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레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신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오늘의 본문은 맹세와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본문은 이해를 하기가 좀 힘이 들었었는데.. 제 평소의 성격이 이유를 알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참 힘들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퍼인데.. 사실 본문의 내용만 가지고는 그 이유를 추측해 내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거겠죠??

본문의 구조 역시 앞서 예수님께서 사용을 하셨던 구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들었었던 정통 교리를 언급을 하시고, 후에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내리시는 것이지요.. 맹세와 관련된 정통 교리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는 것이었답니다.. 이 맹세와 관련된 계명들은 밑에 적어 놓았습니다. 각각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아마도 레위기 19:12절에서 찾는 것이 제일 그럴 듯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만 사실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욕을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특정 누구만 편애하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공동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내가 속해있는 사회.. 그 안에서 내가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reputation... 즉 다른 사람으로 부터의 평가가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끊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등에는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욕을 하든.. 아니면 하나님을 칭찬을 하든 하나님 본인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을 해 보면 사실 레위기 19:12절의 말씀은 약간 생각을 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쓰실까요?? 사실 이 문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 그 관계의 시작은 항상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그 사람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내가 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이 어떤 성격..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를 먼저 파악을 하고.. 그런 연후에 그에 맞게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나 방법을 바꾸는 것이지요..

가령 예를 들어서 자기 잘난척만 하는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보통 그런 사람은 잘 안 만나거나 행여 보더라도 인사 정도만 하고 깊은 관계는 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렇게 잘난척만 하는 친구인 줄을 모르고.. 정말로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깊이 있게 교제를 하려고 시도를 했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아마 둘 다 깊은 상처를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겉 보기에는 굉장히 쌀쌀하고 말도 없고 그런 친구가 알고 보니 수줍음도 많고 낮가림도 많고 해서 다른 친구들에게 자신을 잘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속도 깊도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순딩이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처음에는 차도남이나 차도녀같이 느껴져서 교제하기가 쉽지 않은데 차차 알아가면서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때도 있지요..

좀 간단하면서도 단적인 예인 것 같기는 한데.. 위의 예들은 사람들의 첫인상과 실제 그 사람의 모습이 다른 경우들이 우리들에게는 참 많다는 것을 일단 알려주고.. 그리고 누가 되었든 간에 그 사람과 건강하면서도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진실한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렇게 해야 그 사람과 고제를 할 때 서로간에 건강하고 편안한 교제 방법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하고의 관계도 이와 동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정의 하시기도 하시고 어떤 분들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정의 하시기도 하시고.. 어떤 분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정의를 하시기도 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습과 이미지는 나의 경험 안에서 만들어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항상 본래의 하나님이 어떤 모습일지를 기도하면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닌 그 본연의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알아야 하나님하고 정상적인 관계가 가능해 질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위의 예에서와 같이 서로 핀트가 맞지 않는 이상한 관계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reputation.. 즉 평가는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경계하시는 것은 사람들간에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먼저 경계를 하시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7:3절에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점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 부분은 사실 본문에서 나오는 이야기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Leon Morris는 이 부분을 당시 유대인의 습관에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맹세에 대한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의 진위를 따질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을 때 그것을 진실인 것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아닌 하늘과 땅, 성전 등을 걸고 맹세를 하기도 했다는 군요...

하나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을 때에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지 않고 맹세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진실이 아니어도 된다는 그러한 분위기도 당시 유대인 사회에는 있었을 수 있겠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토에 대해 지적을 하셨다고 이해 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맹세를 해야만 내 진실을 믿어주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우리 기독교인은 이 땅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보여주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렇게 진실하게 살아야만.. 제대로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른 분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렇게 진실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Posted by yy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