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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링크에서 가져왔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혹시 사이트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일단 내용은 스크랩을 해 놓습니다만.. 직접 가셔서 읽어보세요.. 위의 사이트에 접속하신 후 -> 유럽 전쟁사 -> 카이사르 & 클레오파트라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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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

로마 출생. 시저라고도 한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의 하나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屬州)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三頭同盟 : 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執政官)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롤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전쟁이 발발하였다(BC 48년 10월-BC 47년 3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이어서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BC 46년 4월)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다. 다시 BC 45년 3월에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BC 49년 이래의 내란의 막을 내렸다.

이로써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 ·간척 ·항만 ·도로건설 ·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년 3월 15일).

그러나 카이사르가 취한 방향, 즉 도시국가에서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 로마를 지배 ·통치하는 데는 강력한 한 사람의 힘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 즉 군사독재의 필연성은 그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 의한 제정(帝政)의 수립으로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운명의 여신과 함께 있다고 확신한 카이사르는 ‘운명의 총아’로 구가되었다. ‘인사(人事)를 다하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카이사르였다.
그는 또 자신의 정적(政敵)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인자한 사람’으로도 알려졌다. 카이사르가 인정이 많은 것은 그의 본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책적 의도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어떻든 간에 융화적인 자세는 자신의 세력권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돈을 빌리는 천재라고 일컬어진 그는 또한 인간적 매력도 풍부하여 뛰어난 웅변술과 함께 인심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실전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군략을 짜내는 장군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인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민중파 정치가로서 사회개혁의 실효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1급의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갈리아 전기(戰記)> <내란기>는 간결한 문체와 정확한 현실파악 등으로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공화정권의 파괴자, 또는 반대로 제정의 초석을 굳힌 인물 등, 정치가로서의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구구하다. 풍부한 인간성, 그의 최후의 비극성 등 그 인간상에 대하여도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으로 다루어졌다.

성품과 평가

카이사르는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패배한 적에게 너그러웠지만, 그럼에도 그 너그러움은 적들의 애정을 얻지 못했다. 그는 지적 능력을 전투에 적용해 눈부신 승리를 거둠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비록 사랑스럽지는 않았지만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인물이었다.
그의 정치적 업적에는 배후 공작이나 선전 같은 사소한 기술뿐만 아니라 행정력과 통솔력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필요로 했다. 이 모든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명인이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정치적 야망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했다. 그는 패배한 정적들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이 너그러움은 그가 암살당한 하나의 원인이었다(정적들에게 무자비했던 술라는 사임하고 편안히 죽었음).

카이사르의 천재성이 그의 정치적 야망이 요구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또 하나의 분야는 저술이었다. 이 가운데 그의 연설문과 편지 및 소책자는 사라졌고, 갈리아 정복과 내전에 대한 그의 보고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카이사르는 유명한 웅변가인 호르텐시우스와 키케로가 활동한 시대에, 차례로 경쟁하면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훌륭한 대중연설가로 손꼽혔다. 카이사르의 연설과 저술은 사라진 것도 있고 현존하는 것도 있지만 모두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고모를 위한 장례식 추도연설도 정치적 선전을 위해 활용했다. 그의 전쟁기는 교묘하게 고안되어 있어서, 순진한 독자라면 카이사르가 원하는 관점에서 카이사르의 행위를 보게 된다. 이 전쟁기는 꾸밈없고 간결하며 사실에 입각한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비개인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록된 사실은 모두 주의 깊게 선택·제시되고 있다.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죽었을 때 키케로는 카토를 찬양하는 추도문을 썼다. 지금은 사라진 카이사르의 <안티카토 Anticato>는 이 추도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가 군사·행정·입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글을 쓸 시간을 냈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는 카토가 명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BC 46)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훨씬 더 정치적으로 강력해졌음을 깨달았다. 카이사르가 카토의 뒷덜미를 잡으려고 애쓴 것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옳은 일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150년 동안 순교자 카토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였고,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글에 나타나 있는 천재성의 증거는, 그 글이 비록 선전을 위해 쓰였지만 뛰어난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글의 평범한 목적을 간파한 독자라 하더라도 그 글을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이다.

카이사르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지적·육체적 정력이다.
그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중대한 반란을 아직 진압하지 못하고 있을 때인 BC 51년에 갈리아 정복에 관한 7권의 책을 출판할 준비를 했고, BC 49-44년의 바쁜 시기에도 내전에 관한 책과 <안티카토>를 썼다.
그의 육체적 정력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BC 57-56년 겨울에 시간을 내어 갈리아키살피나만이 아니라 3번째 속주인 일리리아까지 방문했다. 그리고 BC 55년 원정과 BC 54년 원정 사이의 막간에는 갈리아키살피나에서 공무를 처리하고, 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살던 난폭한 부족 피루스타이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갔다.
BC 49년에는 그해의 전투기간이 끝나기 전에 루비콘에서 브룬디시움까지 행군했고, 다시 브룬디시움에서 스페인까지 행군했다. 53세 때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뛰어난 수영 솜씨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면했다.

카이사르의 육체적 정력은 그의 난잡한 성생활이 부분적으로 설명해줄 것이다. 그의 방탕은 당시의 그리스나 로마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동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이 소문은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했고, 카이사르가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은 생전에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카이사르의 이성연애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연애 상대는 대부분 유부녀였다. 아마 카이사르는 이런 정사를 사소한 오락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2번은 그의 경력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불장난에 빠졌다.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와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그는 폼페이우스와 맺은 협상을 위험에 내맡긴 셈이다.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무키아와의 관계만큼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악명이 높았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짐으로써 파르살로스에서 얻은 명성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 그는 BC 46년에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방문하도록 허락해 대중의 분노를 샀다. 이런 행위들이 차츰 쌓이면서 옛날의 전우들과 사면받은 정적들을 자극해 결국 그는 암살당했다.

성적 정력이 넘치는 별난 성향과 냉정한 머리를 가진 이 천재는 분명 구대륙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나라에 파탄을 가져온 부패한 로마 귀족 계급의 지배를 폐지함으로써 로마 국가 및 그리스 로마 문명의 멸망을 잠시 미루었다. 이 유예기간은 동방에서는 60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서양에서도 비교적 낙후된 지역에서는 4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과두정치를 독재정치로 바꾸었는데, 이 독재정치는 그가 죽은 뒤에도 폐기되지 않았다. 그가 그때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서양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이민족 침략자들에게, 동방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파르티아 제국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문명의 생명이 연장된 것은 중대한 역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근동 지방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600-700년 동안 헬레니즘 문명이 깊이 스며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의 요소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만큼 강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리아 지방 역시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지 않아 500년이 넘도록 지중해 연안의 문명세계와 접촉하지 않았다면, 프랑크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미개 상태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업적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 영향은 구대륙의 서쪽 끝에 국한되었고,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다. BC 3세기에 진(秦)의 시황제가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가 아직까지 건재하다면 그 미래는 과거보다 훨씬 더 위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시황제보다 위대하지 못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라도 보통 사람과 비교해보면 그는 여전히 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갈리아전기

전체 8권. BC 58-BC 51년 카이사르가 갈리아(Gallia:현재의 프랑스) 총독으로 있을 때의 그의 군사활동을 적은 기록이다.
제7권까지는 카이사르가 직접 집필한 것이고, 제8권은 그의 부하 히르티우스가 쓴 것이다. 집필의 목적은, 후세의 역사가에게 자료를 제공할 겸 자기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에 대하여 변명하고, 동시에 정계(政界) 진출에 대비한 자기 선전에도 있었지만, 간결 명석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하여, 역사적 진실성이 매우 높다.
그 문장은 후세에 와서 라틴어 문장의 모범으로서 라틴어 사전에 예문으로 많이 인용되었고, 또한 라틴어의 초보 교과서로서 널리 애용되었다.

갈리아의 정복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안에 행하여진 게르마니아(Germania)·브리타니아(Britannia) 원정에도 언급하고 있어서 프랑스 ·독일 ·영국에 관한, 믿을 수 있는 최고(最古)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기록은 갈리아 ·게르마니아의 당시의 형편을 알아보는 데 불가결한 사료(史料)가 된다. 그 내용은 헬베티아인(Helvetia人:스위스인)의 갈리아에의 이동을 저지한 것을 비롯하여 게르만인의 침입의 격퇴, 갈리아 반란의 제압, 두 번에 걸친 브리타니아 원정에 관한 것 등이다. 그 중에서도 제7권의 긴박감 넘치는 필치는 문학작품으로서도 밀도 높은 걸작이다.

제왕절개

임신자궁을 절개하여 인공적으로 성숙태아를 만출하는 수술.

제왕절개라는 명칭은 독일어인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의 직역이며, 어원은 라틴어인 섹티오 카이사레아(sectio caesarea)에서 유래하는데, 이 독일어의 번역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복벽절개에 의해 태어났다는 데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벤다는 것(caesarea), 즉 임신자궁을 절개한다는 뜻에서 온 중복어(重複語)라는 두 가지설이 있다.

클레오파트라 7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재위 BC 51-BC 30).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왕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이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오보에를 부는 왕)의 둘째 딸로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그 후 한때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하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BC 41-BC 40년 안토니우스와 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屬州)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의 기증).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그녀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재기를 꾀하였으나, BC 30년 옥타비아누스군의 공격을 받고 독사로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300년의 종말이고, 로마에 의한 지중해 세계 지배의 일단의 성공이며, 또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로마제국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의 여성적 매력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로마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간 여왕이었다.
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이 여성에 대해서는 단지 고혹적인 매력만이 강조되어, 오늘날까지 요부 ·간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제정(帝政)의 창생신화(創生神話)를 형성하기 위하여 꾸며낸 설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많은 문학 작품의 좋은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안토니우스전>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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