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정석규 교수님의 컬럼입니다. 흠.. 이러다 컬럼 다 퍼오겠네..

지난주에 제가 섬기는 대학교의 학생들이 수해를 입은 마산의 수재민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방학도 아닌 학기 중이었는데 수업을 포기하고, 또한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유쾌한 시간을 포기하고, 수재민들의 아픔의 현장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학생들을 보면서 대견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학생들의 수고가 큰 재해 가운데 있는 수재민들에게 얼마만큼의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수재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을 갔다 온 학생들을 보면서 몇 년 전에 신문에서 읽었던 한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어떤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마을에 열다섯 살 된 브라이언이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브레인 튜머(Brain Tumor)라는 병을 앓았습니다. 이 병은 뇌종양과 비슷한 병인데, 이 소년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빠집니다. 브라이언도 머리카락이 빠졌지만, 다행이도 이러한 치료 후에 조금씩 회복되었고, 마침내 학교에 다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브라이언이 학교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브라이언이 속한 반의 친구들은 브라이언이 학교에 다시 오게 되었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연락해서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 학급의 모든 친구들이 다 머리를 밀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랜만에 오는 친구 브라이언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브라이언과 함께하는 행동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보니까 브라이언과 학생들이 다 빡빡 머리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차린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친구들이 같이 울었습니다.

‘위로하다’라는 헬라어인 ‘파라카레오’(παρακαλεω)는 ‘누군가가 나를 돕기 위해 부름을 받아 내 곁에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위로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픔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신앙의 절개를 지켰으나 이것으로 인해 풀무불에 던지우는 고난을 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던졌던 왕은 풀무불 가운데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을 보았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바로 고난 그 가운데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먼저 당하셨습니다. 자신이 3년간이나 사랑을 쏟았던 제자들에게 버림받는 아픔, 자신의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외로움, 로마병정들에게 채찍에 맞아 살이 떨어져가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어 피를 흘리시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 사람들에게 당한 인격적인 조롱,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에게까지도 버림받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죽임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을 먼저 당하심으로, 지금도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함께 계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함께 계신 우리의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아픔과 절망이 우리에게 예상치 않게 닥칠지라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위로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는 주의 지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장 4절의 말씀처럼,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받은 자로서 그들을 위로하는 주의 위로자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Posted by yy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