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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

이문장 (Trinity Theological College, Singapore)
개혁신학회에서 퍼옴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한국 사회에 맞는 설교’이다. 설교(Preaching)는 성경 본문(텍스트)과 현장 상황(컨텍스트)을 두 축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 설교 전달을 위해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청중을 이해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모든 설교자에게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 작업이야말로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다. 설교자의 사명은 어쨌든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성수 교수님이 이 부분에 대한 발제를 하실 것으로 안다.) 필자의 작업은 한국 사회 분석과 청중 이해(Understanding the Audience)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본문과 현장 상황이 적절하게 연결되어질 때 설교가 제 역할을 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를 특별히 주목하여 언급한 이유는 한국적 상황에 고유한 혹은 독특한 요소들을 찾아보라는 주문이 들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우선 이 주제는 두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겠다.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한국 사회를 끼우는 것이다. 즉, ‘설교-한국 사회-청중’의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자와 청중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려는 것이고, 설교자가 한국 사회 혹은 한국 문화를 여과하여 설교를 해야 청중에게 도달할 수 있겠다는 문제의식을 다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현장 적실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검토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를 청중의 일상적 삶의 현장으로 놓고 설교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즉, ‘설교-청중-한국 사회’라는 도식이다. 이 경우는 설교가 한국 사회의 구성적/형성적 담론 역할을 할 수 있겠는지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우선, 설교가 한국 사회라는 장(場)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고찰해 보도록 한다. 이것은 설교 사역이 지니는 시대적 가치를 확인하고 확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두 번째 꼭지인 ‘설교(사역)의 사회적 함의’부터 먼저 다루어 볼까 한다.

설교는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가 

    설교가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장(場)은 교회 공동체이다. 설교란 교회 공동체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설교는 교회 안의 담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 설교가 현실에 개입을 하고 있다는 측면을 새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 설교의 장(場)이 확대된다.

    그 동안 설교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 제한된 청중과 사이에 자체 담론을 형성하는 차원에 그쳤다. 어느 한 목회자의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청중인 교인들에게 영향과 파장을 미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에 노출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섭렵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로부터 어느 정도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고 또한 라디오나 케이블 TV 등으로 기독교 방송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에 노출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거의 없어졌다. 적어도 기독교계 안에서는 설교의 유통 폭이 훨씬 넓어졌고, 교인들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상당히 확대되어졌다. 설교의 장(場)이 확대되어진 것이다.

    설교의 유통 범위에 변동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설교의 장이 여전히 교인들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민중교회를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 즉 교회 바깥의 불의한 현실을 설교에 직선적으로 반영하였던 때가 있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민중 교회가 직면했던 난제는 설교의 대상이었던 민중 교회 청중의 현실과 교회 바깥의 참담한 현실 사이가 실존적으로 상통(相通)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설교를 듣는 청중이 피부로 느끼는 ‘나의 현실’과 이념적으로 파악되어진 ‘현실’ 사이에 완벽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민중교회가 청중 확보에 실패하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아미 이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선적으로 관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설교가 교회 바깥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경우 간혹 정치적 혹은 계급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도 상존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설교자가 교회 바깥의 현실을 설교에 반영하는데 한계와 부담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실상 설교자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설교가 교회 바깥 일반 사회의 마당에서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사회적 의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설교는 말 그대로 교(敎), 즉 기독교의 가르침 혹은 진리를 설(說)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교’, ‘진리’ 혹은 ‘가르침’은 그 성격상 교회 안과 교회 바깥의 세상에 두루 연관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설교가 설교를 듣는 청중을 매개로 교회 바깥의 세상과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에 의해 설교 내용이 현장에서 실천되고 일상화 되어지기를 기대하고 촉구하게 된다. 설교자는 사역의 속성상 소위 사회 변혁적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한국 사회로 침투 혹은 잠입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 부분이 설교자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설교 사역이 청중을 매개로 사회 변혁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생활현장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설교가 한국 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들 연결고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측면에 설교의 사회적 의미가 확대될 수도 있고 왜소해질 수도 있다. 

  2. 설교의 언어가 사회 친화성을 띠어야 한다.

    설교는 청중을 매개로 한국 사회에 개입하고 있다. 설교 행위는 설교를 직접 듣는 청중과의 정신적 및 영적 교섭이지만, 청중들의 삶이 한국 사회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가진다는 구조적 및 실존적 연계성으로 말미암아 이미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설교의 대상이 되는 청중이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존재들이라는 현실에서 설교와 사회의 관계를 간접적인 것으로 보다는 어쩌면 오히려 직접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의 청중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동일한 생활공간을 공유한다. 그들의 삶은 상당부분 중첩되어진다. 같은 직장, 같은 조직이나 단체, 같은 업종 등 삶의 중복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 없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은 설교 청중과 현저하게 다른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가능성이 발견된다. 한국 교회 청중을 향한 설교는 곧장 교회 바깥의 한국 백성에게도 들려지고 이해되고 공감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교회 안 청중이 이해하는 설교라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현실 체험과 교회 밖의 사람들의 현실 체험이 상호 부딪히고 교섭하는 폭이 의외로 넓기 때문이다. 설교는 일차적으로 청중에 의해 ‘나의 이야기’로 수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청중의 이야기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나의 이야기’로 수긍이 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설교의 언어가 문제로 대두된다. 설교의 언어나 전달 방식이 한국 사회의 일상 언어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언어 세계를 구축해 가지고 있는 한 설교의 한국화 내지 현장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의 언어와 설교를 통해 전달되어지는 내용이 교회라는 공간 내부에서만 통하는 언어 in-house language가 되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과 소통이 막히게 된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 일반 사람들이 들어도 흥미와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적 친화성/ 친근성을 확보하는 일이 요긴하다. 그래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흡입력 있는 가르침이 설파될 것이요, 설교를 통해 한국 백성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설교가 한국 사회 안에서 의미 있는 공간을 당당하게 차지할 뿐 아니라, 교회 바깥 사람들의 담론 속으로 치밀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설교 언어의 사회 친화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3. 설교가 시대 흐름을 조타하는 역할을 한다.

    설교가 ‘현장 적실성’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설교의 영향력이 ‘조직 유지용’의 차원을 넘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얻는 지경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현실 개입은 누구나 인정하는 설교의 기능이다. 설교 사역이 존속하는 한 설교의 현실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설교는 다양한 현실 삶의 조건과 환경에 부딪쳐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청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청중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영적 계발이 일상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삶과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개인적 혹은 집단적 삶의 성공과 좌절을 맛보게 만드는 현실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설교의 현장 적실성과 청중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현장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구체적 생존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지평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구체적 현장의 삶을 바르게 영위할 수 있는 영적 이치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설교가 시대적 현실을 향해 예언적 가르침 혹은 선도적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 설교가 당시 시대와 호흡을 같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시대 흐름과 엇나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설교는 시대 분위기나 흐름을 비켜서서 비판적 입장을 끈질기게 견지해 주어야 한다. 설교가 당대 사회의 관심이나 가치나 유행을 반영하는 선에서 멈추어 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설교는 한 시대 전체의 사고방식 내지는 정신세계의 흐름에서 불필요하게 소외되어질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당대 사회 전반에 대한 질타와 더불어 적극적인 차원에서 방향타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4. 설교자 자신의 현실인식이 제고되어야

    설교와 한국 사회의 접촉은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현실에 개입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교가 사회와 연결되는 고리는 단지 일상의 현실을 살고 있는 청중을 통한 것뿐이 아니다. 일상 현실을 동일하게 살고 있는 설교자의 주체적 체험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현실의 정서가 은연중 설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설교자가 현실적 정서의 흐름에 민감할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삶의 구성요소에 의해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어느 정도 규정해 버리는 정도까지 영향을 받게 될 위험성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설교자의 한국 사회의 접촉 부위는 다음 두 가지로 관측되어진다.

    첫 째는, 설교자의 현실 인식이 설교에 투영되어진다는 측면이다. 설교자의 현실 세계 인식이 철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진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의 현실인식이 허구적이거나 불철저한 것일 때 설교를 통해 전달되어지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장 적실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위하여 설교자는 생활현장에 대한 귀납적 학습을 해야 하고 지식을 널리 얻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얻은 지식에 대한 검토와 예민한 반성이 빠질 수 없다. 그리고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바른 분별과 판단을 거쳐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둘 째는, 설교자가 현실을 통해 깨닫는 하나님의 이치가 설교의 깊이를 좌우한다. 설교자가 말씀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성경의 원리와 이치들을 체득 혹은 체인하고 있다면, 그러한 말씀 실력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현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삶의 현실이 보인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본다는 의미이다. 바둑의 정석을 깊게 공부하고 바둑을 두는 실력이 고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바둑판을 보고 미리 수(手)를 앞서 읽는 능력이 생긴다. 태권도의 고수가 되면 상대방의 허점이나 급소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했다. 성경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 눈에 삶의 현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성경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두 현실이 서로 대응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수준의 투철한 현실인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깊은 설교가 들려지게 된다.

한국 사회와 청중 이해: 설교 유형을 고려한다 

    설교가 대 사회적 함의를 가진다는 측면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는 설교의 구체적인 형태를 각론적 차원에서 짚어보려고 한다. 한국 사회와 청중을 이해할 때 설교의 지향점이 어디에 놓이게 될지 대충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교가 청중에게 제대로 접속이 되려면 한국 사회라는 설교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의 한국 사회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및 심리적 환경 일체를 의미한다. 설교의 청중은 일상생활의 각종 현장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부딪히고 씨름하고 몰입되어 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이 누구인지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청중 이해는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청중과의 바람직한 접속을 이루려는 설교자의 기본적이며 동시에 필수적인 관심사항이다. 물론 설교자가 마주 대하는 청중은 늘 고정된 청중이 아니다. 청중은 변하기 때문이다. 매 주일 대하는 같은 청중이지만 청중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되어야 한다. 청중이 살고 있는 일상 삶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청중도 달라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의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청중의 변화를 자극하는 달라지는 시대 분위기를 적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외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게 된다. 종종 청중의 세계와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설교자들이 있음을 본다. 설교자는 청중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감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어야 할 한국 사회 환경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통시적 diachronic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적 synchronic 환경이다. 통시적 환경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전통과 직결되어 있는 문화 종교적 환경을 말하고, 공시적 환경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최신 경향들을 포함한 당대의 지적 정신적 및 정치 경제적 현실 흐름을 말한다. 통시적 환경과 공시적 환경을 선명하게 구분 짓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통시적 환경은 이미 공시적 환경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차원에서 상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지로 임의 구분을 해 보자면 통시적 환경은 고정된 양상을 띠나, 공시적 환경은 수시로 변화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공시적 환경의 변화가 통시적 환경의 강화 내지는 약화를 초래하고 있음이 함께 주목되기도 한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목회 환경 혹은 설교 환경은 이들 두 환경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 두 환경의 조합에 대한 예민한 관찰이 효과적인 설교 사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1. 통시적 환경: 한국인의 의식구조 

    1) 호의적인 설교 환경 - 영혼을 흔드는 설교를 하라

    한국의 설교자들은 행복한 설교 환경을 갖고 있다. 최근 목회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목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들이 나온다. 성도들의 기대가 떨어진다거나, 설교가 길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지루한 내색을 드러낸다거나, 아니면 아무리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한국의 목회 환경 변화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설교 환경’과 그에 수반하는 ‘성경 해석학적 환경’은 한국과 비교할 만한 지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설교 환경’이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해석된 내용을 가지고 강단에서 설파하려고 할 때 수위(水位) 조정을 해야 할 압박을 느끼는가 아닌가 하는 측면을 말한다. 필자가 오랜 기간 살았던 에딘버러는 설교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성도들 가운데 비판적/ 자유주의적 신학에 노출된 사람들이 일부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지레 부담을 느낀다. 설교자의 성경 해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벗어나 체험적이거나 영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로 약간이라도 흐르는 경우 즉각적으로 부담스런 반응이 돌아온다. 한두 번 그런 반응을 접하게 되면 영적으로 강한 설교 혹은 깊은 설교를 하기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에서는 설교를 할 때 적어도 영적인 차원과 관련하여 수위조절을 해야 할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거꾸로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자가 더 영적인 깊이를 소유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러한 설교 환경은 설교자 자신이 성경의 세계로 무한대 진입하는 노력을 경주하도록 채찍질한다. 

    이러한 설교 환경 혹은 해석학적 환경에서의 설교는 영적인 깊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외향적으로 볼 때, 객체인 청중의 가볍고 변덕스럽고 대중적인 기호를 맞추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청중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말씀 자체의 영적 깊이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청중의 기호나 입맛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만 보고 설교의 수위나 방식을 조정할 이유가 없다. 청중은 가벼운 감동에 열성적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은 깊이를 갈구하고 있음을 갈파해야 한다. 청중의 진정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 있다. 설교가 언어적 유희에 경도되거나 튀는 말솜씨로 청중에게 어필하려고 해서는 설교 환경의 진상파악에 실패한 꼴이 될 것이다. 설교가 청중의 기호에 맞추는 식으로 말씀을 푸는 것이라면 더 이상 생명력 있는 역사를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2) 초월 세계를 향한 열린 태도 - 하나님을 설교하라

    한국인의 심성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21 세기에 들어 선 오늘에도 이러한 한국인의 성향에는 큰 변동이 없다. 한국인의 성향은 현실 중심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월세계의 실재를 인정하는 종교성도 현상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과 동양인의 우주관 및 내세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인은 현세구복적인 성향과 더불어 현세 초월적 성향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 두 성향 사이에 형성되는 적절한 긴장관계가 한국인의 삶에 균형을 잡아준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 문제의 해법을 초월적인 힘의 도움을 구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 땅의 현실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각종 예기치 못한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일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 도움을 청한다. 혹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이 무속주의의 부정적인 영향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의 존속은 한국 기독교를 위한 커다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서구 정신세계에서 목격되는 독립적 사고 내지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하늘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도록 만들었던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숙한 인간의 자화상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입되어진다. 초월적인 힘에 기대거나 의존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질이 아니라는 교육도 주어졌다. 현대 문명인은 하늘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의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성에는 초월 존재에 대한 의존도가 살아있음을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는 단순히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한국인 가운데 특정 종교적 전통에 속한 사람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초월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기공(氣功)이 각광을 받는 것이나 초능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 고조도 이러한 경향을 일부 반영한다.

    기독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현실에서 봉착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하도록 계몽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을 통해 현실의 난제들이 풀리는 원리들과 예증들을 무수히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늘과 초월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현실 문제해결을 의뢰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무조건 배척할 일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성향을 여전히 담지하고 있는 한국 청중을 향한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현실감 있게 재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영광의 추구는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을 건드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등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 삼는 것이어야 한다. 이 시대는 너무 분주해서 ‘왜 사느냐?’ 혹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질문을 가지고 묵상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초월적 존재를 향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청중이 갖고 있는 심성의 틈새를 뚫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넘어 본질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또한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청중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려주는 설교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의식이 상승하도록 만드는 일이 시대적으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수준에 쉽게 이를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자기 부정 혹은 자기 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인정 혹은 의지가 체계적으로 학습이 되어진다면 한국 청중들의 영적 수준은 수직 상승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제는 그러한 학습과 실습이 설교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달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을 건강하게 자극하고 견인(牽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현실 집착과 무한적인 경쟁관계로 돌진하도록 부추김을 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삶의 근원적 이슈를 묵상하도록 자극을 주는 역할이다. 현실에 몰입해 살아가는 청중들을 향해 이 세상을 너머 존재하는 초월 세계 및 영적 세계의 실재를 환기시키고 이 땅의 현실을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을 제공해 주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자가 유의해야 할 측면은 지나친 현세 부정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는 설교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런 초월 세계에 대한 감도를 지나치게 혹은 무리하게 조장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초월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청중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다. 극단적 현실 혐오나 현실 부정을 통해 신비주의적 성향을 부추기는 일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초월 세계 혹은 영원한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을 조망하는 시각이 무차별 매몰되는 현상을 좌시하고만 있어서도 곤란하다. 성경에 근거한 건전하고 건강한 가르침이 선포되어 현실의 부품 내지는 노예 상태로까지 전락해 전전긍긍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청중에게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낼 소망의 빛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3) 경전 권위에 대한 순복 - 실천적 지혜 practical wisdom를 설교하라

    작금 한국 교회를 우려하는 목소리 가운데 세속화 경향에 대한 지적이 부쩍 늘고 있다. 더 이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맹랑한 시대 분위기를 질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통적인 가르침의 권위에 순복하는 심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경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복은 크게 손상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 내지 저항은 진정한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 권위를 부리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노출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경험을 통해 한국 청중은 진정한 권위 앞에 언제든지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 권위에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자업자득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말씀 강론에 뒤이어 청중의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지침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 청중이 시중(市中)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들이 설파되어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설교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길과 생활현장에서 관찰되는 하나님의 길을 연결해 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종래 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한국적 개념의 설교는 그 차원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 투시와 오늘의 현실 투시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깊은 학습을 기초로, 오늘의 생활 현실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 여호와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는 소망을 읊었다. 성경 말씀의 세계를 오래 힘써 익히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파악하는 눈이 트이게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현실을 말씀의 빛에 비추어 오래 익히고 관찰하고 묵상하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는 눈이 트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본문과 더불어 이 땅의 현실도 밀접하게 관찰하고 주도면밀하게 묵상하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설교자가 이 땅의 생활 현장에서, 혹은 피조 세계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치를 찾고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될 때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살고 있는 생활 현장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적용을 훌쩍 뛰어넘는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자신이 생활 현장을 통해 보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야 청중도 설교를 통해 현실 삶을 성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될 것이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현장에서 드러나는 무수한 영적 이치와 원리들을 배우고 깨닫고 터득하게 된다. 그런 다음 청중의 삶 가운데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한 이치와 원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실습하게 된다. 따라서 설교의 적용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삶의 현장에서 하게 된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방도 혹은 가장 시의(時宜)에 적절한 이치를 찾아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설교의 바른 적용이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실천적 지혜 혹은 생활 지혜를 전수하고, 청중은 그것을 올바른 행동으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구조가 된다.

    4)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 - 감동(感動)이 있는 설교를 하라

    한국인의 특성을 흔히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심성에서 찾는다. 사실 한국인은 매우 감정적인 민족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한국인은 ‘정’(情)이 많기도 하고 ‘정’에 약하기도 하다.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계약에 의한 것 보다는 다분히 ‘정’에 근거하고 있다. 규정과 법에 따라 허용이 되지 않는 일들도 ‘인정’에 호소하면 융통성이 발휘되기도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만 해도 한 번 규정을 어겼으면 아무리 호소를 해도 융통성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호소를 하는 한국인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되어진다. 한국인의 감성은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신바람이 날 때까지 놀기를 좋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진다. 한국인의 마음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강렬하고, 그래서 ‘어머니’를 부르면 코끝이 찡하는 정서상의 움직임이 있다. 한국인은 직관적이어서 치밀한 논리를 통한 설득에 심정적 적응이 매우 더디다. 싸움이 나거나 서로 말다툼을 했더라도 술을 한 잔 나누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엉킨 감정을 풀어버리는 체질이다. IMF 위기가 닥쳤을 적에 온 국민이 금을 팔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나섰던 일 등은 한국인의 마음이 움직이면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들 21세기는 영성의 시대, 감성의 시대, 영상의 시대 또는 체험의 시대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예배도 이런 흐름에 맞추어 중심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들이 조심스레 개진되고 있다. 즉,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신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로의 전이를 전망한다. 여기에 찬양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중의 심령을 만지기에는 찬양이 가장 효과적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측면이 있다. 한국인은 21세기가 도래하기 이전에도 두드러지게 영적이고, 감성적이고 또한 체험적인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성의 시대에서 감성의 시대로 전이를 말하지만, 한국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감성 시대를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21세기의 신종 기류로 감성적 코드를 부각시키는 것에는 다소 시대착오적 발상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분히 서구적 시각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우(寓)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감성 목회를 중시해 왔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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