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큼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동시에 구원만큼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구원만큼 사람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주제도 없다. 이런 딜레마를 잘 이해하고 있는, 세계적인 신학자의 반열에 들어있는 저자는 견고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성경의 구원론을 설명하고 있다.

전체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쉽고도 명쾌한 접근으로 기독교 구원의 절대성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평신도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된다. 저자는 먼저 구원받아야 할 이유,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이유 등을 제시한 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왜 구원의 사건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 있으며 그 증상이 바로 악과 고난에 시달리는 인간의 조건임을 밝히면서, 그 죽음의 증상에서 해방되는 구원은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와야 함을 변증한다. 즉 인간 밖에 있으며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구원의 절대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특히 구원의 세 가지 시제에 대해 언급하며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제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며 제자도의 윤리가 거기서 어떻게 파생되는지,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이 어떠한 삶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통해 비기독교인은 왜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 구원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고, 기독교인은 그 믿음에 깨달음을 더하여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차례

1.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3.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인 범주들
5.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
6. 구원의 종말론적인 구조
7. 예정과 지키심

1장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구원(redemption)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인 채 짓눌려 있습니다. 이런 악과 고난들은 죽음의 증상들로 대개 인간이 겪는 최대의 악이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악과 고난에 짓눌려 있는 인생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것처럼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는, 또는 죽음의 ‘병균’에 의해 점령당하여 가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서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과 그 증상들인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예컨대 우리가 감기에 걸리듯, 그 증상들인 악과 고난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왜 죽음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죽음’(롬 6:23)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반드시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죄를 지으면 죽음이 주어집니까?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전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영위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내가 나의 지혜와 사랑보다 셀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사랑에 진정으로 의존한다면, 나의 불완전한 지혜와 사랑이 제시하는 서쪽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동쪽 길을 택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의존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없는 의존은 가짜 의존이며, 그것은 또한 미신의 한 특징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해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로 자기 생명의 창조주인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분리된 뿌리 뽑힌 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제한된 자원에 의해 얼마 동안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원의 제한성 때문에 영원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한 시간을 살아가다가 자원의 공급이 떨어지면 존재는 고난으로 얼룩지고, 말라 비틀어지는 풀 한 포기처럼 10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마치고 나면 무덤에 묻히고 맙니다. 그 짧은 인생 동안 한 시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제한된 지혜와, 무슨 일이 일어난들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없는 제한된 힘과, 이웃에 대한 극히 제한된 사랑 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태초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것들(하나님의 자원)을 풍족히 즐기며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신 선한 의지(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저버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악과 고난만을 가져다주는 사탄에게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불신과 불순종의 동기는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였습니다. ‘인본주의’ 곧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라 선포하고 인간성을 만물의 척도로 삼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고취하는 사상은 바로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유혹했던 뱀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 인간은 삼중적인 소외에 빠지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불안과 증오 속에서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한다든지, 다른 사람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싸우고 죽이고 하는 모든 악과 고난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100년 후에 올 죽음이 미리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죽음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닫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어서 자기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모든 악과 고난의 사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된 인간은 자원의 빈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서는 자신의 자원을 늘릴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빼앗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굴종시켜 그들의 자원으로 자신을 섬기도록 하여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치열한 생존 경쟁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 곧 금수의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과 그로 인한 고난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데,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다툼으로 빚어지는 인간 사회의 갈등과 고난은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나타나고, 크게는 세계대전으로까지 나타나 수천만이 살상되기도 합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이러한 악과 고난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2장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자원으로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고 영위할 수 있다면 구원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악과 고난이 발생하는 것이며, 그 악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한된 자원 때문에 일어나는 악과 고난을 우리의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 예컨대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들뿐만 아니라 유사 종교 가령 마르크스주의나 인류 문명에 대한 낙관론 같은 것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스스로 종교심을 발휘하거나 수양을 잘하면, 또는 선한 행위를 많이 하고 업적을 쌓으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인간의 힘과 지혜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최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기술은 인간을 최대로 ‘파멸’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인간의 계발된 지성 혹은 인간의 계발된 지혜가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죄악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그것이 완전할 때에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우주 밖에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힘이 와야 합니다. 우리 밖의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부터 우리를 위해 오는 것이어야만, 즉 오직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3장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됩니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살펴볼 때, 이 세 단계를 통하여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스스로 자기가 구원자임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헛된 것 같았으나 예수의 부활에 의해 그 가르침이 옳았음이 확인되어, 부활은 예수가 구원자임을 확인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한 마디로 잘 요약되어 있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낼 때 사용하신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한 연구가 최근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독특한 표현으로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그(The)’라는 관사를 붙여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하나의 칭호로 만든 것입니다. 다니엘 7장 13절과 시편 8편, 에스겔서 등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오는 한 분을 보았는데, 그분이 ‘사람의 아들’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점에서 신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름은 오직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만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 하시고 종말에 구름을 타고 천사를 동반하고 와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이로 나타난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분명 다니엘 7장 13절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신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로 다니엘의 환상 과 이사야나 예레미아서를 통해서 예언된 대로 죄인들을 위해 ‘대신적이고 대표적인 죽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이루고 새 언약을 세워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을 창조하고 대표하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처럼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가?", "모든 종교는 결국 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고, 단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만 가치를 갖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 밖의 초월자가 직접 개입한 창조의 사건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태에 생명을 주었으므로 창조의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초월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같은 기타 다른 종교들의 모든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사건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종교의 내용들은 인간의 지혜로 깨달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에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이 예수님이 곧 우리를 위한 구원자라고 선언하셨으므로, 유독 이 사건만이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그 구원이 오늘 여기에 사는 나에게도 효력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믿는 한편, 오직 이 사건만이 구원의 사건이지 다른 종교들에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늘 아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고 선포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행 4:12).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자로, 예수님의 죽음을 곧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의 그 구원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절대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장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신약 성경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에 나타난 구원을 구약의 배경 속에서 구약의 구속 방법을 이용하여, 네 가지 중요한 그림 언어(metaphors)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제사

구약 성경에 제시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방법으로 1년에 한 번씩 구속의 날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언약궤를 덮는 시은좌에 속죄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1년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이 구약의 속죄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구원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므로 십자가에서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2. 화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결과로 일어난 것이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더 이상 갈등하지 않는 친구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 속에서 온 그림 언어로서, ‘화해’의 결과 평화가 일어났습니다.

3. 구속

구속이란 말은 노예 시장에서 온 그림 언어입니다. 죄의 노예된 우리를 예수께서 대가를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 즉 몸값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속의 결과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4. 새 언약

새 언약이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영원히 내 것으로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여러 그림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다룬 것은 내 밖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라고 합니다.

5장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이 장에서는 2천 년 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이 어떻게 오늘 우리 각자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문제를 다룹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업적이나 선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데, 믿음이 이 구원을 받는 꼭 필요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조건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논의를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 21-26).

믿음의 본질적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고 선포된 복음을 진리로 믿어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리의 대신이고 대표적인 죽음(‘내포적 대신’)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내용을 극화한 것이 세례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세례에 의해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킴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됨됨(What he is)에 참예하고 그리스도가 하신 일(what he has done)에 참예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이 됩니다. 이것이 곧 ‘주관적 구원 사건’입니다.

이 ‘주관적 구원 사건’을 네 가지 그림 언어로 표시한 것이 (1)의인 됨(justification), (2)화해(reconciliation), (3)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4)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등입니다. 이러한 그림 언어들로 표시하려 한 구원의 실재는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서 갇혀 죽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씀으로써 신적인 삶에 참예하는 삶입니다.

6장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이미 - 그러나 아직”

구원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 세 가지 시제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종말론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는 세상’, 즉 구원의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는 사탄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을 꺾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주’라는 선포가 울려 퍼지고 사탄의 등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등뼈가 부러진 사탄은 아직 사지에 힘이 많이 남아서 남은 힘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걸고 넘어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까지 악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탄은 언제 꼼짝 못하게 됩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사탄을 당신의 발등상(발판)으로 삼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25). 그때 사탄의 사지에 힘이 빠져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정적인 구원은 이 구원의 첫 열매에 해당되며, 구원의 완성, 즉 완성된 추수를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첫 열매가 주어졌다는 것을 대변할 뿐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꼭 받으리라는 보증 역할을 하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구원의 첫 열매요 보증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으면 곧 구원의 완성까지 받게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기쁨과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한 사람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며 삽니다. 이제는 세상의 정신에 순종해서 사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며 ‘제자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믿음으로 동참한 것의 실재화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 실재화된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옛 아담적인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새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자기 부인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고 그의 죽음에 하나 되게 하는  제자도의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날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이 우리의 썩어 가는 몸에 나타나 날로 새로워지고 강건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하며, 구원의 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성화의 과정 곧 십자가를 지고 겉사람이 죽어 가며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이 종결지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완전히 참예하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영광된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이며, 구원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어 불안할 때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하면 지혜를 얻고, 능력이 없어 두려울 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심지어 칠십 평생을 죄악의 세상에서 살다가 우리의 아담적인 몸이 죽어 갈 때도 우리 몸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7장 예정과 지키심

‘예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예정 교리의 그 오묘함이 완전히 도치되어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교리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정의 교리는 성경적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위안을 가져다줍니다.

‘예정’이란 시간적 개념으로 볼 때 태초를 논하는 것이지만, ‘예정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구약의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 계시였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신약의 사도들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되돌아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계시가 가장 환합니다. 이쪽은 태초요, 저쪽은 종말인데 중간의 불빛이 양쪽으로 멀리 비췰수록 희미해집니다. 이 희미한 종말과 태초에 대한 계시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뜯어 맞추어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지혜로 자꾸 헤아리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 희미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믿음과 우리 구원에 충분합니다. 현재 희미하게나마 나타난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정 교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의 현재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서 되돌아보면, 내가 믿는 순간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 자신이 결단한 듯했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도록 성령께서 미리 역사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른바 예정된 은혜(prevenient grace), 즉 믿음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정 교리를 태초의 시점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나 직접 예정 받아서 구원받은 것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어 늘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 예정의 교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이와 같이 예정의 교리는 태초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늘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믿음의 현재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내가 복음을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이면 빛에 속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또한 예정의 교리는 교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믿음의 미래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태초에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그 신실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그 계획을 끝까지 성취하시기 위해 나를 지탱하시고 지키셔서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나를 붙드실 것이라는 구원의 확신과 위안을 가져다주는 교리입니다. 로마서 8장에는 이 예정론의 중요한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고난이 아무리 크다해도 이 모든 고난을 정복하고 이기는 승리자가 될 뿐 아니라 승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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