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는 초기 형태 사도시대나 속사도, 혹은 교부시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월만큼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신학적 발전이나 사회의 변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영적, 지적 각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기본적인 속내와는 다르게 그 형태와 모습이 천차만별이고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예배의 종류를 살펴 보는 것으로 부족하나마 예배의 중요성과 속성 이해의 전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크게 예배를 구분 짓는 속성을 기반으로 세부 종류를 나누고자 한다.


I. 예배 신학적 차이로 본 예배의 종류

기독교는 2천년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는 통일성을, 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태와 그 신학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혼돈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모든 기독교의 예배하는 공동체가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적인 고백으로 삼는 통일성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교회만이 갖는 고유한 신앙고백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 예로써 루터교회는 자신들의 신조를 정리한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장로교의 뿌리인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영국국교회(성공회)는 '39개 신조'(the Anglican Thirty-Nine Articles)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그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나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예배의 핵심은 한결같이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인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그 기본적인 뜻에서는 일치한다 할 수 있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조의 정신에 따라 그 의미의 해석과 집례의 형태들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달라지고 있는 현상은 치열한 교파간의 경쟁과 싸움이 종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제는 예배의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감을 갖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점을 기독교 예배의 다양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각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대단원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하케 한다. 그 결과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건전한 신앙고백과 역사적 전통을 유지해온 뿌리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고유한 예배 전통과 유산들을 서로 함께 나누고 교류하려는 경향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발견된다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 기독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각 교회들의 예배신학에 서로가 주의 깊게 경청하는 태도는 기독교 예배의 일치와 다양성을 발전시키는데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정교회의 예배신학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가토릭 교회의 예배신학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3. 루터교회의 예배신학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해보자.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4.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예배신학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5.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예배신학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명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6. 침례교회의 예배신학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재침례 교회 예배신학

재세례파는 교회를 신자들(believing disciples)의 근본적인 몸으로 본다.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의 발로가 곧 예배이며, 예배는 단순하고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는 믿음의 공동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또한 우리를 위해 인류의 역사를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또한 예배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맛보고 즐기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력소들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 간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곧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장소이며, 우리의 다양한 삶의 현장들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재세례파들은 믿음의 소망(faith-vision)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예배형태가 규정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비전은 거의 5백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메노나이트, 형제단(Brethren),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와 몇몇 침례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다른 교파의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재세례파만의 독특한 점은 다음 아래의 내용들에서 볼 수 있다.
1) 성경의 권위-신조나 법전으로서가 아닌 믿고 복종해야 할 이야기로서 이 성경은 우리 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2)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유아세례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과 이 웃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신자의 침례(Baptism of believers)만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앞과 믿음의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헌신을 결단한다.
3) 거듭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변화된 공동체의 모임이며 이들은 교회의 몸을 이 루는 다른 지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의 개인주의 는 용납될 수 없다.
4) 삶속에서의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고 따르는 제자된 삶을 살아야 한다.
5) 사랑의 윤리- 삶의 모든 관계속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마음과 의를 구하고 평화를 도모하며 화해의 관계를 유지하며, 낭비를 금하고, 검소하게 살며 환경을 소중 히 여기며 믿음을 나누고 신뢰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세례파의 예배에서 이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한 뜻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의 목적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위에서 기술한 믿음의 고백대로 삶의 모든 부분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믿음안에서의 삶으로 재다짐케 하는데 있다.

8. 퀘이커 교회 예배신학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거하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관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 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 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 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 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 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 디 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 감리교(Wesleyan)의 예배신학

웨슬리의 예전 신학은 예배를 공적인 행위이상으로 정의하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배는 삶 전체,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소명과 관계한다. 신자들은 계속해서 행위와 사고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현실화시킨다. 존 웨슬리가 묘사했듯이,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믿음-새로 태어난 영혼의 눈-은 이 사랑을 이해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을 모방하고 경배하도록 우리가 이끌려지듯이, 우리를 예배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전통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전과 개인적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충만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 이상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는 묵상이며, 경배이다. 웨슬리가 말했듯이,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대면으로 인도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배와 헌신의 의미는 가장 초기부터 감리교 예배를 특징짓는 찬송의 표현속에서 발견된다. 찰스 웨슬리는 감리교 교리를 시와 가락으로 설정하는데 그의 신학적 활동의 온 힘을 기울였다.
예배는 예배자들에게서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하는 구원의 전 드라마를 일으키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도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서 정통해 있었고, 대체로 예배의 예전 형식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바나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에게 선교한 젊은 선교사 죠지아(Georgia)는 동방 정교회의 예전 텍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본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개정했다. 감리교의 부흥 절정기 때,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능하면 자주, 가급적 매일(그는 개인적으로 평균 일주일에 다섯 번의 성찬식을 받았다) 성찬식에 참석하라고 권고했으며 그는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성공회의 기도서를 추천했고, 그것의 개정편집을 미국 감리교도의 주일예배에서 사용토록 제공했다. 웨슬리는 어떤 것도 소홀히 될 수 없는 예배의 외적 형식과 그것의 내적 힘을 구별했다. 그는 신자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소홀히 취급하면서, 예배의 외적 형식을 지키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비판했다. 이들에게 웨슬리는 "참된 종교는 예배의 형식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예배 예전을 별로 중요치 않게 만드는 "영적 예배"를 주장하는 신자들을 비판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재하는 성령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Works, vol. 1, 532) 이들에게 웨슬리는 예배란 우리의 전인격과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예배란 소그룹의 양육, 금식, 성경읽기, 성만찬, 공적이고 개인적인 기도를 포함하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훈련 용어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여러 의식들과 예전들이 남용될 수 있지만, 그는 "남용이 제거되도록 하고 그 용도는 남게 하라. 이제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것들을 끊임없이 너의 영혼을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 속으로 갱신시키는데 사용하라."고 주장했다.(Works, vol. 1, 545). 이 외적 형식과 내적 힘의 연합이 웨슬리로 하여금 예전적 형식주의와 형식없는 주관주의 사이를 분리하여 유기적인 예배신학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하나님 임재의 객관적 실재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회중들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나아가는 것이다.

10.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교회의 예배신학

미국내 흑인들의 예배는 깊은 억압과 자유를 향한 애타는 갈망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를 통하여 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경험하며 나아가 죄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얻게 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소외되고 억압된 사회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공통된 욕구와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용서와 신실하심, 그리고 억압의 사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능을 부여받기를 간구한다. 중생한 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들의 예배는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코이노니아의 장인 예배를 위해 모이고,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세상속으로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미국내 흑인 기독교는 두 죵류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카 흑인 개신교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아메리카 흑인 회중교회가 그것이며, 또한 단일 교단으로서 로마 가톨릭과 수 많은 크고 작은 분파들이 있다. 그렇기에 아메리카 흑인 기독교인들은 같은 통일성 아래 다양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예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기 다른 교단내의 다양한 예배 형태로 인해 미국내 흑인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예배를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을 진부한 행위로 치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메리카 흑인"(African-American)이라고 불리는 미국내 흑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예배를 다루고자 한다. "아메리카 흑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화속에서 그들이 간직해온 아프리카의 고유한 유산과 미국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는 아프리카 흑인, 미국계 흑인 그리고 유대 기독교 신앙 전통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강제로 이주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이들은 삶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삶의 시각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친근한 사랑으로 그들속에 다가오시어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서 함께하심을 함께 이야기하며 나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배는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욕구와 기쁨, 갈등,그리고 희망 등, 그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된 삶의 욕구들을 발산한다. 주일의 공적인 예배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마련된다. 또한 이들의 예배 분위기는 삶 속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들을 간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심지어 예배의 형태와 의식에도 변화를 끼치는 요인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감사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적인 체험들은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곳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기본적인 예배의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상황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나 주시며 성령님에 의해 마음문이 열리고 억눌린 영이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기 전일지라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예배에서 보게되는 "자유양식(liberation key)"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유양식은 과거 노예제도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은밀히 조직된 '덤불 은신처'의 분위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자유양식'은 미국으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마음속에서 처음 발견되고 타올랐으며 지금도 흑인 복음송과 운율 찬송가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본성은 따로 구별된 예배 처소를 원했던 초기 전통 신학자들의 아프리카 원시 세계관에서 분명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게 되며,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신앙의 고백을 표현하고 찬양으로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교파간의 차이로 인해 유일하면서도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낼 때에도 미국의 흑인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자유케 된 그의 백성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과 '말한 대로 살자'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11.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예배신학

예배신학의 회복은 그리스도와 성경만을 위해 과거의 전통과 신조를 거부함으로 일어났다. 결국, 예배에 대한 모든 생각은 이 전제로부터 형성되어진 것이다. 예배 회복운동의 신학을 연구하고자 한 예배관련 서적과, 교회의 중심된 행위로서 대두된 예배의 신학을 토론하고자 한 노력들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로 예배 회복운동의 흐름들을 한정하려 했다. 그들은 '신학'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만약 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이야기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입장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배 회복운동의 경종을 울렸던 유명한 투쟁은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신앙의 변증들을 신자의 자격과 안수, 혹은 이 둘 모두를 결정하는 시험으로서 사용했다. 건전한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은 받아들여졌고,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추방되었다. 회복운동의 창시자들은 이러한 신학의 오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들의 후예들도 '신학'은 피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이렇듯 반지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신학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했다.
제자 교회들은 그들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회원이 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 정통적인 자격 시험인 신학의 사용을 계속해서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과의 대화를 위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명료화하기 위한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신학의 목적은 신앙의 내용들을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교회에 입교하고자 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며 그분을 당신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이것은 비록 쉽게 풀어서 썼지만, 이 질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거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마16:16) 위와 같은 신앙고백은 매우 단순한 고백이다. 두번째 물음에서 '당신의'라는 단어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에 따라오는 개인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신학적인 중요한 또다른 물음을 대두시킨다. 비록 이 글이 기독론에 관련된 중요한 물음을 연구하는 글은 아니지만, 윌리암 R. 바(William Barr)는 이 주제를 연구한 훌륭한 책인 "제자들의 전통에서의 기독론: 하나의 평가와 제안"이 있는데, 이것은 캐넷 로랜스(Kenneth Lawrence)가 편집한 "Classic Themes of Disciples Theology"에 실려있다.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자'라고 한다면, "그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죄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는가?"하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리의 희망이며 인생인가?" 만약 우리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예수는 인간이며, 어떤 방법으로 신이신가? 하는 것이다. M. 유진 보링(M. Eugene Boring)의 마가복음 연구인 'Truly Human/Truly Divine(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하나님)은 위와 같은 물음들을 오늘날의 제자회의 빛 아래서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어떤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스톤 캠벨(Stone-Campbell)의 회복운동으로부터 연유된 모든 분파들 중에, 성서에서 발견된 이 권위, 즉 "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것은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외침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각기 다른 지류들은 성경이 어떻게 연구되고,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12. 오순절계열(Holiness-Pentecostal)교회의 예배신학

이들 예배에 있어의 중요한 요소는 찬양이다. 찬양이란, 노래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경배요 증거인 것이다. 예배에서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사역들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찬양한다. 오순절 교회의 회중들에게 있어 예배의 초점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집회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찬양중에 거하시는" 분(시22:3)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합당한 찬양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해 약속된 자유함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다른 말들 즉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와 "모든 것을 적당히 하게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의 말씀대로 어떤 정해진 형태를 갖고 있는 다양한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이 기존 교회들의 냉담하고 형식화된 듯한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자의로 기존 교회들을 떠났든지, 혹은 떠날 것을 종용 받았던지 간에, 예전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언을 말하고(행2:4) 다른 영적 은사들-적어도 오순절 교리 중 이 부분의 지조격인 챨스 파햄(Charles Parham)에 따른-을 동반한 그들 자신의 성령 세례에 대한 열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공적 모임에서 비슷한 영적인 열렬함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실 일을 와서 보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시34:8)의 말씀과 함께 공공연한 초대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함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의 요구가 충족되는 예전들을 무의식적으로 발전시켰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창의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오순절 교회의 음악은 대중문화의 음악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즉 복음성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나는 지치고, 야윈, 그리고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예수께 왔었다오. 그런데 그가 나의 죄들을 없애 주셨소", "십자가에 달리신 내 주님을 모시지 않으채, 허영과 교만속에서 내가 보낸 수 많은 나날들이여"와 같은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성가곡들은 성경말씀에서 인용되었는데,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장)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시34장)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경배의 노래들, 그리고 초대와 선교적이고 복음적이고 그리고 부흥에 관계된 노래들, 그리고 계절에 의한 찬송가들은 모두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서 자유롭게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성령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오 주님, 지금 권능을 보내소서", "예수여 오셔서 지금 나를 채우소서", "오순절의 불이 떨어지고 있으니, 내개 부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라"와 같은 새로운 찬양들과 성가곡들이 쓰여졌다.
악기들은 당연히 찬양보다는 덜 중요하긴 했지만 보통 노래를 위한 반주로써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구세군의 금관 악기와 북들, 피아노와 오르간, 드럼, 탬버린, 그리고 키타와 같은 모든 것들이 대중 음악적인 표현 방식에서 수용되었다. 젊은 예배자들이 맨 먼저 현대적인 양식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수정하였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수용가능한 방식들로 예배에 통합시켰다. 회중을 교화시키는 것 그 이상으로 오순절 음악에 있어서 심미적이란 것은 없다. 대중 기도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진실성을 가라 앉히기 위한 어떠한 억제도 없이 오직 회중에 행하는 개인 기도에 불과하다. 열렬함과 자발성은 오순절 기도의 특징들이다. 오순절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서화된 기도들은 열등하며 비영적인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여 직접 지시받기 때문에 대중기도에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개인적인 문제들이 언급되어 질 수 있다. 또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님의 중재하심에 의해 인도될 때에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역시 기도 내용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만약 기도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도록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괜찮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기도자를 직접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 안에서의"기도란 단순히 예배자들의 언어에서 성령님께 향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 보통 방언이라고 불리우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형식들로 일어나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듣고자 할 때 예배자들의 언어로 통역이 뒤따르는 방언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통역도 추구되거나 기대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후자의 사용은 때때로 한 개인의 "기도언어"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고전14:4)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한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하게 기도하시는 분이시기에(롬8:26-27) 인간의 모든 장애들을 초월하는 중재의 일종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언들 역시 독특한 기도의 행위들인데, 이것들은 모임중에서 누군가가 예배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고전14:3) 짧은 메시지들이지만, 그러나 방언 언어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13. 은사중심(A Charisma) 교회의 예배신학

성령님의 은사를 중심한 예배의 신학은 성령님과의 생생한 관계와 그리고 영적인 은사들의 회복을 강조하는데, 이 둘 모두는 예배에서 경험되어지는 것들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5:18-20)
은사주의 운동은 주로 성령님과 성령님의 선물들인 카리스마(즉 치유,예언, 기적, 방언, 기타등등)의 회복에 대한 강조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운동이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점들 중의 하나는 예배에 관계된 것일 것이다. 비록 정확하게 은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은, 하나의 주된 증거에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즉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는 우리의 입술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감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성령님의 역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요16:14),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과의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깊어 가는 결과를 가져온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사주의파"라는 말을 떠올릴 때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거룩해진 얼굴과 손을 높이든 열광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열광적인 신앙과 몰입하는 기쁨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노래들, 성가곡들, 기타와 드럼, 박수와 춤, 예배 스탭들과 깃발, 악보와 O.H.P들, 예배 세미나와 그에 관계된 각종 회의 같은 것들이 교회에 등장하게 하였다. 왜 이러한 고정관념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은사주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인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 운동은 많은 다른 교파들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은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가톨릭 은사주의 운동은 아마도 모든 면에 있어서 침례교 은사운동과 동일한 신학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다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더욱 풍성케 하시는 성령님을 충만히 경험하게 되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주의 운동의 예배 형태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의 예배 유형의 다섯 가지 원칙들과 그들의 신학적인 기반들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은사주의의 다섯 가지 원칙은 첫째, 성령님의 중재하시는 현존은 예배자들의 성직자로서의 기능들을 활력있게 하신다. 둘째, 예배는 영과 혼과 몸의 전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의 행위는 명백한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리고 다섯째, 예배는 노래 이상의 것으로서 예배는 '섬김'인 것이다.

14. 열린 예배

4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과 예전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빈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런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개신교회는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도 그 노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열린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 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예배라면, 이것은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는 전도집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에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이라고 하는 예배학자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가 다분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열린 예배는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열린 예배의 본질과 그 방향성에 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배는 결코 회중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II. 절기에 따른 분류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 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III. 예배의 진행과 관점에 따른 분류


예배의 갱신은 예배 순서 몇 가지를 집어넣고 빼고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거기에 기초한 예배갱신의 원리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예배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순서를 정할 때에 비로소 좋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갱신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할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예배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1. 구어적(口語的)인 예배냐 상징적인 예배냐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지나치게 '듣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개신교 예배가 소위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 중요도에 있어서나 시간의 분량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 이외의 순서도 대부분 '구어'(spoken word)에 의존하여 있다. 한국 개신교 예배는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배가 '구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행될 때 과연 '하나님,'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등의 영적인 실재들이 설교를 포함한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예배에 참가하고 있는 회중이 과연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들 영적 실재들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예배의 표현양식이 언어를 통한 청각적 차원에만 의존할 때에 그만큼 예배의 풍부함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여질 수도 있다. 시각적 보조물을 사용하는 것은 복음선포에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후각, 미각은 물론 촉각까지도 사용하는 다차원의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중은 말하고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5감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현존을 더 풍성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구어적 차원뿐만 아니라 비 구어적 차원을 또한 회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예배를 보다 더 상징적이고(symbolic) 은유적이고(metaphoric) 시적(poetic)인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며, 그 예배가 영적인 실재들에 관해 풍부함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될 것이다.

2. 산만한 예배냐 진행감 있는 예배냐
예배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군더더기나 어색함이 없이 매끈하고 진행감(sense of progre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요소들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하고, 이 선택된 요소들은 논리적이고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논리적 배열과 진행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순서들이 예배 순서 중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명백한 지시는 성서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위탁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행위 즉 헌신의 다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설교 직후에 오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이다. 그 외에도 앉고 일어서는 동작, 눈을 뜨고 감는 순서 등은 예배학적인 고려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이 우리의 예배를 매끄러운 흐름과 진행감 있는 예배로 만들어 줄 것이다.

3. 초점이 흐려진 예배냐 초점이 뚜렷한 예배냐
좋은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배는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의 모든 순서는 이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도록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은 이와 거리가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설교의 주제가 예배의 주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은 예배의 현실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설교자의 의도가 예배 인도자와 기도자 그리고 성가대에게 미리 전달되지 않고, 따라서 각 참여자들이 제각각의 주제와 관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즉흥적 기도냐 쓰여진 기도냐
예배는 단순히 예배집을 읽거나 주보를 따라 그대로 훑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배 공동체가 기도할 때에 누구의 목소리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대표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것을 듣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창형식(unison)이 되어야 하는가? 또, 기도는 쓰여진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공 예배에서는 목사가 기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평신도 지도자도 기도할 수 있는가? 주중의 기도회에서 행해지는 기도는 주일 공 예배에서 되어지는 기도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한다.
특히 쓰여진 기도냐 아니면 즉흥적인 기도냐의 문제는 예배학에서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기도는 인쇄된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겨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여야 하는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교단적 차원의 예배집에 인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자가 개인적으로 미리 준비한 것을 읽는 것인가? 만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즉흥적인 것만이 성령의 역사인가? 이런 질문들은 매우 첨예한 토론의 주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쓰여진 기도문은 이미 3세기초의 것부터 발견된다. 물론 이때에 예배를 인도하고 회중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은 감독(bishop)이었다. 예배에서 그가 기도할 때에는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읽되, 본인이 원하면 쓰여진 그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량권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재량권이었다. 감독이 비록 자신의 언어로 기도한다 하더라도 주어진 기도문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4세기를 넘어오면서 기도문은 쓰여진 채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즉흥적으로 하는 기도는 16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어 일부 개신교회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5. 전통적인 예배냐 토착적인 예배냐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함께 가져야 한다.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천 년 동안 예배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것이 '기독교의' 예배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전통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이야말로 모든 교회의 예배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유산을 포함하고 있음을 현대교회는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초대교회의 전통들을 예배에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는 현대 교회들의 예배에서 회복된 '성만찬 기도'이다. 4세기에 사용되었던 성 바질(St. Basil)의 성만찬 기도는 성공회의 성만찬 기도 D로, 그리고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V로 부활되었으며, 로마 카토릭의 성만찬 기도 II는 3세기초에 로마에서 씌여진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나오는 성만찬 기도의 부활이다. 이외에도 미국 연합감리교회나 미국 장로교회 등 많은 개신교회들은 성만찬 기도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요소들을 대거 포함시킨 성만찬 기도를 만들어서 예배에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회복한 또 다른 예는 바로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을 이룬 이상적이고 성서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말씀을 약화시키고 성례전만을 강조하였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례전을 약화시키고 말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개신교회들이 1년에 단 몇 차례의 성례전을 거행하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려온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씀과 성례전'으로 구성된 초대교회의 예배전통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많은 개신교회들이 성만찬을 매주일 예배의 정규순서로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던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6. 짜여진 예배냐 융통성 있는 예배냐
바람직한 예배를 위한 두 번째 원리는 계획성과 융통성의 적절한 배합이다. 예배는 정교하게 계획되고 짜여져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하나의 연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예배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예배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목회자와 회중에게 공히 각인된 것은, '예배란 설교를 듣는 것'이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다보니 목사는 목사대로 자기가 할 설교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또한 회중은 회중대로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잘하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다른 순서들은 장식물이나 보조순서로 전락된다. 이것은 결코 좋은 예배라 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교회는 한 주간에도 여러 번 드리는 예배의 홍수 속에서 목회자와 회중이 모두 단지 습관적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모습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엄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매번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점검되어져야 하며,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융통성은 예배가 인간의 차원을 넘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 계획되고 준비된 예배라고 하더라도 실제 예배의 상황에서는 보다 더 좋은 선택을 위하여 이미 계획된 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예컨대 찬송가는 꼭 정해진 것만 불러야 한다거나, 아니면 찬송을 부를 때에 반드시 1절부터 4절까지 책에 있는 그대로 불러야만 한다는 생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바꾸어 부를 수도 있으며, 1절부터 4절까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다. 또 1절 혹은 3절만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떼제(Taize) 공동체는 짧은 찬송가를 수십 번씩 반복하여 부르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 몇 번을 부를 것인가는 그때그때 결정한다. 이렇게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 성령께 의지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참여할 때에 단조롭지 않고 역동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인도자이다. 물론 회중과 인도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융통성이라고 하는 여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배 인도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영적으로 민감하여야 하며, 순간순간 성령에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7. 구경하는 회중이냐 참여하는 회중이냐
예배의 일차적인 요소는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의 행위였으며 성직자들이나 기타 인도자들만의 예배가 아니었다. 아무리 앞에서 열심히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여도 회중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회중이다. 회중이 누구냐에 따라 예배가 달라진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에 경험한 바에 의하면, 뉴욕의 같은 길 위에 위치해 있는 같은 교회라 하더라도 한인들의 교회와 남미인들의 교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예배를 보여준다. 한인들의 교회는 전형적인 한국의 개신교회들처럼 '점잖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반면에, 남미인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찬송을 부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예배에서 회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회중이다. 회중이 얼마나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예배갱신을 위해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IV. 기타 분류

1. 시간에 따른 분류
새벽 예배: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새벽기도회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는 365일 예배적 자세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자세로 이해된다.
수요 예배: 흔히 3일 예배나 기도 예배로 불린다.
금요 예배: 보통 철야기도회를 겸하고 있다.
주일 예배: 대예배 혹은 정식예배로 불리지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전 성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 듯하다. 대예배 소예배 이런 것은 예배학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메인 기능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예배: 원래는 저녁예배였으나 최근 오후로 많이 변하는 추세다.
주일 저녁 예배: 산업화 다원화되면서 저녁예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규모에 따른 분류
가정 예배 : 보통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족 중심 예배다.
구역 예배 : 주중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작은 구성으로 구역별로 이루어진다.
회중 예배 : 주일 혹은 약속된 날에 전 성도가 모이는 것을 말한다.
연합 예배 : 개 교회보다는 지역 교회가 연합한 대형 예배를 말한다.

3. 특별 예배
헌당 예배, 목사 안수 예배, 결혼 예배, 장례 예배, 개업 예배, 졸업 예배, 입학 예배, 득남, 득녀 예배, 파송(여기에도 여러종류가 포함된다) 예배, 기타 감사 예배, 부흥 예배, 찬양 예배, 기도 예배, 서원 예배 등 다양한 예배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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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cm.or.kr/ myrode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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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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