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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ntroduction


2003년 12월 2일 인천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장 아무개 목사님이 추락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신도와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맺으려다가 때 마침 낌새를 알아채고 들이닥친 여신도의 남편을 피하려고 베란다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에 10분간 매달려 있다가 결국 30M 아래로 추락해서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우리 주변에 보면 이러한 불륜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큰 파란을 겪게되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땅을 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자 여기서 가정을 한 번 해 보시지요.. 우리 교회에 김한성 목사님이 떠나시고 다른 목사님이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부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간통을 저지른 사건이 발견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목사님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의견이 둘로 나뉠 것 같아요.. 한 쪽은 비록 목사님이 저지른 일 자체는 심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목사님한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부류가 있을 것 같고, 다른 한 쪽은 그렇게 부정한 목회자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부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아마도 교회가 양분 되어 옥신각신하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쪽이십니까?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생각은 크게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할까요? 하나의 생각이 중요하겠지요.. ^^; 하나님이 목사님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대하시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목사님을 대하시는 것 처럼 대하면 될테니까요.


II.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


이제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과연 하나님은 이 목사를 벌을 주실까요 아니면 용서하실까요?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A. 준엄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출 32:33-35, 34:6-7)


우리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좀 살펴보도록 하지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이제부터 너희들을 나의 백성으로 삼겠다.. 하지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 하는 것들을 다 지켜야 한다.. 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이 언약에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언약이 체결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과 율법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을 지내게 되지요..

이 사이에 밑에서는 아우성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꾀 오랜동안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두들 모세가 죽었다보다 생각을 한듯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지킬 또 다른 신을 찾기를 시작을 합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것이 금송아지지요. 이에 하나님이 대노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시겠다고 길길이 뛰시는 거지요.. 그렇게 뛰시는 하나님을 모세가 중간에서 중보를 하면서 말립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용서의 성격이 출애굽기 33, 3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32장 33-35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반드시 묻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결국 재앙을 내리시지요. 34장 6-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반드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9장 22절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비단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간통을 하신 목사님에 대해서 우리 한 번 생각을 해 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기초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매우 엄중한 벌을 내리실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B. 자비로운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삼하 11-12, 레 20:10, 신 22:22)


그런데 반면에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 또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사무엘하 11-12장에 있는 다윗의 간통 사건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한 사건이에요..

어느날 다윗의 군대 장관중 한 명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본 다윗이 그만 한 눈에 홀라당 밧세바에게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인것을 알면서도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서 관계를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관계로 인해서 밧세바가 아기를 가지게 됩니다. 밧세바가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자 다윗이 급하게 우리아를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밧세바와 우리아가 관계를 해서 밧세바가 가진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것처럼 위장시키려는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우리아가 끝끝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거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중이었고, 다른 전우들은 전쟁터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자기만 편하겠다고 집에 들어가서 동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어요..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보내서 전사하도록 합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이 보셨어요..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을 책망하시는데, 다윗이 한 걸음에 잘못했다고 싹싹 빕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십니다.

이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다윗이 살았던 구약 시대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도록 요구되었던 시절이었던 것이지요..

다윗이 저지른 죄는 간통죄입니다. 이 간통죄 역시도 율법에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죄입니다.. 레위기 20:10절에 보면.. 간통을 저지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간음한 두 사람 모두 사형에 처라도록 명시되어 있지요. 신명기 22장 22절에도 역시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일단 다윗이 저지른 죄는 율법상 죽음에 쳐해져야 할 죄인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과연 다윗이 용서를 받을만한 근거가 있었느냐 하는 부분인데요.. 이스라엘의 율법에 다윗이 용서를 받을만한 근거가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제밥법은 레위기 처음 부분에 나옵니다. 이 제사법을 보면 분명히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번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용서를 받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용서받을 수 있는 죄들을 살펴보면, 모두 unintentional sin. 즉 모르고 지은 죄들에 대해서만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알고 일부러 지은죄는 율법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명백하게 다윗이 알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죄입니다. 우리야를 죽인것도 그렇고 밧세바를 취한것도 그렇고요.. 따라서 다윗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율법의 입장에서 보게되면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었나요? 안 죽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다윗이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용서를 받았나요?? 성경에는 다윗이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번제나 속죄제를 드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이 했던 것은.. 그냥 입으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했을 뿐이었습니다. 회개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목사님의 죄를 그냥 용서해주실 것 같아요.. 사실 다윗이 지은 죄와 목사님이 지은 죄를 비교해보면 다윗이 지은 죄가 더 크지요.. 흠.. 헷깔립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III. 하나님의 양면성의 상호 관계


하나님은 준엄한 심판자와 인자한 구원자, 이 두가지 모습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통 우리 인간들의 경우는 자비로우면 자비롭고 냉정하면 냉정하고 한 가지 속성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어느게 진짜 하나님의 모습인지.. 우리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건지 헷깔립니다. 또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라고 배웠는데 이러한 한결같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위배되는것 같고 말이지요.. 마치 하나님이 두 분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면서 또 동시에 충족시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설명을 좀 드려볼께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어떤 논리로도 이 양면성을 설명할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이 선악과와 관련해서 아담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정녕 죽으리라 말씀을 하시지요. 그 후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고, 아담은 결국 정말로 죽게 됩니다.. 그 죄의 꼬리가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내려오고 있고 결국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진것은 왜이죠? 하나님의 심판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은 그 특성상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동반합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왕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심판자로서 저와 여러분을 죽일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이 바로 이러한 상태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창조물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죽이기가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죄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십니까? 사랑하는 창조물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시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에요. (갈 3:13)

이제 용서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께요.. 용서라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주체가 필요합니다. 가해자가 있어야 하고요 또 피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지요. 이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려 할때의 이슈가 뭐냐 하면요, 피해 상황에 대해 누가 보상을 할 책임을 지느냐 하는 부분이에요. 어쨋든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으니까, 피해를 입은 부분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야 하잖아요..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여러분들이 10,000달러 사기를 당했다고 한 번 가정해봅시다. 여러분들이 그사기꾼을 법정에 고소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재판을 이미 받았고, 실형이 선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기꾼이 여러분한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 때 여러분들이 피해를 입은 10,000달러에 대한 보상의 책임과 그리고 이미 선고가 된 법정 실형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가해자가 피해를 입힌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택하신 방법은 피해자의 입장인 하나님이 이 피해상황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10,000달러의 비유를 통해 예를 들자면, 사기꾼이 사기친 10,000달러에 대한 손해와 아울러 법정 실형까지도 피해자가 감수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가해자는 어떤 벌을 받습니까? 아무런 벌도 받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입니다.

다른 예를 한 번 더 드려볼께요. 여러분들 집에 강도가 들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귀중품을 5,000달러 어치를 훔쳐서 달아났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 범인을 잡았어요. 그 사람은 이미 신고를 당해서 법정에 섰고 재판을 통해서 실형을 선고를 받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 범인이 여러분한테 잘못했다고 빕니다. 이때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서 5,000달러를 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 범인을 위해서 여러분이 직접 법정 실형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절대로 죄로 인해 생긴 결과를 그냥 넘기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댓가를 누가 치루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런 댓가 없이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바로 이러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같이 한 번 읽어볼께요… (마 18:23-35)

왕의 종이 왕에게 엄청난 빛을 졌습니다. 그 빛을 왕이 어떻게 합니까? 다 탕감해 주지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용서의 개념입니다. 피해에 대한 보상의 책임을 누가 지는겁니까? 피해자인 왕이 진겁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에게 작은 돈을 빛 진 다른 종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댓가를 요구를 하지요. 그러니까 왕이 어떻게 합니까? 종을 내치지요. 동시에 그 종에게 전에 탕감해주었던 돈을 다시 다 갚을 것을 요구를 하십니다.

우리 이제 다시 간통한 목사님에게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은 목사님을 어떻게 대하실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목사님이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목사님의 죄에 대한 책임은 이미 2000년 전에 목사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 감당 하셨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 뜻대로 살게 되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사님이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 자각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겠지요. 목사님이 이성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나오실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드리고 목사님을 보호해드려야 할겁니다.

목사님을 보호해 드리는 것과 관련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목사님이 지으신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가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런 처지가 되면 반드시 교회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목사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을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한 사단의 주요 전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 12:9-10). 여기서 이 부분을 헷깔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비난과 비판을 금하고 목사님을 보호하는 것이 죄 자체를 묵인하자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목사님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해드리는 이유는 목사님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죄를 인정하게 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지은 것이 죄라는 사실은 명확히 해야합니다.. 그렇게 목사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보호해드리고 그리고 예수님이 목사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되겠지요.


IV. Conclusion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이 절대로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죄값까지 우리가 감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절대로 노력한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은채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면서 노력하면 노력하실수록 항상 패배자로 서 있는 여러분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불가능한 말씀이 점점 진리로 믿어지고, 그 말씀대로 살고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고 그래서 여러분이 온전히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따라가는 모습이 생기게 되는 것.. 그것이 기적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대로 손해보면서 살라고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아무리 목청 터져라 이야기 해 봤자.. 그렇게 안됩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한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세요. 만져달라고. 하나님은 우리의 potter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clay이고요. 그렇게 내어 맡기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셔서 여러분 마음을 만지실겁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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