것을 제가 쫓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괴롭네요.. 오늘의 Q.T. 내용도.. 결국 열심히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과연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았는지를 돌아볼 때.. 부끄러움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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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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