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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의 미국의 성령운동

들어가는 말 - 19세기 후반의 시대적 위치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은 웨슬리안이든 개혁주의든 모두 ‘성결운동’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남북전쟁(1861-1865년)을 기점으로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쟁 전 19세기 전반이 말 그대로 ‘성결운동’이라면 전쟁 후 19세기 후반은 ‘성령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쟁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를 절망시키며 새로운 신념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 또한 이 남북전쟁을 전후로 해서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세기 전반의 미국의 성결운동에서는 전도와 사회 개혁적 요구에 부합하여 ‘성결’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낙관주의적 강조가 ‘완전주의’ 성결을 그 중심 주제로 만들었었다.1) 하지만, 전쟁 이후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와 자유주의의 도전, 그리고 임박한 종말론의 대두는 성령 대망의 신념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낳게 하였으며,2)그 결과 ‘성결운동’에서 ‘성령운동’으로 전환이 요구되어 진 것이다. 즉, 전쟁 전 ‘성화와 성결의 능력’에서 전쟁 후 ‘성령세례와 성령의 능력’으로 강조점이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또한 19세기 성결운동과 20세기 근대 오순절 운동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또 그 의미가 크다. 19세기 중반부터 성령운동 안에 등장하게 된 ‘오순절’3)이라는 용어는 19세기말의 ‘성결 운동’을 ‘오순절 운동’과 유사어로 만들었다. 따라서, 필자는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을, 전쟁 전을 ‘성결-완전주의 운동’, 전쟁 후를 ‘성결-오순절 운동’이라고 칭하고 싶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의 성결운동’ 즉 ‘성결-오순절 운동’은 19세기 전반의 ‘성결-완전주의 운동’과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한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의 전환기적 위치를 살펴본다는 것은 두 운동의 연관성을 고찰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19세기 전반의 ‘성결-완전주의 운동’이 어떻게 근대 오순절 운동으로 전환되어 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19세기 전반의 ‘성결-완전주의 운동’부터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19세기 전반의 ‘성결-완전주의 운동’

19세기 전반의 ‘성결-완전주의 운동’은 피비 파머(Phoebe Palmer)로부터 시작하는 ‘웨슬리안 완전주의’(Wesleyan Perfectionism)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로부터 시작하는 개혁파 ‘오벌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1840년대는 완전주의의 전성기였으며, 여러 완전주의들이 출현했었다.4) 그 중 부흥운동의 성격을 띠는 완전주의의 두 평행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피비 파머와 찰스 피니라고 할 수 있다.5)

먼저, 피비 파머(Phoebe Palmer)는 19세기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성결운동가이다. 19세기 미국은 감리교의 시대였다. 18세기 말 미국에 들어온 감리교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6) 하지만 이러는 가운데서 미국의 감리교는 가장 중요한 특징인 ‘성결’의 복음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의 감리교는 불신자의 회개에 강조점을 두었고, 이러는 가운데 이차적인 은혜로서 ‘성결’은 간과되고 있었다.7)

피비 파머가 성결운동을 다시금 일으킨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감리교도 의사인 월터 파머(Walter Palmer)의 아내 피비 파머(Phoebe Palmer) 여사는 언니인 사라 랭포드 부인(Sarah A. Langford)이 1835년부터 인도하던 “성결 증진을 위한 화요모임”에 의해서 성결을 체험하고 1839년 그 모임의 리더가 되어 성결운동을 확산시켰다.8)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결의 은혜를 체험했고, 그 중에는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으며, 단지 감리교도들 안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초교파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파머 부부의 성결운동은 19세기 성결운동의 근원이었다.9) 그 이후 30여년 동안 파머 부부는 성결 운동의 전국적 지도자가 되었다.10)

파머 부부의 사역은 감리교 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강조점을 불러일으켰다. 파머 부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체험하였던 황홀경과 완전의 경험을 단지 “모든 것을 제단 위에”(all on the altar) 내려놓음으로써 즉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것이 곧 순간적으로 성화되는 ‘더 쉬운 길’(the shorter way)이라고 했다.11) 이러한 파머 부인의 성결론을 ‘제단신학’(Altar Theology)라고 부르기도 한다.12) 그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바로 그 순간 어떤 감정적 체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하도록 권면을 받았다.13) 파머 부인은 경험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했는데, 첫째는 완전한 성화, 둘째는 믿음, 셋째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14) 성화에 있어서 헌신과 고백 등의 인간적 차원에 더 강조점이 생긴 것이다.

파머의 성결운동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이 운동이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부흥운동은 첫째 즉각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부흥운동은 짧은 시간 내에 결과를 요구한다. 따라서 성결체험도 긴 시간의 과정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내에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게 된다.15) 둘째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은 알미니안적인 성격이 있다. 정통 칼빈주의가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한데 비해서 알미니안은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셋째 19세기 미국의 낙관주의적 성격이다. 유럽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미국에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개인의 삶과 연결하면 이 세상에서 성결한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배경 즉 부흥운동적 배경에서 피비 파머의 성결운동은 나온 것이었다.16)

이러한 부흥운동의 성격을 갖는 또 하나의 완전주의가 바로 1830년대 후반에 일어난 개혁파 내의 완전주의인 찰스 피니와 오벌린 대학 학장 아사 마한(Asa Mahan)에 의한 ‘오벌린 완전주의’였다.17) 찰스 피니는 후대에 ‘현대 부흥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는 그가 부흥운동에 인간의 심리학적 기초에 근거를 둔 수단 또는 기술에 대한 강조를 한 일에 있어서 그 이전의 부흥사들과는 구별이 되었기 때문이다.18)

피니 또한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피니에 따르면, 사람이 참다운 회심의 경험 이후에, 단지 자유의지를 사용하고 “올바른 의지”(right intentions)를 발휘하여 기독자의 완전이나 성화라는 더 없이 소망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죄와 성결이 같은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19)

하지만, 피니의 성결론은 웨슬리안 성결론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이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칼빈주의적 성결운동은 소위 계약사상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되었다. 즉 율법이라는 옛 계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는데, 성령의 새 계약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20)

따라서, 19세기 전반 특히 1840년대부터 본격화된 ‘성결-완전주의 운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파머나 피니의 성결운동 모두 부흥운동적 배경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보다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로서의 ‘성결’이 강조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성결’이 ‘성령세례’와 자연스럽게 동일시되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둘째로, 두 사람 모두 인간적 차원과 삶에서의 능력에 대한 강조이다. 파머는 ‘성결’을 받기 위해 헌신과 고백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경험을 거룩한 삶의 절정으로서가 아니라 거룩한 삶의 시작으로 보았다.21) 피니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를 강조하며 변화된 신자에게는 율법을 행할 능력이 부여되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그 강조점이 인간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 집중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인간의 적극성에 대한 강조는 언급했듯이 당시 미국의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남북전쟁에 의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재조명은 성결운동이 다른 국면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성결-오순절 운동’

남북전쟁에 의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자각은 19세기 전반의 낙관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신념을 요구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적 견해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22) 따라서 전쟁을 거치면서 ‘성결-완전주의 운동’은 자연스럽게 ‘성결-오순절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857-58년 부흥운동에서 등장한 ‘오순절’(Pentecostal)이라는 용어가 전쟁 이후 보편화되면서 ‘성결’이라는 용어를 대치하기 시작했다.23) 파머 부부의 간증을 실었던 웨슬리안 간행물인 「성결의 지침」(The Guide to Holiness)은 결국 1897년에는 「오순절의 삶」(Pentecostal Life)으로 바뀌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용어의 변화가 아니었다. 전쟁 이후 인간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인간의 부패성의 확인에 의한,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조에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조로의 관점의 변화였던 것이다. 또한, 전쟁 전 부흥운동적 배경으로부터 이어진 성결운동의 ‘즉각적인 결단’은 이제 또한 자연스럽게 성령의 능력에 의한 ‘급진적인 역사’를 기대하게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성결운동 내에 성령의 권능, ‘권능을 주심’(empowering) 또는 ‘권능 받는’(empowered)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으며, 성령에 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의 사용도 달라지게 되었다. 1870년 전에는 주로 죄성의 정화와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전쟁 이후에는 능력에 관계된 사도행전의 구절들이 많이 인용되었다.24)

이처럼 남북전쟁 후 미국의 성결운동은 점점 온전한 성화에 대해 오순절적 용어를 채택하기 시작하였으며, 웨슬리적 성결보다 “능력”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1890년대는 이러한 발전이 최고조에 달하고, 오순절 주제들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된 시기였다. 따라서, 온전한 성화에 대한 웨슬리적인 해석보다는 ‘성결’을 성령론적으로 이해한 플레처의 신학적 표현이 더 선호를 받게 되었다. 이 때는 또한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으며, 여러 성령론적인 주제들이 또한 전면에 부각되었다. 마한이 성령의 은사들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강조했고, 또한 파머가 자주 예언에 대해 언급한 데서 이러한 실례를 찾을 수 있다.25)

전쟁 전 ‘성결-완전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파머의 책들에서 성령세례와 능력 등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었다.26) 그 다음으로 오벌린 대학 학장 마한의 1870년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라는 책이 이것을 더욱 발전시켰다.27) “죄로부터의 정결”보다는, 성령세례의 결과를 주로 “영원성”과 “능력”이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으며, 성령세례를 ‘봉사의 능력’과 연관짓고 있다.28) 찰스 피니 또한 그의 후기 사역에 있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의 사역의 중심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성결을 부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옮겨갔다.29)

그리고, 드디어 ‘봉사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강조하는 성령세례론이 개혁파 내에서 시작되었다. 187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대중복음전도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부흥운동가 무디(Dwight L. Moody)에 의해서 ‘봉사의 능력’에 대한 본격적인 강조가 나타나기 시작되며,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무디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gift of the Holy Spirit for Service)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복음적 용어로서 이른바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능력의 소유에 대한 증거는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주로 복음전파로 이해되어졌다.30)

토레이는 무디의 집회에 초청되어 성령세례를 가르치곤 했는데, 그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별되는 명확한 체험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자들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내적인 확증을 주장했다. 그는 또 “성령세례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의 능력을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확언했으며, 성령세례의 열매로 복음 전파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개혁파 전통에 따라 죄성이 순간적으로 제거된다는 관념은 거절했으나, 성령의 사역이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일을 돕는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31)

이러한 새로운 성령세례론은 그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부흥사들,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충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호소력이 있었다. 이 형태는 성령세례론의 형성 초기에 나타났던 감리교적인 요소를 점점 억누르고, “봉사를 위한 능력 부여”를 강조했다. 이러한 형태의 성령세례론은 크게 주목을 끌지는 않았지만 19세기 후반의 부흥운동을 점차로 지배해 나갔다.32)

이러한 19세기 후반의 부흥운동에 있어서 ‘성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의 시대적인 강조점의 변화는 이제 웨슬리안 성결운동에게 ‘성령세례’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의 문제를 제공하였다. 파머는 ‘성결’과 ‘성령의 능력’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성결은 곧 능력”이라고 제창하면서 “정화와 능력은 동일한 것”이라고 했다.33) 하지만 보다 전형적인 이해는 오순절이 “성결”과 “능력”을 모두 가져왔다는 주장이었다.34) 모리슨(H. C. Morrison)은 “성령세례가 신자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신자들에게 봉사할 능력을 부여한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쉽게 일치되지도 계속 유지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급진적인 “제 3의 축복” 그룹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주류 성결운동파의 “제 2의 축복”의 역사를 “성결”과 “능력”의 두 개의 다른 축복으로 세분한 것이었다.35) 즉, 그들은 “제 2의 축복은 온전한 성결이고, 그 뒤에 따르는 제 3의 축복이 성령세례”라고 주장한 것이다.36) 이것은 결국 ‘성결’과 ‘능력’의 체험을 분리시킨 것으로 후에 ‘성결’과 ‘성령세례’를 구별시키는 20세기 근대 오순절 운동의 교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새로운 그룹의 지도자는 벤자민 하딘 어윈(Benjamin Hardin Irwin)이었는데, 그는 플레처의 글을 탐독한 후 성결의 은혜 다음에 “불세례”라고 하는 ‘제 3의 체험’이 있다고 결론짓고 불세례를 직접 체험한 후 그렇게 가르쳤다.37) 어윈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1895년에 ‘불세례 성결 연합회’(Fire-Baptized Holiness Association)를 설립하였으며, 이 단체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후 보다 극단적으로 흐르게 되는데, 제 3의 세례뿐만 아니라, 제 4, 제 5, 심지어는 제 6의 세례까지 말하며 보다 자극적인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아울러서 이 운동은 어윈의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38)

비록 어윈의 불세례 운동이 잠시 동안의 번성이었지만 후에 근대 오순절 운동을 탄생시킨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결국 이 “제 3의 축복 그룹”이 제 2의 축복인 ‘성결의 체험(성화)’과 제 3의 축복인 ‘능력의 체험(성령세례)’을 분리시켜서 ‘성령세례가 성화와 구별되고 성화 이후에 오는 경험’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마침내 ‘성결’과 ‘성령세례’를 구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근대 오순절 운동의 교리적 토대를 형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근대 오순절 운동을 시작한 파함(Charles F. Parham)의 교리는 이러한 3단계 축복 교리 위에 제 3의 축복인 성령세례의 최초 증거로 방언을 추가한 것뿐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39) 따라서 불세례 성결교회는 북미에서 일어난 근대 오순절 운동의 직속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40) 성결의 체험을 최고의 종교체험으로 보는 성결운동으로부터 보다 성령의 다양한 은혜를 추구하는 오순절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이룬 매우 중요한 연결점을 이루게 된 것이다.41)

나가는 말 - 요약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은 ‘성결운동’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데,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19세기 전반은 ‘성결-완전주의 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다. 감리교나 개혁파 모두 웨슬리의 완전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조금은 달리 보다 인간적인 차원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낙관주의와 부흥운동적 성격과 맞물려있다. 남북전쟁 후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의 성결운동을 오순절화하였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을 ‘성결-오순절 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미국의 성결운동은 인간적 차원의 ‘성결’에서 초월적 차원의 ‘능력’으로 중심점이 이동되었다. 19세기 후반 개혁파 내의 ‘봉사의 능력의 부여’로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는 웨슬리적 성결을 조용히 압박했으며, 웨슬리안 성결운동 내에서도 ‘성결과 능력’에 관한 성령세례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하지만, 논의해 볼 이유나 여유도 별로 없이 ‘제 3의 축복’ 그룹인 불세례 운동의 출현을 맞이한다. 그들은 ‘성결’과 ‘능력’을 분리하여 각각 다른 체험으로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결’과 ‘성령세례’를 구분시켰다. 이것은 결국, 성결의 체험을 최고의 종교체험으로 보는 성결운동으로부터 보다 성령의 다양한 은혜를 추구하는 오순절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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