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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이란 무엇인가? 한국 초대교회 역사에 나타난 두 종류의 부흥운동1)
황대우  교수(고신대 교수)

1. 서론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교회의 본능이므로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그 부흥이 과연 우리 모두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가? 부흥을 양적 성장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부흥을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으로 구분하고 균형적인 성장, 즉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부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혹자는 만일 둘 중 더 시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양적 성장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로는 양적 성장이 선행되어야 질적 성장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장에 과연 이러한 구분이 정당한가? 몸이 비대해진 것을 과연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몸은 컸으나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비정상인으로 분류하지만,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체구가 남보다 작다고 비정상으로 분류하지는 않지 않는가? 성장과 성숙은 다른 것인가?2) 성장은 외적이고 양적인 것을, 성숙은 내적이고 질적인 것을 의미하는가? 이런 구분은 필요한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인가?

부흥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안 머레이는 부흥에 관한 자신의 한 책에서 부흥을 세 가지 견해로 분류하는데, “첫 번째 견해는 “부흥의 단회성”이고, 두 번째 견해는 “부흥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며, 세 번째 견해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3) 머레이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면서 부흥을 “더 많은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는 것” 즉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더해지는 것”으로 정의한다.4) 또한 자신의 다른 책에서 머레이는 미국의 부흥 역사 연구를 통해 부흥을 두 종류, 즉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어”나는 “부흥(Revival)”과 “인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부흥주의(Revivalism)”으로 구분한다.5)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다. “부흥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인간에 의해 의도되거나 기획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흥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자동적인 원리나 법칙은 불가능하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은 분명 인간을 통해 일어나는 인간의 일이다.7) 그렇다면 부흥에는 신적인 측면이 있고, 인간적인 측면이 있는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부흥 속에 나타나는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적인 측면을 담당하고 인간은 부흥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인가? 정말 부흥이란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와 능력이 베풀어질 때 일어나는 것인가? 한국 교회의 오순절이라 부르는 1907년의 대부흥 운동과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은 모두 그와 같은 부흥에 속하는 것인가?
본 논고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모두 세세하게 분석하고 답변하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이런 질문들을 위한 전체적이고 공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과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 사건들, 그리고 한국교회 초기에 일어난 부흥을 간략하게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 초대 교회에 나타난 부흥운동에도 적용하게 될 것이다.

2. 교회 설립과 오순절 사건

예수님께서 공적인 구원사역을 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려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날마다 천국도래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엄청난 기적도 보여주셨다. 모이는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었다. 그들은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급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라고 외치며 찬양하며 따랐던 수많은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에는 모두 흩어졌으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각기 제 길로 가고 없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시지 않으셨다. 스스로 교회를 세우시지 않으신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수님은 마치 순회전도자처럼 여러 지역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8)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약속대로 베드로를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이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의 능력과 부흥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감 없이 용감하게 전했다.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을 전후하여 가장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의 태도였다. 이전과는 달리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 변화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할 때 하루에 삼천 명 혹은 오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제자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다.(행 2:37) 그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대답했다.(행 2:38)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시절에는 별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책망만 듣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 복음을 새롭게 배우고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는 영적 갱신을 통해 오순절 대부흥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였으나,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경험한 그와 같은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오순절 대부흥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지만 이 부흥으로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거대 교회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즉 로마 전국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수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한꺼번에 회개하여 새로운 제자들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먼저 그들을 조직하여 거대 교회를  만든 다음, 이 교회를 거점으로 세계 복음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대부흥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잠시잠깐 모였으나, 곧 다시 전국 각처로 흩어졌다. 오순절 대부흥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가 대교회가 되기는커녕,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신자들, 대부흥의 주역이었던 이들조차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대부흥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숫자나 재정적으로 볼 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작고 가난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작고 가난한 교회가 되었다고 최초의 교회, 어머니 교회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희생되었던 것이다. 아니 스스로 희생했다. 자신을 나누어 줌으로써 작아지고 가난해지는 어머니 교회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도 이렇게 수많은 교회들이 산재하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교회 역사상 최초의 대부흥 역사, 사도행전의 오순절운동은 한 곳에 모으기 위한 부흥운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세계 각처로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을 사람 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 가지, 즉 준비된 사람들, 기도,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제비 뽑았는데, 그가 맛디아다. 그들은 예수님의 약속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전혀 몰랐다.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기도하면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드디어 오순절이 되었을 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 위에 임하자 그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은 이렇게 시작 되었고 이 사건은 하루에 삼천 명 혹은 오천 명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는 대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대부흥은 약속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을 때 일어났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공개적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했다. 그리고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세 가지 요소, 즉 준비된 사람과 기도와 말씀이 부흥을 일으키는 충분조건인가? 준비된 사람이 기도하기만 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임하고, 그들이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반대로 예루살렘에서처럼 가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준비된 사람이 없기 때문이거나,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성령 충만한 설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사도행전은 부흥 공식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성령행전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12제자, 즉 12사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의 행적만, 그것도 초기 행적만 기록하고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인 이유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진두지휘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릴 수는 있으나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성령을 임하게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무당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무당은 신내림의 주체이다. 신내림은 무당이 얼마나 영험하고 강력한가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관계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 하나님이시다. 임재의 때와 장소를 결정하는 것을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달려 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함과 열정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도 열심을 낼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고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와 말씀선포 즉 복음전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한다고 해서 오순절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부흥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초-중세의 교회 부흥과 종교개혁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다. 박해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으나, 소멸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수는 점차 많아졌다.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 Tertullianus)의 순교 법칙대로 되었다: “우리가 당신들에 의해 추수 될수록 우리는 훨씬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그 씨가 그리스도인들의 피기 때문이다.”9) 로마 제국의 칼날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희생 제물로 삼았지만, 결코 기독교를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의 칼날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죽어간 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복음으로 정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핍박이라는 십자가 아래서도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이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부흥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핍박하던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 Constantine)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종교로 공인한 후 수십 년에 걸쳐 제국은 종교다원주의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변모해 갔으며, 결국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하나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초기부터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10) 체제로 정착한 반면에, 서로마 제국은 5세기에 멸망한 후 오랫동안의 정치적인 혼란을 겪은 후 신성로마제국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명목상으로는 확실히 교황황제주의(Papo-caesarism)11) 체제를 확립했다. 비록 교회와 제국의 관계는 달랐지만 동로마의 비잔틴 제국이든 서로마의 신성로마 제국이든 그들의 중세 천년은 강력한 기독교 왕국의 시기였다. 즉 두 제국이 허용한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뿐이었기 때문에 천년의 중세 역사 속에서 두 제국의 교회는 더 이상 오순절 사건과 같은 부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수도원을 포함한 교회의 개혁이 중세 교회 역사의 주된 화두가 되었고 이런 개혁에 대한 외침은 때로 교회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전락하지 않도록 방지하거나, 교회의 타락을 잠시 멈추어 서게 할 수는 있었지만, 방향을 선회시키거나 성경적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못했다.
황제 중심의 1일 독제체제를 유지했던 비잔틴 제국이 1453년 터키의 손에 멸망함으로써 천년이라는 기독교 제국의 역사를 마감한 반면에 봉건체제 속에서 황제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던 서쪽의 신성로마제국은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이라는 내부적인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중세 시대의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요구했고, 말씀에 충실한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결코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이 요청한 것은 말씀을 통한 개혁이지 새로운 교리를 통한 혁명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의 기원과 활동은 중세 유럽의 여느 개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는 너무 달랐다.

수도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통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바람은 신성로마제국을 강타하는 태풍으로 돌변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던 해에 구텐베르크(Gutenberg)가 쾰른(Köln)에서 발명한 인쇄기술이 16세기 사건에 한몫을 감당했다. 종교개혁가들을 사로잡은 말씀의 칼은 당시 교회가 가르친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통적인 제도와 신앙 습관에 이르기까지 중세 교회의 모든 면들을 낱낱이 해부했다.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신성한 라틴어 성경은 자국어로 번역되어 백성의 손에 쥐어졌다. 지식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라틴어 예배는 무식한 백성도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어로 집전되었다. 거부할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중세의 역사적 신앙, 비인격적 신앙, 집단적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촉구하는 살아 있는 신앙, 인격적 신앙, 개인적 신앙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구원의 근거는 죄인의 부단한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공로, 즉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라는 진리의 재발견은 수많은 서부 유럽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던, 그러나 마른 나무 같던 로마교의 교리와 구습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과감하게 벗어 던졌다.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를 넘어서 세계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을 일으킨 열쇠는 당대의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들, 권세가들, 혹은 종교개혁가들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대의 정치나 사회적 구조, 혹은 경제 문제에서 발견되는 것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에 붙잡힌 그리스도인의 양심이었다. 인간적인 양심이 아니라 신적인 양심이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취소할 수 없으며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12) 이 말은 자신을 심문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1521년 보름스(Worms)에 소집한 회의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루터의 최종 답변이다. 이것은 루터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이후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될 모든 종교개혁가들의 입장을 웅변적으로 대변한 종교개혁 선언문과도 같다.

말씀에 사로잡힌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말씀에만 순종하기로 작정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신앙 양심의 승리였다. 그것은 말씀의 승리였다. 즉 말씀 사건이었다. 마치 하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오순절 약속의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난 베드로가 자신을 위협하는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섰을 때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언제나 말씀과 함께, 그리고 말씀에 따른 순종이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누구도 자신들의 시대에 일어난 그 종교개혁이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16세기 종교개혁은 잠자던 중세 유럽 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 영적 대각성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유럽의 대부흥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종교개혁은 유럽인의 영적 대각성을 넘어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근거한 세계 선교사명을 재발견하는 결과를 낳았다.

4. 미국교회사 속에 나타난 부흥

미국 교회사 속에서 부흥은 흔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 대표되는 18세기의 1차 각성운동과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로 대표되는 19세기의 2차 각성운동으로 크게 구분한다. 이 두 운동의 근본적인 차이는 칼빈주의자인 에드워즈와 알미니안주의자인 피니 사이의 차이인데, 이것은 하나님 주권의 결과인 신적 부흥과 의도된 노력의 산물인 인위적 부흥주의의 차이라는 것이다.13)  필자는 미국 교회의 부흥 역사를 쉽게 개관하기 위해 이러한 일반적인 구분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이 부분을 위해 이안 머레이의 책 [부흥과 부흥주의]을 주로 인용할 것이다. 머레이는 미국 교회의 부흥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14)

첫 번째 시기(1620년대-1858)의 부흥관: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어난다는 부흥관이 유일한 견해였다.
두 번째 시기(1858-1958)의 부흥관: 부흥은 인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부흥주의가 등장했다.
세 번째 시기(1958~현재)의 부흥관: 부흥(revival)과 부흥주의(revivalism)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책에서 머레이는 세 시기 모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1750년대의 새뮤얼 데이비스(Samuel Davis. 1723-)로부터 시작하여 1858년까지의 부흥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북미 신대륙의 부흥의 첫 시기를 1620년대부터 잡고 있지만, 1750년 이전의 1차 각성운동에 대한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 시기까지 다룰 경우 취급범위가 너무 넓어진다는 이유로 서술을 생략했고 세 번째 시기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았다.

머레이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역사에서 부흥과 다른 부흥주의의 탄생을 1800년 이후 켄터키에서 발생한 부흥 역사와 연관된 것이며 그 이후 오래지 않아 “새로운 부흥의 기술”이 미국 남부를 비롯하여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15) 이러한 부흥주의 현상은 신대륙에서 18세기 말까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를 막론하고 지배적이었던 칼빈주의 신학이 점차 약화되고 대신에 19세기 초반부터 감리교를 중심으로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신학이 서서히 득세함으로써 부흥주의가 조장되고 옹호되었다는 것이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레이는 1857-1858년 사이에 일어난 영적 대각성을 참된 부흥으로 간주함으로써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어난다.”는 구학파의 견해를 적용할 수 있는 시기를 1858년으로 정했다.17)

머레이에 따르면 1830년대까지 부흥에 대해 오직 한 가지로 정의된 견해 즉 부흥을 “하나님의 영이 주권적이며 편만하게 부어져서 하나님 나라에 많은 사람이 더해지게 되는 역사”로 보는 견해뿐이었다.18) 그리고 부흥에 대한 이러한 구학파의 견해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 것은 19세기 초중반에 찰스 피니가 주장한 신학파 부흥관의 등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피니는 자신의 책 [신앙 부흥에 대한 강좌(Lectures on Revivals of Religion)]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19)

목회자들이 부흥을 발생시키기 위해 채택한 수단들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부흥이 조장되고 고무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목사들은 부흥이 갑자기 임하는 빗줄기처럼 때론 이 도시에서 때론 다른 도시에 그렇게 온다고 생각했다. 목사들과 교회들은 이웃 도시에 소나기가 쏟아질 때, 자기 도시에도 그런 소나기를 내리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의미를 본래 의미에서 왜곡해서 매우 다른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이 어떤 사건들을 독재적으로 계획하고 섭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하나님의 영은 이성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부흥을 발생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선물로 임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의 힘으로 부흥을 조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평상시의 방침을 따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기에 부흥이 임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조장하려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야말로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흥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부흥이 조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원하고 준비하기만 하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코 기적과 이적처럼 신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니의 신학파 부흥론에 따르면 부흥이란 단순히 그것을 열망하는 인간의 열성적인 준비와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5. 한국교회 초기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

1) 1907년의 대부흥20)

한국교회 역사에도 사도행전의 오순절로 평가되는 대부흥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1907년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이 대부흥 사건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당시 장로)가 있었다. 사경회를 위한 기도모임과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경회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선포되는 말씀 앞에 거꾸러졌다. 이것에 대해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마다 우리는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높이 들었고, 그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셨다.”21) 1907년의 대부흥은 말씀이 살아 역사한 성령의 사건이었다. 사경회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던 묵은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민비가 시해되고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일본의 강요로 하야하는 불행을 겪으면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경회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으로 도전하셨다. 말씀은 살아서 그들의 골수와 폐부를 찔러 쪼개었다. 그들은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죄를 애통함으로 고백했다. 자신의 영적 게으름과 위선을 통회하고 자복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 앞에 닥친 국가적 불행이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 때문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말씀 앞에 거꾸러져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 회개의 역사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교회회개운동이 되었다.

마르다 헌트리(Martha Huntley)의 평가처럼 1907년 “대부흥 운동은 비기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운동이 아니었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영적 갱신운동”이었다.22)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 뜨거운 영적 갱신운동은 이제 더 이상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교회 내의 각성과 갱신은 교회 밖에 있던 많은 불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였다. 갱신운동은 어느새 교회 밖의 사람을 위한 부흥운동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상조차 하지 못한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23)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온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에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홀연히 시작된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아무도 이러한 일을 하나의 운동으로 기획하지 않았고, 회개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때에도 그것을 교회 부흥운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가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이 있기라도 한 듯 일사분란하게 이 갱신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을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의 역사였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유럽에서,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1907년 한국 땅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2)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24)

영적 갱신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2년 정도 지나자 내적 갱신에 대한 뜨거움도 점점 식어갔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세 사람이 1909년 초에 부흥의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5만 명을 회개시키자는 제목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1909년 10월 8-9일에 개최된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공회인 한국복음선교총회(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는 “올 해에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께로(1,000,000 souls for Christ this year)”라는 슬로건을 채택하고 1910년 10월 9일까지 1년 동안 구령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의했다. 당시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모두 20만 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구령운동의 목표는 거의 달성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성령께서 보여주신 형언할 수 없는 교회부흥의 역사를 경험했다. 아무도 계획하거나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전국 교회가 동참한다면 그 결과는 몇 배로 폭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성령의 기적이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교회사 속에서 1910년은 백만명인구령운동의 해가 되었다.

1910년에 한국교회는 백만 명을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정이 어려운 사람은 시간을 바쳤다. 이것이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소위 “날연보”이다. 더불어 엄청난 물량의 문서배분운동이 있었다. 가가호호 방문 전도와 노방전도에도 열심을 내었다. 또한 수많은 부흥강사들이 국내로 초청되었고 그들은 발바닥에 물집이 날정도로 전국을 돌며 순회부흥회를 개최했다. 백만명구령운동은 일부 지역이나 일부 교파만의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동참한 대대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 한 곳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그 주변의 교회들이 함께 동참하도록 종용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사들에게 있었다.25) 그들은 거의 모두 마치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이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결과는 목표와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26) 하지만 이 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평가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사가들도 선교사들의 이러한 평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액면대로 평가하자면 이 운동은 실패작이다. 아니 실패작 정도가 아니라, 순수한 성령의 역사를 불순한 인간의 역사로 변질시키는 교회왜곡, 부흥왜곡의 원조이다.

6. 평가 및 결론

1910년의 백만명구령운동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27)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운동은 한국교회에 심각한 부정적인 유산을 물려주었다. 1907년 대부흥 사건은 갑자기, 그리고 영적 순리에 따라 일어난 것인 반면에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은 미리 계획된,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운동이었다. 1907년에 시작된 대부흥은 교회 내의 영적 각성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당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은 한국 백성에게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의 빛을 던진 사건이었다. 한국 땅에 일어난 갑작스런 바람, 갑자기 휘몰아친 돌풍이었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1907년의 이러한 부흥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교회가 목표로 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교회 내에 있는 교인들의 영적 각성과 갱신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1909년 중반부터 부흥은 점차 결과에서 목표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갱신에 뒤따르는 부흥이 아니라, 부흥을 위한 갱신이 요구되었다. 숫자의 증가가 성장의 결과가 아닌 목표가 되었다. 교회의 모든 것은 점차 부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갔다. 한마디로 1907년 대부흥의 신적 역사는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을 거치면서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역사로 변질되고 왜곡되었다. 이러한 변질과 왜곡은 1907년의 사건과 1910년의 운동을 동일한 사건 내지는 연속적인 사건으로 묶어서 평가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비호되고 조장되었다. 1910년 이후부터 한국교회는 부흥회가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나타난 결과로 평가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교회 부흥의 진정성은 양적이냐 질적이냐, 혹은 양적인 동시에 질적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선물을 언제 어떻게 베푸실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 즉 부흥을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기다려야 한다. 부흥의 진정성은 부흥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논리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는 이원론적 결론을 정당화하거나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교회가 쉽게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교회부흥의 주체와 우선순위 문제를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정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나도 평범한 성경 진리이다. 그리스도인이 부흥을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부흥을 자신의 때에 자신의 계획에 일치하는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때에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깨어서 기도하면서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사로잡히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사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서 영적인 갱신이 일어날 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진정한 부흥을 시작하신 것이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부흥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로 여기고,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으로 구분하여 마치 양적 성장만이 부흥인 것처럼 여기는 불행한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백만인구령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1910년 이후 한국교회는 부흥에 대한 새로운 전통이 생겨났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결과를 목표로 설정하고, 인위적인 고취심을 성령의 감동하심과 혼동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조직적인 선동으로 대체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헌신적인 교회일치운동을 지분 나누듯 갈라먹기 식 연합운동으로 변질시키고, 나타난 현상과 양적 결과에 따라 성령의 은혜와 역사의 크기를 저울질하는 이상한 부흥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 개념의 일차 요구 조건은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뛰어난 인간의 능력이다. 마치 얼마나 큰 은혜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자유로운 손에 달린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인간의 효과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보다는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런 사람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지상교회를 통치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모인 자들의 모임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자리는 어떤 위대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어떤 충성스러운 교회나 교단도, 어떤 헌신적인 기독교 단체도 대신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 개인의 주인뿐만 아니라, 온 교회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때 어떤 개인이든, 교회든, 교단이든, 기독교 연합단체든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찬탈한 그리스도의 자리를 그리스도께 다시 돌려드릴 때 바로 그곳에서 회개와 각성과 갱신이 일어난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이란 수고에 대한 상급이나 댓가가 아니다. 또한 선물이란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인 부흥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유사품을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만 결코 진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선물인 부흥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을 경험하는 자는 들내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려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돌려드릴 것이다. 모든 것이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라고! 그리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갱신의 열정이 더욱 뜨거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일으키신다. 둘째로 부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로 부흥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다. 넷째로 부흥은 조건적인 상급이 아니라 은혜로운 선물이다. 다섯째로 부흥은 말씀에 사로잡히는 사건이다. 여섯째로 부흥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 갱신이다. 마지막으로  부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적 능력이다.

<각 주>
1) 본 논고는 “부흥은 인위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제목으로, 2007년 2월 5일자로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에 게재한 글을 증보하고 각주를 단 것이다.
2) 이런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때 사도행전의 역사를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에베소서 4장 11-16절의 말씀은 교회의 질적 성숙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서창원 역(부흥과개혁사, 2005), 29-51. 원제목: Iain H. Murray, Pentecost-Today?(The Banner of Truth, 1998).
4)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51-57.
5)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신호섭 역(부흥과개혁사, 2005), 19-21. 원제목: Iain H. Murray, Revival and Revivalism(The Banner of Truth, 1994).
6)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생명의양식, 2007), 79.
7) 이상규 교수는 “부흥에는 인간을 포함하는 요소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이중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을 “농부와 추수의 관계”로 본다. 참고.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79.
8) 이 성경 구절에서 “이 반석”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다. 이 반석을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보기 시작한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가들의 성경 해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9) Tertullian, Apologeticum, 50.13: "plures efficimur, quotiens metimur a vobis: 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
10) 황제교황주의란 로마 제국의 황제가 제국의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즉 교회가 국가 아래 있는 정치형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에서 교회의 최고 직분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
11) 교황황제주의란 동로마 제국과 달리 서로마 제국의 후신인 신성로마제국의 정치형태인데,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이기 때문에 지상의 모든 권세, 즉 교회의 최고권뿐만 아니라, 국가의 최고권도 가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명목상으로는 황제가 교황 아래 있었다.
12) 헤이코 오버만,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이양호 &황성국 공역(한국신학연구소, 1995), 305-307. = Heiko A. Oberman, Luther, Mensch zwischen Gott und Teufel(Severin und Siedler, 1982), 216: “Mein Gewissen ist im Wort Gottes gefangen. Somit kann ich und will ich nicht widerrufen, denn gegen das Gewissen zu handeln ist weder sicher noch heilsam. Ich kan nicht anderst, hie stehe ich, Gott helff mir. Amen.” 라틴어 원문은 WA 7, 838 참조.
13) 참고.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97-99.
14)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19-23.
15)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293.
16)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275-291, 457-496.
17)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14-528.
18)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61.
19)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379-380에서 재인용.
20) 이 주제에 대해서는 박용규 교수의 방대한 저술을 참고하라. 박용규, [평양 대부흥운동](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그는 448-450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성장에 대한 특징을 4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는 1907년 이전의 부흥이 국지적이었던 반면에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한 부흥운동은 “전국적인 부흥운동”이라는 점, 두 번째로는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룩한 교단은 감리교 선교회 특히 남감리교 선교회였다”는 점, 세 번째로는 “부흥운동이 두드러진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 마지막 네 번째로는 “부흥운동이 교회의 교세의 성장뿐만 아니라 사역의 확장과 다양성, 그리고 사역의 확장을 불가피하게 초래해 단순히 교회 성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21) 마포삼열, [아시아와 선교](서울, 1976), 84. 김영재, [한국교회사](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122에서 재인용.
22) 마서 헌트리,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 차종순 역(서울: 목양사, 1985), 273.
23) 마서 헌트리,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 259: “대 부흥은... 무슨 세부적인 계획이나 조직을 통해서 된 것도 아니고, 이 운동은 순수한 기도회로부터 시작해서 진행되었다.”
24) 이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로는 다음 참조. 박용규, [평양 대부흥운동], 543-655.
25) 마서 헌트리는 자신의 책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 271에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선교사들이 이번 대 부흥운동에 있어서 전적으로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선교사들이 종교적인 운동을 조직해서, 실천에 옮기기까지 처음부터 밀고 나간 완전한 한 예가 있다. 이 운동이 소위 말하는 1910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다.”
26)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I(서울: 기독교문사, 1989), 281: “그러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전도방법과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신통치 못하였다.”
27) 백만명구령운동의 긍정적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박용규, [평양 대부흥운동], 642-655.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I,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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