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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부활
연구 발표 : 정일오 목사
< 서론 >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다. 그러나 두 제자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 자기들과 함께 걸어가신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눅24:17-24을 읽어 보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24:25-27을 보라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본문에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은 부활을 포함한 승천과 재림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분명히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근거로하여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다.
눅24:45-48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하시면서 먼저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고 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도록 명령을 하신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는데 그 성경은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에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찾아 설명하여 주심으로써 자기의 부활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렇게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메시아의 고난은 구약에 자주 거론되어 있는 반면에, 메시아의 부활은 자주 거론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 논고를 통하여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부활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
구약에 나타난 성도들의 부활을 가리키는 구절들은 사26:19과 호6:2 등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부활은 어디에 예고되어 있는가?
< 본론 >
편의상 우선 메시아의 부활이 예표론적으로 예고된 구절이나 사건들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직간접으로 메시아의 부활을 예고한 구절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예표론적으로 예언된 메시아의 부활
1) 창세기 22장
창 22:2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험임을 시사한다. '가서'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12:1의 '가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방 땅으로부터 그를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사실 모리아산까지 나아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이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자리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그곳이 그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일 것이리라.
동시에 창 22:2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와 이삭의 동일시가 나타나 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자(예수)를 연상케 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사랑하는 독자였던 것처럼, 하나님에게 예수 역시 사랑하는 독자였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8)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하나의 신앙이요, 예언이요, 기도였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이삭을 바쳤다가 도로 산채로 받았다는 것은 위의 본문에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예표적 사건이다. 13절에서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숫양을 대신 잡아 제물로 드렸고, 이삭은 죽임을 당할 자리에서 생명을 되돌려 받아 살아나게 되었다. 모세는 이삭의 사건으로부터 장차 예수께서 어린 양으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구약의 제사제도를 설정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했을 때, 이삭은 사실상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결국은 숫양이 대신 죽고 이삭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하였을 때 '그의 살아남'은 '메시아의 살아남'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미하게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유월절기 중 초실절
출 12:1-28에 첫 유월절 지키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 14일 저녁, 즉 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린 양을 잡아 불에 구어 먹었고 그 밤에 유월절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유월절 그 날부터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지시하고 있다. 사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떡으로 누룩을 넣으면 발교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급히 나와야 했으므로 발교된 떡을 먹을 여유가 없었다.
민 28:16-25에는 유월절에 제사 드리는 절차가 나타나 있다. 본문에는 14일이 유월절이고 15일부터 7일간이 무교절기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즉 유월절과 무교절기를 합하여 8일간 지키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유월절을 포함한 모든 무교절기가 7일이다(참고. 신 16:1-8).
레 23:4-14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기 사이에 초실절이 들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가나안 입성을 내어다 보면서 목축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될 것을 계산하여 첫 이삭을 흔들어 바치도록 한 것이다. 사실상 이 날(초실절)부터 오순절기의 계산이 시작된다.
레 23:10-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유월절 다음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쉬고, 그 다음 날은 안식 후 첫날로써 첫 이삭을 흔들어 바치는 날이다. 위의 레 23:10-12을 다시 보라.
유월절에 어린양이 죽고 그 피가 흘려져서 지성소의 법궤위에 뿌려지고, 아사셀 양은 백성들의 죄가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광야로 가서 놓여진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다.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는 대속의 죽음이다. 그 다음날은 안식일로써 쉬는 날이다(참고. 요 18:28; 19:31; 눅 23:54; 막 15:42). 그리고 그 이튿날 곧 유월절로부터 3일째 되는 날은 첫 이삭의 단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서 흔들어 바치는 날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제 3일에 추수 이삭의 한 단을 흔들어 바치라고 하셨는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 진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유월절에 죽음을 당하시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부활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실 것임을 미리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첫 이삭( )은 '첫 열매'로서 '순서적으로 가장 먼저 추수된 알곡'을 의미하며, 또한 '모든 추수물의 머리(대표)'임을 의미한다.
고린도 전서 15:20,23에서 바울은 구약의 초실절에 흔들어 바친 첫 이삭의 단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 후 첫 날(마 28:1) 곧 첫 이삭을 흔들어 바치는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증명서요, 보증서요, sample case이며, 첫 머리이다. 그러므로 무교절 셋째날에 흔들어 바치는 첫 곡식 단은 장차 오셔서 다시 살아나실 메시아에 대한 예표이다. 이 초실절 의식은 메시아의 부활의 날을 예고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활이 대표요 첫 번째 부활로서 장차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그분처럼 부활할 것도 예견케 하고 있으며, 메시아와 성도들의 부활의 상관관계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3) 요나의 사건
(마 12:3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참고. 눅 11:29-32)(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요나의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유사성을 가진다. 우선 양자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죽음에 넘겨졌다가 다시 살아난 점, 그리고 밤낮 사흘을 그 죽음(요나의 경우는 죽음과 같은 스올의 뱃속에 있었음)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구약의 독자들이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버려졌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실만을 가지고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가 요나와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유추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문제이다. 요나는 장차 오실 메시아 보다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께서는 요나의 경험을 자기가 장차 받을 경험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먼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개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요나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예수는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요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으시다. 예수의 고난은 그 백성들의 고난을 대신한, 즉 그 공동체의 대표로서 당한 고난이 아니었던가? 이런 점에서 요나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그 선지자(신 18:15)로 오신 사실에서 요나가 다시 살아난 사건과 메시아이신 그 선지자의 부활을 유추할 수 있겠다. 요나는 참 선지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prophetic line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선지자 메시아처럼 성령을 받은 인물이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예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메시아의 예표적 인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요나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욘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욘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스올의 뱃속'이란 hades 즉 죽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2:6(히. 7절)의 구덩이( , from the Pit)는 멸망, 파멸을 의미한다. 요나는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하여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 그는 육체가 썩어져야 할 그 장소로부터 육체가 썩어지지 않고 육신이 보호받아 결국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건져 내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구약에서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부활한 요나와의 유사성에서 자신의 부활의 모습을 발견하시고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의 히브리인들에게는 그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요나의 부활이 주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주님이 오셔서 실제로 요나를 예표로 말씀하시기까지,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시기까지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비밀로 내려온 것이다. 요나의 부활이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하게 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였던 것처럼, 예수의 부활은 많은 불신자들,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게 하였다.
2. 예언에 의해서 언급된 메시아의 부활
1) 창3:15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본문에서 미완료형 동사가 반복되고 있다.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과 뱀(사탄)과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싸움에는 반드시 양방이 다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꿈치는 아주 미약한 부분이고 생명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곳이다. 이 구절은 사탄이 메시아의 육신을 죽음에 넘겨줄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은 뱀(사탄)에게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혀 줄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사탄과의 지속적인 싸움이 아니다. 여인의 후손인 인간과 뱀(사탄)과, 여인의 그 후손(씨)과 뱀의 후손과의 지속적인 싸움을 말씀하는 것이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죽음에 매여 종노릇할 인간들을 구출해 내시기 위해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여인의 아들은 반드시 인간이 되셔야 한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시기 보다는 인자(사람의 아들)로 소개를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인자'라는 칭호를 택하여 사용하신 것은 의도적인데,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장차 얼마 후에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온 인류를 마귀(뱀)의 손에서 구출하실 분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인식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참고. 단7:13; 10:16)
인간이 되신 여인의 후손이 육신적인 죽음을 맛보고 부활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정도로 치명상을 뱀(사탄)에게 입히지 못한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뱀에게 치명상을 입은 결과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뱀의 힘을 완전히 잃게 만들 것이다. 창세기 3:15은 이러한 연인의 후손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롬 16:20과 계시록 12장은 이러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싸움은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참 하나님의 양자된 성도들에게 넘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일어났다. 이 지속적인 싸움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마리아)를 '여자여!'(요2:4; 19:26)하고 부르신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특히 두 번째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이 십자가 위에서였다고 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분의 완전한 승리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있지 않고 부활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창세기 3:15에 예고된 그 싸움을 치르고 있음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부활의 사실과 그로 인하여 뱀(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예견하시고 모친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신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이 모든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승리하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2) 시편 2:1-8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시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6은 하나님과 그 세우신 왕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취하신 조치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지상에 오실 때에 일어날 일을 미리 내어다 보고 예언적 시각을 통하여 그 메시아 왕의 등극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심하게 대적하였고 그를 십자가에 못밖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분을 십자가에 못밖아 이 지상으로부터 제거해 버린다고 해서 대적들이 승리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킴으로 만방에 그 분이 영원한 왕이라고 선포하실 것이다.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appointed Son of God in power."
바울에 의해서는 여기서만 사용되고 있는 는 영어 역본에서는 자주 "designated" (RSV) "declared to be"(NIV, NEB, NRSV)의 의미로 취급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부활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온 세상에 공표하는 사건이었다.
이 같은 바울의 언급은, 열방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즉 열방 백성들이 그분을 상하게 하고 이 지상으로부터 제거하려 하여 그를 죽음으로 넘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그분이 명실공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였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사건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행 13:33에서도 바울은 본 시 2:7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는 구절로 언급하고 있다.
시온(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메시아 왕의 온 세상의 왕으로의 등극임과 동시에 온 세상을 은혜로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이었다.
3) 시편 16:8-11
내 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 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각각 행 2:14-36과 행 13:16-41에서 예수의 부활이 시편 16:8-11의 실현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편16편은 표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윗의 시이다. 그러므로 시 16:10에서 '나'는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 16:10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내(다윗)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다윗)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 이니이다.'
여기서 다윗은 언약의 주체자로서 다윗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죽었고 땅에 묻혔으며 그의 육체는 썩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다윗 자신을 가리킬 수 없다. 다윗은 자기의 영혼을 두고 한 말이지만 사실상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신의 몸에서 장차 태어날 후손들 중 하나인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말한 것이다. 다윗은 그 거룩한 자가 썩음을 당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다윗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후손(예수)을 탄생시킬 그 씨를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메시아이신 자신의 후손이 죽음에 넘기우나 결코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오직 다윗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부활은 적어도 베드로가 볼 때에는 예수의 왕으로의 즉위였던 것이다. 롬 1:3,4에서처럼 그 부활이 곧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는 그것이었다(참고. 행 13:33).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윗 언약은 성취되었다. 행 13:34에서 다윗은 '거룩하고 미쁜 은사'(holy and sure promise)를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사야 55:3에서는 목마른 자들 그래서 물로 나아 오는 자들에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주리라고 약속하고 있다. 사도행전 13:34은 바로 이 약속(사 55:3)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시편 110:1,4,5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110: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이 구절은 대제사장이신 메시아왕의 부활승천을 예고한 구절이다. 부활이 없는 승천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메시아의 승천은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다.
5) 이사야 53 :9-12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본문은 메시아가 고난 당하는 부분(비하) 이후에 오는 승귀 부분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이다. 9절 까지에서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묘사했었다. 이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은 장차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10-12절은 그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를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을 볼 때, 흔히 고난 당하는 여호와의 종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10-12절에서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지위에로의 올리우심(승귀)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은 여호와의 종(메시아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비하와 승귀)을 함께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이 상함을 받기를 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아픔(질고)을 당하게 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은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자기를 으로 드렸다. 인류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침해하고 공격하여 해를 끼치는 죄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종으로 하여금 인류의 그러한 죄로 인하여 홀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살아있는 자기를 희생시키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셨다. Barnes는 그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상함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셨다고 하나 그것은 옳지 않다.
여호와의 종이 자신을 희생시켜 속죄제물이 되어 죽었을 때, 그분은 그 씨를 보게 될 것이다. Hengstenberg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 가운데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어서 그로 말미암아 그는 그분의 교회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접두사 은 when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씨가 있으려면 반드시 그 종의 속죄 희생이 일어나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역으로 말해서 그가 속죄희생을 드리면 반드시 그 보상으로 씨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속죄희생이 없이는 구원받은 백성, 교회도 없다.
여호와의 종이 그 씨를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주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그분이 죽어서 죽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사 는 죽음이 그 여호와의 종을 붙들어 두지 못하고 놓아줌으로써 그분이 다시 살아 자기의 희생의 씨를 보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씨는 그분의 씨로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 날은 길 것이요는 오랫동안 산다는 뜻이다. 이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종의 왕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 구절은 여호와의 종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문구는 다윗과 그의 씨(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 Hengstenberg는 바르게 지적하기를 '하나님의 종의 생명은 그분의 씨와의 교제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고 하였다. 그분이 가지신 부활의 생명은 고립된 생명이 아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호와의 종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자기를 드리는 것이 여호와의 기쁘신 뜻이었다. 그 희생제사 제도는 모세에 의하여 예표로써 세워지고 여호와의 종에 의해서 실제로 실현되었다.
이어지는 구절들(11, 12절)에서도 그분의 부활이 드러나 있다. 그가 자기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등의 문구는 그가 부활하셔서 누리실 일들을 가리킨다.
6) 이사야 55:1-3과 다윗 언약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시 16:10에서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입어 자신의 몸에서 장차 태어날 메시아가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예고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여 놓은지 몇 세기 후에 이사야는 목마른 자들로 하여금 물로 나올 것을 권고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청종할 때, 그들의 영혼이 살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세울 영원한 언약은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에서 볼 때, 53장에서 구속은 성취가 되었다. 그리고 제 4종의 노래의 서론과 결론부에서 장차 이방인들이 집합체로서의 종의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이 예고되었다. 그리고 그 종이 백성들을 위하여 획득한 축복들이 풍성하게 제시되고 있다(54장). 55장에 와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다.
55장을 이끄는 첫 단어는 (ho, 보라!)이다. 이 단어는 사람들의 시각과 청각을 집중하라는 단어이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친히 복음 전도자가 되고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물이 물장수들에 의하여 팔렸었다. 인간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선지자는 여기서 물을 판매하는 사람처럼 물로 나오라고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데 물론 그 물은 영적인 물이다. 선지자가 제공하는 물은 가격도 없다. 젖과 포도주는 영적 축복을 가리킨다. 물은 영적 소생을 주는 것이고, 포도주는 흥분과 즐거움을, 그리고 젖(milk)은 영양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값없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값을 여호와의 종이 대신 형벌을 당하심으로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2절에서 선지자는, 아니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질문을 함으로써 거저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고 헛수고를 하고 있다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양식인줄 알고 그것을 사기 위하여 힘을 쓰고 있는데 사실상 그것은 속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양식은 어떤 물리적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과 만족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수고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만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3절에서 선지자는 약간 다른 어조로 앞 절의 메시지를 반복한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그 언약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묘사되고 있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가리킨다. 다윗 언약은 이스라엘의 구원소망의 기초였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요 모세 언약에 비하여 확실한 것이었다. 은혜라는 단어는 로써 '인애, 긍휼,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표적 표현이 메시아의 대속 사역인바 다윗 언약에서는 메시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를 가리킨다.
삼하 7:1-17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삼하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 윗의 위는 영원히 견고케 되고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다윗의 그 후손(메시아)을 통하여서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수 많은 다윗의 후손이 생겨날 것이다.
(렘33:22)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두 실현이 된다. 그 다윗의 후손(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다윗 왕국은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다윗의 후손(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다윗 왕국은 견고하지도 못할 것이다. 다윗의 후손(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다윗에게 약속한 진정한 성전 건축도 불가능하다. 다윗의 후손(예수)의 부활은 다윗에게 약속한 모든 언약을 실현시킬 것이다. 이것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행 13:34에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결론 >
바울은 그의 고린도 전서 서신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셨는데 이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구약의 말씀을 세밀히 살펴 본다면 오실 메시아의 부활은 그 외에도 얼마든지 발견될 것이다. 메시아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구절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에 의하여 예고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으로 부음 받은 사람들은 구약만을 읽고도 메시아의 부활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에 예언되었고 주님은 그 예언대로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사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부활은 기독교의 존재의 의미를 주고,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며, 소망을 주고, 성도들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며, 믿는 성도에게 환희를 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보다 활발하게 연구하여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우리의 것으로 만듦이 필요하다.
< 참고서적 >
한글 개역성경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King James Version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ew English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ew Jerusalem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Revised Standard Version
B. Davidson, The Analytical Hebrew and Chaldee Lexicon, Zondervan, 1970.
J. J. Owen, Analytical Key to the Old Testament(4vols), 1989
J. A. Alexander, The Prophecies of Isaiah(2), Zondervan, 1976
E. J. Young, The Book of Isaiah(3), 1974.
John D. W. Watts, Isaiah 34-66(WBC), 1987.
James D. G. Dunn, Romans 1-8(WBC), 1988
Gordon J. Wenham, Genesis 1-15(WBC),1987
Huge Martin, 요나의 표적에 관한 신약적 주해, 윤영탁 역편, 구약신학 논문집(5)
정일오, 선지서 연구(96년도 봄학기) 강의록
, 구약신학(97년도 봄학기)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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