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하나님 나라
어머니 대리남편 요구되어지는 역할을 채울 Image of God
(관계) 대리부모 수 없기 때문에 자괴감이

착한아들, 공부잘하는 아들 들고 동시에 현실 부정,
아버지 무관심 반항심등이 싹트게 된다.
(규율)


선생님 모범생, (공부)





아이들 영웅(공부, 운동, 싸움, 놀이)





교회 모범 신앙인





이성 능력,





성경이 이야기 하는 회복과 관련해서는 일단 “나”라는 주제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제가 2006년 11월달에 비전교회에 와서 그 이후부터 이 “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었기 때문에 오래 계신 분들이라면 제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게 새삼스럽지는 않으실 거에요.. 하지만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오늘은 이 나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내”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정의가 되고 그렇게 정의된 “나”가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나”라고 하는 주제가 우리의 회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게 “회복”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꽤 핵심적인 내용이거든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주제는 나 자신의 가치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나”라는 사람은 항상 누군가의 관계 안에서 정의가 됩니다..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버지가 되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들이 되고,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는 학생이 되고 집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남편이 되겠지요... 여기까지는 사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연의 역할 이외의 다른 역할이 요구가 된다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관계에서 좋고 나쁨이 들어가게 되면 문제가 좀 달라집니다.. 제 경우를 예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저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가족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살펴보면 부모는 아이들의 생존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보통 아이와 어른을 나누는 잣대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고 나눕니다. 아이의 경우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른들의 경우는 사회적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이고요.. 따라서 갓난 아이들..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부모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이들에게 네가 어떠한 처지에 있어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고 끝까지 책임져줄게.. 라고 하는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가 바로 부모들의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분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라난 아이들의 경우에는 세상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또 내가 무엇을 하던 나를 받쳐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오는 안정감으로 삶이 굉장히 도전적이 됩니다..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적절한 훈계가 있었다면 정말로 훌륭한 신랑감, 신부감으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어머님이 저한테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쏟아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바라셨던 경우입니다.. 그래서 대리부모, 대리남편이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이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요구를 채워줘야 하는 거지요.. 어머님이 대리부모, 대리남편의 모습을 저에게 원한다고 한다면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모습으로 어머니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아이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해서 요구를 받게 되니까 어머니의 요구를 들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요구를 들어드리지 못하니까 아이가 받아야 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고..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제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보이지 않게 제 존재와 생명에 위협을 받습니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부정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지요.

아이는 아이답게 대해줘야 하는데 아이답게 대함을 받지 못하고 결국 abuse된 경우입니다..

학교 선생님들하고의 관계에서 보면 저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학생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학생이 아닙니다.. 그 중에 보면 잘 하는 학생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기 나름입니다. 저는 어떤 학생이었겠습니까? 선생님들의 경우는 학생들을 판단할 때 학업 성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 말 그대로 전인교육을 외치시면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길러내기를 바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습니다.. 저한테 요구되었었던 모습도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제 가정사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공부는 커녕 사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도 제대로 해가지 못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학생은 문제아입니다.. 문제아를 대하는 선생님들의 태도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인데.. 좀 없어져주었으면 하는 그런 학생인 거지요.. 그나마 문제를 만들어서 서무실에 불려 다니는 그런 학생이 아니었던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요?? 저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은 애초부터 될 수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아이들은 영웅을 원합니다. 뭔가 특출나고 잘 하면 대접을 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그런 구조였습니다.. 뭐 제가 자랄 때 세 가지 정도가 이슈였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남자 아이였기 때문에 싸움을 잘 하느냐가 하나였고.. 또 한 가지는 게임이나 운동을 잘 하느냐였고.. 다른 한 가지는 공부를 잘 하느냐였던 것 같아요.. 다른 건 다 못해도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잘 해도 나름대로 인정 받으면서 같이 어울려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뭘 해도 잘 못하니까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리면서 따돌리더군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항상 외톨이였던 거 같아요.. 영웅?? 저하고는 거리가 참 먼 이야기였습니다.

교 회 이야기 한 번 해 볼까요?? 요즘에 제가 Alpha에서 이야기 하는 핵심 주제가 기존의 교회들이 주장하던 틀을 깨는 것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성장해왔고..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모범 신앙인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고요.. 학생회 예배나 청년 예배 빠짐 없이 참석하는 것이 일단 기본입니다.. 그것 빠지면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상관 없이 문제아였어요.. 교회에서 들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토를 달면 안 되고 그냥 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그러면 그 사람은 문제교인 되는 거지요.. 사람들이 다 걱정하면서 기도해줍니다.. 사단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하면서요..

저에게 있어서 믿음의 전수자는 어머님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험하게 다루시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이라면 꾸뻑 죽는 분이셨습니다.. 교회 안 나가면 가차 없습니다.. 신앙인이 지켜야 할 틀을 깨는 일을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체벌하실 때 큰 원칙이 없이 체벌하셨었는데.. 신앙 문제에서 만큼은 원칙이 있으셨습니다.. 교회를 빼먹는 다거나 신앙인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았을 시에는 예외 없이 체벌이 날라왔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겉 보기에는 참 성숙하고 모범적인 교인으로 생각이 되었었지만.. 30살이 넘도록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없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그냥 무섭고 두려운 어떤 분으로만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게 참 싫었어요.. 가봐야 지겹기만 하고.. 열심히 기도는 합니다만.. 뭐 기도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과론적으로 교회가 요구하는 참된 모범 교인은 못 됐었던 거지요..

이성에 대해서 한 번 볼께요.. 사실 제 안의 상처와 어려움도 있었고.. 또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특수성도 있어서 제가 진지하게 이성을 만나서 교제하고 서로를 알아갈 기회를 얻었던 기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성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는 상당히 확실한 것 같아요.. 목회자를 남편감으로.. 또는 목회자를 사윗감으로 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저는 성경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 사람 관계 하는 것도 매우 서툴고요.. 결정적으로 저희 집은 돈이 없습니다.. 제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도 제가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따졌을 때 제 능력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길이 매우 막막하다는 것입니다..

결 혼까지는 안 가더라도 이성으로 교제하는 것에도 사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뭐 저하고 좀 알고 지내신 분들은 제 성격 아시겠지만.. 좀 따분합니다.. 생각이 깊고 매사에 심사숙고 하는 습관 자체는 매우 듬직한 느낌을 줍니다.. 많은 분들이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굉장히 안정되어 보이고 편안함을 준다고요.. 아마 목회자로서는 많은 분들이 제 그런 캐릭터로 인해서 좋은 점수를 부여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로 따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따분하고 재미없고.. 같이 있으면 맨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고.. 맨날 거룩한 이야기만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인거지요..

그러니까.. 여영환 전도사님 어떤 분이냐고 물어보면.. 참 좋은 분이셔..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럼 이성 친구로는 어떻냐고 질문을 하게 되면.. “어.. 잠깐만... 어.. 나 생각 좀 해보고.. 참 좋은 분이기는 한데...” 하면서 뒤에 negative한 response가 붙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데.. 어릴 때는 어땠겠습니까?? 이성으로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별로 없었던 거지요..

이 게 세상에서 정의되어지는 “나”입니다.. 물론 세상이 저에게서 요구하는 부분들이 저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세상이 요구하는 “나”는 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일이거나 힘든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요구에 “나”를 맞추려다보니 중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갭으로 인해서 스트레스와 열등감 우울증 등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born again하더라도 제 어머니의 부모, 남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집중력이 좋고 넉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제 어린 시절의 상황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성격이 어린시절의 불안함으로 인하여서 의심이 많고 세심한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교회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제 삶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함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는 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더랬습니다.. 제가 이렇게 별로 재미 없고.. 심각증 환자처럼 되어버린 것은..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제가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한다면.. 그걸 전들 어쩌겠습니까?? 이 모든 상황들은 제 의지 밖의 일인 것을요..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화가 나고.. 슬프고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그런 마음 속의 아픔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사용하는 방법이 이러한 role에서부터 뛰쳐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사용했던 주요한 방법은 사람들을 안 만나는 거였던 거 같네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역할을 강요하니까..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음으로 해서 그런 역할들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던 거 같아요.. 대인 기피증.. ^^; 어머니와 같이.. 항상 만나야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좀 소심한 반항을 했었고요..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변한다거나 아니면 기대되는 모습의 정 반대 모습을 보이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이제는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보아야 할 거 같네요.. 세상은 슈퍼맨을 원하는데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해야 했을까요??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제가 배우지 못한 것들.. 준비되어있지 않은 것들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제가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가서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고 경험해야 했던 것들을 다시 배우고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 시절은 그냥 지나간 거에요.. 어찌하면 좀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제 안에 있는 이런 짐들을 벗어버리고 좀 더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요.. 하나님이 일부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을 하는데요.. 우리가 누구를 닮아야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서 말하면요.. 우리가 맞춰야 할 대상은 다른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고를 완전히 뒤 엎어버리는 사고를 성경은 요구를 합니다.

정리해 볼께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어머니의 요구에, 학교의 요구에 아이들의 요구에 교회의 요구에 그리고 사회의 이성관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 왔고 그렇게 믿어왔어요..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고 제 모습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제 어머니가 요구했던 것은, 학교가 요구했던 것은, 아이들이 요구했던 것은, 교회가 요구했던 것은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이성관이 요구했던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어요.. 애초부터 저는 덜 떨어진 놈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지요.. 이게 저한테는 고민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멋지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성경은 저에게 이러한 세상에 맞춰서 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제 모습으로 제시하면서 거기에 맞춰서 살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부모님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은 어찌되나요?? 그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요구 자체가 잘못된 요구들이 많아요.. 제가 맞춰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요구들이 대다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대리남편, 대리부모 그리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요구하시면서 기대하셨던 어머님의 요구 자체가 잘못된 요구였던 것이고요.. 게다가 어머님도 사실은 하나님에게 맞춰서 살아가야 할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 어머니에게 맞춰야 할 일이 아니라 어머니와 저거 같이 하나님께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패러다임 쉬프트를 요구 합니다. 앞으로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가치관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을 요구를 합니다..

이 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회복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세상에 찌들어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본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맞춰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가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로 다가옵니다.. 다음 시간에는 거듭남이라는 개념과 아울러 패러다임 쉬프트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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