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nobelmann.com/old/index.htm

위의 링크에서 유럽 전쟁사 -> 악티움 해전을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역시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시저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다른 황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을 합니다.. 특히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황제들을 이해하는게 중요해지지요.. 시저는 나중에 왕으로 추대되고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로마의 구원자, 메시야등으로 불리우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당시까지 끊이지 않았던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 연안 대 로마제국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아우구스투스의 행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극렬한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 대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지요..

------------------------------------------------------------------------------------------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 (BC 63-AD 14)

Octavianus라고도 함(-BC 27). 본명은 Gaius Octavius.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후의 이름은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로마의 초대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회복된 공화정의 수반을 뜻하는 '프린켑스'(제1시민)로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원수정(元首政)으로 알려졌지만,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로마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교묘하게 효율적으로 관리했으며, 그리스·로마 세계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생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남동쪽 벨리트라이(벨레트리)의 유서 깊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BC 59 죽음)는 옥타비우스 집안에서 맨 처음으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된 인물로, 해마다 선거로 임명하는 프라이토르(법무관)에 뽑힌 적도 있었다.
이 행정관직은 로마의 관직서열에서 콘술(집정관)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자리였다. 어머니 아티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딸이었고, 어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카이사르의 도움이 컸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 때 외할머니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연설하면서였다. 그후 3, 4년 뒤에 그는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대신관단(pontifices)의 일원이 되었는데, 대신관(pontifex maximus)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BC 46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서 정적들을 무찌르고 로마로 개선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독재자가 된 카이사르를 수행하여 개선 행진에 참여했다. 이듬해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스페인(히스파니아)으로 가서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그는 학문과 군사교육을 마치기 위해 아폴로니아(지금의 알바니아에 있음)에 가 있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을 통해 그를 양자이자 제1상속자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의붓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당장 로마로 향했다.
이때 그는 불과 18세였다. 카이사르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카이사르의 문서와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제1상속자가 되리라는 기대가 빗나가자 카이사르의 재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푼도 넘겨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리고 죽은 독재자가 로마 시민에게 빚진 유산도 옥타비아누스가 재주껏 갚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무시하고 동부지역으로 떠났다. 로마의 주요 원로정치가인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련했던 대중오락을 찬양함으로써 카이사르 군대의 충성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원로원은 키케로의 권유에 따라 안토니우스와 결별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원조를 요청했으며(또한 원로원은 젊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 의원 자리를 주었음), 무티나(모데나)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해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지방으로 몰아냈다.
원로원 군대를 지휘한 콘술들이 목숨을 잃자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공석이 된 콘술 자리 가운데 하나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도록 원로원 의원들을 강요했다. 이어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정식 승인을 받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비롯해 카이사르 뒤를 이어 대신관이 된 레피두스와 곧 협정을 맺었다.
BC 43년 11월 27일, 세 사람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5년 임기의 3인 집정관으로서 독재관으로 정식 임명되었다(제2차 삼두정, 제1차 삼두정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및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맺은 비공식 협정을 말함). 로마의 동부지역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세 집정관은 서부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처벌해야 할' 정적의 명단을 만들고, 안토니우스의 적인 키케로를 포함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2,000명의 기사들을 처형했다. BC 42년 1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신으로 인정받자 신의 아들로서 옥타비아누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와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동부로 진격했고, 안토니우스가 지휘하는 군대(옥타비아누스는 당시 병중이었음)는 2차례의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패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둘 다 자살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안토니우스에게 동부(갈리아 지방 포함)를 배당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군대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정착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을 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형제와 아내를 상대로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자)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시칠리아 섬과 해상 통로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대폼페이우스의 아들)는 또하나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친척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그러나 얼마 후 성격 차이로 이혼했음). 페루시아 전쟁 이후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인척이 된 뒤에도 안토니우스에 대한 접근을 단념하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브룬디시움 조약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가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를 제외한 서부 전체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부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고, 겨울을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함께 보낸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로마 제국 사람들은 이 조약이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두 기뻐했다.
BC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함으로써 귀족계급과 중요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옥타비아누스는 곧이어 섹스투스와 일련의 전투에 빠져들고 말았다. 섹스투스의 근거지인 시칠리아 섬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 참패로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BC 37년에 타렌툼(타란토)에서 안토니우스와 새로운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동부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파르티아 및 그 동맹국인 메디아와 전쟁이 일어나면 필요한 육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전함을 보내주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끝내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 조약은 또한 BC 33년말까지 5년 동안 제2차 삼두정치를 연장한다고 규정했다.

이듬해에는 세력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부 원정에서 실패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시칠리아의 나울로쿠스 곶(베네티코 곶) 앞바다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완전히 격파했다. 이 함대를 지휘한 사람은 일찍이 옥타비아누스의 동급생이었고 유력한 귀족들한테는 인기가 없었지만 천재적인 함대 사령관이던 마르쿠스 아그리파였다.
이무렵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력으로 대항하려던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무장해제당하고 콘술의 지위마저 박탈당해 결국 은퇴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에게는 퇴역군인들을 이탈리아에 정착시키고 신병을 모집할 권리가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무시한 채 안토니우스 군단에 딸린 많은 병사들을 멋대로 제대시키고 그들에게 정착촌을 세워주었다.
그가 로마 세계의 궁극적인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안토니우스와 경쟁한다는 사실은 차츰 분명해졌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와 별로 관계 없는 디오니소스(바코스)를 수호신으로 삼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고대 로마의 '질서의 신'인 아폴론을 수호신으로 삼아 자신의 애국심을 종교적으로 교묘히 선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탁월한 지휘관임을 암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앞에 개선장군(Imperator)이라는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다.

BC 32년에 삼두정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는 더이상 콘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증오에 가득찬 선전이 오가는 가운데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해로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두 지도자는 제각기 휘하의 사람들을 설득해 충성 맹세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그러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그리스 서해안 일대의 거점을 지키기 위해 함대와 육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BC 31년초에 옥타비아누스는 재빨리 아그리파를 파견하여 그리스 남서쪽 끝에 있는 메토네를 점령해 선수를 쳤다.
친구이자 조언자인 마이케나스에게 이탈리아를 맡겨놓고 전쟁터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암브라키아(아르타) 만에 가두어 버렸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듬해 이집트를 점령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주장한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카이사리온)를 처형하고, 이집트를 병합하여 직접 지배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보물을 압수한 덕분에 제대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었고, 이 보물을 발판으로 하여 마침내 그리스·로마 세계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차츰 자신이 절대권력을 지니는 원수정체제의 확립을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해나갔다.
그는 60개 군단을 28개로 줄이고, 대부분 이탈리아인인 15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는 한편, 속주에서 데려온 15만 명의 외인부대로 병력을 보완했다. 옛날 장군들이 거느렸던 호위병들을 상설근위대로 개편하여 로마와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주둔시켰으며,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훌륭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또한 지중해를 경비하기 위해 효율적인 함대를 조직했다.
BC 28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최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인구조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치세에 2번 더 실시되었다. 이들은 또한 원로원 의원을 1,000명에서 고분고분한 사람들 800명(나중에는 600명)으로 줄였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Posted by yy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