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뭐죠?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감동을 받으셨는데.. 우리 교회가 찬양을 통해서 부흥하게 될 것이라는 감동을 하나님이 주셨답니다.. 그래서 찬양쪽으로 목사님께서 강하게 support를 해 주시고 계시는데.. 흠.. 사실 이 중요한 때 제가 찬양팀을 맡게 되어서 부담 만빵입니다.. 사실 제가 곡조 있는 찬양쪽에는 재주가 많지 않아서..

어 쨌든.. 찬양을 하려면 찬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아야겠지요 ^^; 사실 찬양, 예배, 교회.. 이런 영역은 일명 종합예술이라고 해야 할까요? 신학이라는 학문의 분야에서 기초학문 분야가 아닌 응용학문 분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비로소 정의할 수 있는 topic들인데.. 저는 아직 성경 전체를 제 손바닥 보듯이 볼 수 있는 정도의 내공이 아니라서 찬양은 이런 것이다라고 general definition을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냥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제 나름대로 알고 있는 찬양의 개념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찬 양에 대해서는 한 가지 misconcept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먼저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보통 찬양을 Secular music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생각을 하셔서 Christian music정도로만 정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음악은 음악인데.. 기독교쪽에서 통용되는 주제를 담고있는 음악정도로 이해를 하는 것이지요.. 찬양을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찬양할 때 상당히 많은 부분이 distort되게됩니다.. 찬양을 할 때에 음악적인 부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고요.. 빵빵한 찬양팀과 부드러운 분위기를 최고로 치면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찬양이 looking down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가령.. 온누리교회의 찬양은 진짜 은혜롭게 좋은 찬양이 되어버리지만.. 피아노 하나로 반주하는 많은 개척교회의 찬양은 은혜롭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런 찬양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자면.. 이건 잘못된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찬양은 무엇일까요? 아직 성경 전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찬양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사용한 방법론은.. 찬양이라는 단어를 검색이 가능한 성경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쭉~ 훑어보았는데.. “찬양” 이라는 단어가 검색이 된 구절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구원”이라는 주제가 거의 같이 딸려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교회의 표어 구절인 시편 98편을 한 번 볼까요? 누가 좀 읽어주시겠어요?? 2절까지만 보겠습니다.

98:1 새 노래로 주님께 찬송하여라.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시다. 그 오른손과 그 거룩하신 팔로 구원을 베푸셨다.
98:2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알려 주시고,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뭇 나라가 보는 앞에서 드러내어 보이셨다.

1절에서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 나오는 구절에서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나오는데..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가장 잘 나타낸 구절은 시편 9편인거 같습니다.. 9편 11절부터입니다.

9:11 너희는 시온에서 친히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9:12 살인자에게 보복하시는 분께서는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9:13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죽음의 문에서 나를 이끌어 내신 주님,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받는 고통을 살펴 주십시오.
9:14 그렇게 하시면 주님께서 찬양 받으실 모든 일을 내가 전파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그 구원을, 아름다운 시온의 성문에서 기뻐하며 외치겠습니다.

시편 9편 11절에 보면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뒷 구절들에 그가 하신 일들이 나열되는데.. 결국은 구원이라고 하는 큰 주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한 번 볼께요..

38:16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를 낫게 하여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픔이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
38:17 주님께서 이 몸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38:18 2)스올에서는 아무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또는 '무덤' 또는 '죽음'
38:19 제가 오늘 주님을 찬양하듯,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일러줍니다.
38:20 주님, 주님께서 저를 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수금을 뜯으며,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뭐 제가 exegesis를 해 보지 않아서 제 해석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은 단순히 literal death만을 의미하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사실 죽음 또는 무덤을 이야기하는 단어입니다만 그 사용되는 경우를 볼 때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예가 많습니다. 즉 disgrace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스올로 내려간다는 것은 구원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 구절의 context 자체도 이러한 내용을 반증합니다.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는 죽음을 disgrace로 인식하고 살아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인식합니다. 이 구절에서 확신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시편 6편에 다시 나옵니다.

계시록 14:3절을 보게 되면 더 확실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4:3 그들은 보좌와 네 생물과 그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땅에서 구원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새 노래가 시편 33편과 98편에 나오는 새 노래와 같은 맥락의 단어인데..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십사만 사천 명으로 제한되는데.. 그 십사만 사천명은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찬양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과 다시 연결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구원을 받은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찬양 할 때는 어떻게 찬양합니까? 아름다운 곡조가 있는 노래로 애절하게 찬양하나요?? 시편 8편 2절 말씀을 한 번 볼까요?

8:2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구조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그 뒤에 구원을 알리는 내용이 뒤따라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찬양하는 주체가 나옵니다..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어린이와 젖먹이들입니다. 어린이들이야 간단하고 쉬운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만.. 젖먹이들이 노래한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이사야 한 번 보겠습니다.

43:19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43:20 들짐승들도 나를 공경할 것이다. 이리와 타조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내가 택한 내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리와 타조가 이스라엘을 다르게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기 나오는 들짐승은 그냥 들짐승일 뿐입니다. 타조가 곡조에 맞춰서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리가 현란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 한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찬양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곡조가 아닙니다.. 찬양은 Secular Music의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Christian Music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을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지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진정한 감사의 한 마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마음 자체가 너무나도 훌륭한 찬양이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것입니다.. 이게 찬양입니다..

찬양에 대해 한 가지 실질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류수영씨가 부른 찬양 중에 너를 축복하리라..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 주 하나님
네 모든 것을 다 예비하시니
담대하라 주 너를 붙들어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시리니
어둡고 외로운 광야에서
네 영혼 애타게 부르짖을 때
너를 사랑하사는 주님
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네
너를 축복하리라 너를 축복하리라
땅의 모든 백성 너를 인해 복을 얻으리
너를 축복하리라 너를 세우리라
너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이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일까요 아닐까요?? 헷깔립니다. 우리를 위로 하는데에 찬양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구원사역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describing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찬양 자체가 너무나도 훌륭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질문 한 가지를 던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구원 받으셨습니까? 구원 받은 기쁨이 넘치십니까? 지금까지 제 말씀을 들으셨다면 구원에 대한 기쁨이 찬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찬양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쁨입니다..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있다면 어떤 찬양을 하더라도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안에 구원에 대한 기쁨이 없다면 어떤 찬양을 해도 밋밋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구원의 기쁨에 반응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멜로디에 심취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여러분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고 구원의 핵심과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시고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려보십시오.. 다음 시간부터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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