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기쁨의 실재

지금 현재 제 삶의 모토를 한 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다면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 기쁨 찾아 삼만리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 같아요.. 한국에서의 경험 이후로 이 부분이 제 삶에 있어서 굉장히 크게 작용을 하고 있으니까요..

주제 : 자유와 기쁨의 실재

1. 자유와 기쁨에 대한 소개 (사 61:1-3)

이사야 61:1-3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예언으로 그 중심 메시지가 Exodus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게는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이지만 크게는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남을 입고 신원이 회복되며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은 이 자유와 기쁨이 어떻게 실현이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개인적으로 자유와 기쁨을 찾게 된 동기

교회에서 사역할 때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pressure가 있었다. 사역을 하면서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온갖 불만과 원망에 쌓여있는 나 자신을 발견을 했다. 문을 이사야 61장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자유와 기쁨을 주려고 왔다는데 나는 왜 예수님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

3.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찰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 3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문제이다.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아는데서부터 시작을 한 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를 살고있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누구인지를 누가 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알 수는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외부에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설명한다. 결국 누군가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구조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세상과 하나님이라는 통로.. 그 중에서 우리는 세상이 정해준 나라는 존재를 나라고 믿고 살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비극이 있다.

4. 성경 본문의 고찰

창세기 2장 15-17절

창세기 1-3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6절

창세기 3장 16절의 핵심은 이 땅에 고통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보통 이 구절을 여성에게만 적용을 시키려고 하지만 꼭 고통을 여성에게만.. 해산의 고통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것은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모든 고통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뒤에 남편을 지배하려 해도 남편이 다스릴 것이라는 부분도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보고 듣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도 꼭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약자와 강자와의 관계는 우리 주변에서 성별을 뛰어 넘어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창세기 3장 17-18

이 부분이 참 중요하다. 땅이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더 이상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제는 노동을 하여야만 먹고 살 수가 있다. 그 전에는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먹으면 됐는데 이제는 내 힘으로 나 자신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으면서 살도록 창조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과 땅이 같이 저주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공급이 끊깁니다.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찾아오게 됩니다.

죄의 결과가 굉장히 크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죄의 문제는 결코 내가 잘못하고 잘했고를 따지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왜곡된 진리가 더 큰 문제이다..

창조 당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전적이 공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함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죄고 말미암아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내쳐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상으로 내 몰리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함 그리고 그 공포와 불안을 떨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명제는 다시 창조 당시의 섭리로 회귀함을 의미를 합니다. 창조 당시의 섭리함으로 회귀라는 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조건 없는 공급함으로 우리가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인해서 이 땅에 들어온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해서 생기게 된 불안감.. 그러한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하는 병적인 강박관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경험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우리에게 여유가 생기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와 기쁨의 핵심은 죄악과 그로 인한 저주로 인해 왜곡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창조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에 있게 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왜곡이 일어나는지 한 번 볼께요.. 왜곡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왜곡입니다. 세상의 대 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이 자리에 계시는 대다수의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민영 자매님.. 민영 자매님은 누구세요??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나의 존재의 가치 문제와 연결이 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를 하고 내가 내린 정의에 나 자신을 맞춰어가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내린 나의 정의에 자신이 맞춰지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내린 나라는 정의에 지금 현재 자신의 능력이나 상태가 미치치 못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나 자신의 행복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가치관에 의존해서 정의를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존해서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 방법을 사용하던 변함없이 영향을 주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맞추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이들이 자랄 때 이야기인데요..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Stage가 바로 갓난 아기서부터 아이들의 Stage입니다.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support가 없으면 존재 자체에 위협을 느낍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먹여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Discipline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Discipline의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채찍과 당근법입니다.. 잘 하면 상주고 잘 못하면 벌을 주는 것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요.. 무엇이 잘 한 것이고 무엇이 잘 못한 것인지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는 거에요.. 아주 어린 시절의 아이들은 잘잘못을 따질 능력이 없습니다.. 부모가 잘 한 것과 잘 못 한 것을 결정을 합니다. 결국 부모의 가치관을 따라서 아이들이 길들여지게 되는 거지요..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부모말에 따르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부모한테 나 자신을 맞춰야겠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힘 센 부모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려 들고 결국 부모처럼 되려고 하는 거지요.. 지금 여러분들도 그렇고 여러분 아이들도 그렇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만들어진 옳고 그름의 개념들이 있을거에요.. 이거 엄청난 문제입니다..

일례로.. 저는 목사님에게 뭔가 상의 드리거나 말씀 드릴 일이 있을 때.. 목사님이 다른 누군가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면요.. 그냥 그 말씀 마치실 때 까지 기다립니다.. 그게 잡담이든 농담이든 상관 없어요.. 어른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저는 무조건 기다려야 해요.. 예전에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과 어머님과 제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어요.. 담임 선생님이 저를 무척 아껴주셨었고.. 저도 좋아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고 연락을 하거든요.. 두 분이 대화를 하시는데, 제가 대화에 끼어들어서 좀 까불었어요.. 어머님 안색이 변하시면서 어른들 대화에 끼어드는거 아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엄청난 위압감과 함께 공포를 느꼈어요.. 그 후로는 대화에 끼어드는거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그건 아니라고 머릿속에 박혀있어요.. 제가 선택해서 결정한 논리인가요? 아니에요.. 공포심과 함께 그때의 공포감을 피하기 위한 행동 패턴이에요..

제가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서는요.. 심리적으로 그때의 그 공포와 대면합니다. 그걸 이겨야 뭔가 한 마디를 할 수가 있어요.. 지금은 제 이런 행동 패턴이 어릴적 어머님의 영향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나중에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에게 뭐라고 가르칠까요? 제 어머니가 했던 말씀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어른들 대화 할 때는 끼어드는거 아니라고.. 아마도 저는 약간 히스테리를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했을거에요.. 제 아이가 그 말을 듣지 않을때 저는 간접적으로 어린 시절의 공포를 대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 말 들어야 해요.. 부모가 밥 안 주고 관심을 쏟아주지 않으면.. 죽는겁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제 어머니에게 맞춘겁니다.. 그 결정 과정에서 저는 없어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제가 무엇을 기뻐하는지.. 저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거지요..

커서 학교에 들어가면요.. 잘 했냐 잘 못 했느냐가 선 악의 개념에서 능력의 개념으로 바뀝니다. 학교에서는 여러 아이들이 경쟁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그 중에는 잘 하는 아이와 상대적으로 잘 하지 못하는 아이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학교에서는 뭐라고 가르치냐 하면요..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잘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주어진 과제들을 잘 해 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을 해 버리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여러분들이 보고 아셨으면 좋겠어요.. 경쟁이 좋은 거라고 가르칩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되었든 잘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한국 사회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나마 예전에 비해서 요즘 나아진 것은 예전에는 모든 학생들이 공부에만 매달렸었는데.. 요즘에는 뭐가 되었든 상관 없이 하나만 잘 하면 괜찮다고 가르칩니다.. 그것만 해도 사람들 숨통을 굉장히 많이 열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모두 일 중독자로 만들어버리는 사고에요..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는 일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그 말씀에 굉장히 많이 동의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성장하면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저에게는 없어요.. 그 기간동안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어요.. 결과적으로 저는 관계쪽에 굉장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꼭 누군가와 사이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저는 다른 사람 옆에 있는게 굉장히 불편해요.. 그게 그 사람이 싫어서 그런건 아니에요.. 좋아요.. 좋은데.. 그 사람과 옆에 있으면 뭘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썰렁하잖아요.. 그러니까 불편해요.. 처음 보는 분들의 경우는 정말로 불편해요.. 많이 친근한 사람하고도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어요.. 옆에 가까이 가는거 자체가 저한테는 공포에요.. 목회는요 80% 이상이 관계의 문제라고 이야기 합니다. 관계에서 실패하면 목회 성공하기 어려워요.. 저와 같은 케이스는 정상적인 루트로 따지면 목회하기 힘든 케이스입니다.. 계속해서 저 자신한테 물어봅니다.. 내가 가치있는 사람일까?? 목회하면 정말로 힘들게 근근히 목회를 하던지 아니면 실패할 확률도 높은듯 한데..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일까?? 어떠세요.. 제가 목회자로 섰는데 사람들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서 목회를 제대로 못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실패한다고 한다면.. 제가 무 가치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일 잘 하는 것 아닙니다. 능력 있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나라 가서는 무엇으로 경쟁 하시겠습니까?? 거기서도 서로간에 경쟁하면서 잘 하는 사람은 더 많이 상 주고 못 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여기시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요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거에요.. 하나님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관계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여성분들이 남성분들 보다는 좀 유리한거 같아요.. 보통 여성분들이 관계 중심적 사고를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 하고 잘 못하고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냥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한테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한테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한테 뭔가를 해 드리기를 바라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세상은요 이러한 하나님의 가치를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뭔가 열심히 해보라는 겁니다..

민영 자매님 누구십니까? 모르건, 준호, 현서 엄마인가요? 그건 민영 자매님께서 이 땅에 거하시면서 잠시 잠깐 하나님께서 민영 자매님에게 맡기신 Role일 뿐입니다.. 그건 민영 자매님이 아니에요.. 민영 자매님은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기 위해 만드신 창조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하나가 있는 모습 그대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설때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을 부르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기도 하는지 아세요?? 저 이번 학기 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우리 아들 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 승진하게 해 주세요.. 직장문제 해결해 주세요.. 이런 문제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면서 감당해야 할 역할들 중 일부일 뿐이에요.. 자신의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역할 붙들고 나가고 있는겁니다.. 역할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역할은 상황과 때에 따라서 잘 할 수도 있고 잘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목회 잘 못하면 교회 말아먹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저를 벌하거나 내 치지는 않을거라는 겁니다. 목회자라는 모습은 단지 하나님께서 맡겨놓으신 역할일 뿐이지 제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제 역할이 아니라 제 본질입니다.. 최선을 다 한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고 해서 이 땅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부당한 일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난 할 겁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와 판단 기준에 따라서 저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결혼할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대로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일 중심, 사역 중심, 능력 중심의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세상의 거대한 물결과 대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신 그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해야.. 능력이 있어야 인정을 받는 세상에서.. 우리는 일과 능력으로 세상에 의해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인정 받으면서 앞으로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왜곡 : 갓난 아기 문제 언급, 학교 교육문제.. 특히 시험문제 언급, 학교에서 요구하는 사항.. 열등한 아이와 우등한 아이 문제 언급.. 사모 문제 언급.. 내 아내에게 하고싶은 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잘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열심히 잘 사는 것이 사역의 본질이다.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점 언급..

계시록 4장 로마 황제와 하나님의 왕권 문제 언급.. 역할론 언급.. 역할을 벗어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라..

세상은 죽어라 죽어라 하고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Exodus의 드라마 위에 살고 있다.. 구원 문제는 우리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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