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를 어찌 이해를 해야 할까?? 이 부분은 오랜 관심사였고 또 질문이었다.. 일단 창세기 3장 16-17절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http://yyht.tistory.com/1534 참조) 아래 두 구절을 통해서 대충 그 답은 얻은 것 같다..

먼저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서의 통치와 민주주의에서의 통치를 한 번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치 체제는 분명히 군주제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는 절대적인 군주이시고, 이 땅의 모든 통치는 그 분으로부터 시작이 되게 된다. 그 분의 통치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반론도 제기를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만드시면 그것이 법이요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일반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로 "내"가 주인이 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그 "내"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을 모아서 합의를 이루고 그 합의를 기준으로 법을 만들고 그 법에 의해서 통치를 하게 되는 법치주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 안에서의 통치는 사실은 "내"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나"들이 서로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법"이 통치를 하게 되는 시스템이 된다. 어쨋든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는 그 뿌리부터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 철학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배격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라기 보다는 전체주의 자체를 부인한다. 군주제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아무래도 플라톤이 쓴 국가론인듯 하다. 플라톤은 당시 민주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아테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철인 정치를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아테네는 소수의 선거권이 있는 시민들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통치가 되고 있었는데 몇 몇 수완 좋은 사람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그럴듯한 말로 홀려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을 보면서 무지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민주주의는 유효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그 보다는 선하고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생각하는 1인, 또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국가가 통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논리를 폈다 한다. 그것이 바로 군주제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따르면 군주제를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선결 요소가 필요하다. 먼저 군주는 품성이 선하고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한 국가를 운영하기에 적합한 엘리트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땅의 인간들을 살펴 보았을 때 플라톤이 구상했던 이러한 군주의 요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한 이러한 전체주의 하에서는 인간의 다양성이 매우 쉽게 무시되어버리기 쉽다. 한 사람이나 또는 소수의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게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이나 생각이 사회적 틀에 많이 반영이 되기 마련이며, 그러한 경향은 다양한 욕구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저해하는 쪽으로 많이 기울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서 요즘에는 민주주의가 그 대안으로 자리를 잡고 있단다. 군주제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군주는 선해야 한다고 하는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그렇게 선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현실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되는 듯 하다. 민주주의는 성악설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하는 믿음에서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국가 통치자를 온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 자신이 통치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현대의 민주주의는 국가의 특성상 직접 민주주의 보다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일단 국가가 워낙에 크고 사람이 워낙에 많기 때문에 국가의 세세한 일 하나 하나에 모두 직접 투표를 통해 결정을 하려고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릴테고 비용도 많이 들고 하니.. 나 자신의 이익과 생각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지방 의회, 지방 행정부(군, 구), 국회, 대통령 등으로 뽑아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나 자신을 대리해서 통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 성격상 국가 통치자가 국가를 통치 할 때의 권력을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아서 통치를 하게 된다..

그런데 통치권자를 믿을 수가 없으니 계속해서 견제장치들을 만들려고 한다. 권력이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우려해서 삼권분립 체제를 만들고 그것도 불안해서 국가 권력을 감독할 수 있는 언론과 시민단체를 만든다. 뭐 문제는 행정부와 국회가, 행정부와 검찰이, 행정부와 주요 언론사들이 짠짠짠 하면.. 이 모든 견제 장치들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 다는데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현실..

뭐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보았는데.. 공부 해 보니 그렇단다.. 어쨋든..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인하여서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함에서 시작 한다.. 내가 직접 통치를 하고자 함에서 시작을 하니 말이다.. 문제는 뭐 민주주의 정치 이념은 이렇다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느냐.. 아니면 배척해야 하느냐 일테고.. 받아 들여야 한다면 어떤 근거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배척해야 한다면 민주주의를 배척한 후에는 무엇을 대안으로 삼을 것이냐.. 하는 부분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을게다..

 

벧전 2: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 13: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롬 13: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롬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위의 말씀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는 구절들이다. 먼저 베드로 전서 2장을 보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하고 계신다. 그 순종의 대상은 왕이나 총독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왕과 총독은 같은 공통점을 가지는데 모두 유다를 다스리도록 로마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들이라는 것이다. 로마는 유다에 왕으로 적당한 사람이 있을 때에는 왕을 세워서 유다를 통치하도록 했었고, 왕으로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왕을 세울 수 없을 때에는 로마에서 직접 보낸 총독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했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야기 하는 왕과 총독을 분명 로마에서부터 파견된 통치권자를 의미를 하는 것이고, 이 사실은 결국 베드로전서를 쓴 저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의 통치행위를 부인하지 않고 인정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로마서 13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로마서에서의 권세는 (έξουσία)로 이 단어는 단순히 권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통치자를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이 되었다. 위 문맥에서 이 권세라는 단어는 다스리는 자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보내진 편지이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스리는 사람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에 이스라엘에 있는 통치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로마서 13장에 등장하는 다스리는 자는 로마의 통치자들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3장 역시 기독교인들 위의 로마의 통치를 인정 한 셈이다.

그런데 로마의 통치를 인정한 이유가 흥미롭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그렇고 로마서 13장에서도 그렇고 통치자를 선한 존재로 묘사를 하고 있다. 로마서 13장은 로마의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묘사를 하고 있다. 이 묘사는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묘사이다.

 

계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큰 음녀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는 계시록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으나 대체로 이 음녀가 로마를 묘사하고 있고, 특히 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의 황제로 여겨지는 도미티안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밑에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라는 부분은 로마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행했던 박해의 성격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는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가마솥에 기름을 끓여 튀겨 죽인 경우도 있고, 한 기독교인 여성을 죽이기 위해 두 개의 나무 사이에 여성을 놓고 나무를 그 여성쪽으로 기울게 한 뒤에 그 여성의 팔과 다리를 여성쪽으로 기울어 있는 나무에 묶었다가 놓으니 나무가 원 상태로 돌아가면서 여성의 팔과 다리를 찢어서 죽인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인했던 로마의 권력이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글쎄.. 이렇게 이야기 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로마서와 베드로전서는 분명 요한계시록 보다는 앞에 쓰여졌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과 베드로는 90년대 중반 요한이 겪었을 이러한 대 박해를 경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전체적으로 한 가지 메세지를 전한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로마서와 베드로전서의 메세지는 흥미롭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hostile한 태도를 고려해 본다면 도대체 이러한 로마의 통치자가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었을 까??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요한복음 주해과목을 들을 때 교수님에 의해 받은 자료인데 어떤 비석에서 로마의 황제를 지칭해서 Son of God 이라는 표현을 사용을 했다는 자료가 있다. Son of God..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 아닌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했었던 표현이다. 물론 당시의 권력자들은 왕권신수설에 의거해 통치권을 변호했기 때문에 당시로서 어떤 국가의 통치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시대가 되었든 바울의 시대가 되었든 요한의 시대가 되었든 로마는 절대로 예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어떻게 기독교의 근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세력에 대해 선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통치자를 생각을 할 때 특별 개인과 통치자를 구분하고 국가의 존재 목적을 고찰해 보면 찾을 수가 있다.

먼저 국가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 할 것이다. 국가란 무엇이고 국가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본다면 다들 동의 하는 것이 국가에 속해 있는 국민들의 안녕과 보호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어떠한 정치 철학과 이념, 제도를 들여오던지 누가 통치를 하든지 상관 없이 국가의 존재 목적인 국민의 안녕과 보호를 넘어서지 않는다. 어떠한 통수권자가 되었든 통치 목적 자체는 국민의 안녕과 보호이다.

실제로 이러한 국가의 존재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국가 통치 체제로 군주제를 선택 하느냐, 공산주의를 선택 하느냐, 민주주의를 선택 하느냐에 따라서 제도적인 한계와 특성들이 존재하고, 같은 제도 위에서 통치를 하더라도 누가 통치를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온다. 어떤 제도를 사용을 하고 어떤 사람이 통치를 하든지 우리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이 아마도 정치,경제학의 고민이 될 터이다. 하지만 어떤 체제, 어떤 사람이 되었든 .. 궁극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보호이다. 심지어 우리 모두가 독재자며 압제자로 알고 있는 김정일도 말로는 "온 국민이 고기 반찬에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부국강병 나라를 만들자"고 했었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사람인 것 같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한계가 이러한 길로 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누가 권력을 잡든 간에 권력을 잡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국민의 안위와 국민 전체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통치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국민의 일반적인 권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현상.. 이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통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볼 때에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이 문제는 국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 즉 사람의 문제인 것이지 제도의 문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국가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 부패해서 국가를 잘 못 경영 한다고 해서 국가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그 사람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에 의해서 이야기 되는 로마 통치자의 선은 특정 누군가가 선하다라기 보다는 국가론적 관점에서 국가 기관이 하나님께서 인류 보편적으로 인간들을 살리시고 또 보호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제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함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또 "권세", "다스리는 자", "와", "총독" 에 대한 이해도 누군가 특정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라기 보다는 그냥 하나님이 허락하신 국가 제도 안에서 국가를 통치할 책임이 주어진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통칭으로 이해를 함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즉 그 당시에 유다와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라는 나라와 당시의 황제 그리고 유다의 총독, 왕 등이 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국가" 라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선한 일을 한 사람을 보호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징벌하는 일반적 목적에서 보았을 때 적절한 것이고, 또 그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러한 역할을 위해서 수고를 해야 하니 역시 옳다고 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판단이다...

여기에서의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한 개념은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의 선과 악, 즉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고 하는 관점에서의 선과 악의 개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국가 개념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베푸시고 있는 은혜의 일부로 이해를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해를 주시고 공기를 주시며 또한 심장이 멈추지 않고 자동으로 계속 뛰도록 하셔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 중에 국가 제도를 두셔서 인간들이 스스로 보호하고 또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보면 이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의 그림이 좀 그려진다. 먼저 우리는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민주주의는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듯이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하며, 민주주의 자체가 우상이라는 사실도 또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의지하거나 인정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류 보편적인 은혜를 위해 국가 제도를 두었으며 국가 제도를 통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국가 체제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가 선택한 통치 체제가 민주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또 살리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녕을 위해 민주주의적 정치 체제를 활용할 필요는 있다. 하나님이 보편적 인류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과 은혜를 민주주의 틀 안에서 소개하고 또 반영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미국과 한국에 살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기에 민주주의적 제도적 틀을 활용해서 하나님의 보편적 가치를 전해야 할 것이다. 반면 중국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틀이 아닌 공산주의적 틀 안에 있기에 공산주의적 틀 안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군주제를 채택을 하고 있는 나라란다. (맞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이 나라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군주제 체제 안에서 역시 같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특정 정치적 틀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는 듯 하다. 물론 다른 정치 체제보다는 민주주의 체제가 우리들에게 훨씬 큰 자유를 주는 것은 틀림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구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민주주의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고 북한과 중국 공산체제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믿음이 충분히 이해도 가고 공감도 된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틀이 되었든 하나님의 나라와 부합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 도토리 키재기인 것이다. 결국 어떤 정치 체제가 되었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가치와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모습이며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가 불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모순인 것 같다. (http://yyht.tistory.com/1534  참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이 땅에 찾아오게 될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지배하는 그 때가 되면 이 모든 정치체제들은 모두 붕괴할 것이며, 그때에는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 때가 속히 오게 되기를...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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