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성공 지상주의 또는 성취 지향 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나 또한 성공 지상주의와 성취 지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왔었다.. 그런데.. 최근 몇 주간.. 성공, 성취와 관련해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해왔던 것들이 있음을 발견을 하게 되었다...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 것 같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타락 이전의 세계와 타락 이후의 세계로 나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과 관련해서는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에 큰 차이가 존재하게 되는데.. 타락 이후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한다. 위의 빨간색으로 표시된 본문들이 이러한 노동의 의미의 변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락 이전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가 있다. 타락 이후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전에는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따라서 인간이 먹기에 필요한 먹거리를 제공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타락 이후에는 인간이 노동을 해서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먹거리를 생산해 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생산 활동의 시작인 것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들 크리스챤들에게는 창세기 3장에서의 저주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즉 창세기 3장에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류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서 영적 에덴 동산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3장에서 이 땅에 선포된 저주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들과는 어떠한 관계에 놓이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저주 받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저주로부터 놓임을 받아서 자유로워 지는가??

노동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여전히 열심히 땀 흘려서 우리의 먹거리를 확보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노동과 관계 없이 은혜로 주시는 먹거리를 기대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어느 것이 맞을까??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는 저주 후의 노동의 의미에서 마치 벗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말씀 앞에는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꽃들에 대한 예화가 나온다.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꽃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시 않으시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 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신 것을 주실 것을 기대를 해도 될까?? 일단 이 말씀만 놓고 보았을 때는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위의 말씀은 하와에게 이르는 타락의 결과이다. 하와는 타락의 결과로 임신의 고통이 커지고, 또한 남녀 관계에서의 불평등을 겪게 된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타락 이후의 크리스챤의 삶에 미치는 타락의 결과를 살펴보는데 매우 괴중한 지표가 된다.. 과연 크리스챤 여성들이 비기독교인들과 비교해 임신의 고통 수준이나 남녀 의존도 등을 비교해보면 크리스챤에게 미치는 타락의 결과를 꽤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아기 낳을 때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둘 사이에 서로 구별되는 초자연적 차이는 없다. 또 여성들의 남성 의존성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창세기 3장에서 선언된 타락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3:16-17절의 땅의 저주도 마찬가지이다.. 이 지구상의 땅의 상태는 믿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나 똑같다. 믿는 사람들이 산다고 땅의 저주가 풀려서 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소산들만을 풍족하게 내는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타락의 결과들이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타락 이후의 노동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위의 구절은 다 아는 오병 이어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약판 맛나 사건으로 이해를 할 수 있겠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40여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시고, 그 백성들을 맛나와 메츄라기로 먹이신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산 활동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생산 활동에 직접 개입 하셔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맛나와 메츄라기를 그들에세 공급해 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만 의존해서 먹고 살았을 뿐이다.

신약의 오병 이어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수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먹기리를 위해서 특별한 생산 활동에 참여한 일은 없다. 그들에게 있었던 먹거리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조각 뿐이었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조각을 그들이 먹기에 충분한 만큼의 양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또 하고자 시도 한 일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그 생산 과정에 개입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조각을 뻥튀기 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을 만큼 생산해 내셨다. 사람들은 그저 아무런 댓가 없이 먹고 즐겼다.

이 두 가지 예는 이 땅에 경우에 따라서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 나라의 섭리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생산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노동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타락 이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창세기 3장에서 선포되었던 타락 이후의 이 땅의 저주로부터 한시적으로 회복되었던 사건으로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광야가 아닌 가나안 땅이었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딛는 순간 40여년간 계속 되었던 하나님의 맛나와 메츄라기는 멈췄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농사를 지어야 했고, 가축을 먹여야 했으며, 그렇게 그들이 수고하고 땀 흘린 소산을 먹어야 했다.

신약의 군중들도, 그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아무런 노동과 땀의 댓가가 없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내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그들이 일 하면서 벌어들인 결과물로부터 그들의 먹거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창세기 3장의 저주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성공과 성취는 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단어들이다. 우리 크리스챤들도 모두 수고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이 땅의 구조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우리들도 결국 생산 활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즉 무엇인가 성취하고 또 성공해 내야 먹거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러한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의 맛나 사건과 신약의 오병 이어 사건과 같이 아주 특별한 경우에 아주 특별한 은혜로 인해 이 세상의 구조를 깨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구조가 이 땅의 질서 안에 개입해 들어오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러한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님이 분명한 것 같다. 성경의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생산 활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먹거리 만으로 살아간 인물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성공주의와 성취 지상주의는 비판을 한다. 하지만 성공과 성취라는 그 단어 자체를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밀어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생산 활동에 관여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이 점이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관련해서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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