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시대의 주된 배경이 로마입니다. 신약에서 이야기 하는 세상은 결국 유대인들의 사회와 고대 로마의 사회를 이야기 하게 되는데, 그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특히 계시록이 이야기 하고 있는 세상은 유대 사회보다는 로마를 지칭하고 있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그 로마를 바벨론으로 비유하면서 통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지요.. 계시록에서 요한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었는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로부터 나오라고 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로마에 대해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604907&qb=66Gc66eI7KCc6rWt7J2YIOyLoOu2hO2IrOyfgQ==&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6pgTg331zZssuLBBGlssv--239463&sid=TKpRIfLrqUwAACoXBNc

로마의 역사

우선 개설자분께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거 같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글은 모두 akkad.com.ne.kr/index.htm, http://akard.wo.to - 사회인문학에서 발췌 했음을 사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위 사이트로 가시면 좀더 많은 내용과 그림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Kaiser <- 운영자

:: 로마 역사 ::

로마 제국은 BC 8세기 무렵에 생겨나, 476년 서방 속주(서로마)가 무너지면서 해체되고,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은 AD 1453년까지 살아남았다.

시대 구분은 4단계로 볼 수 있겠다.

※왕정王政: BC 8세기 건국부터 공화정을 세울 때까지

※공화정共和政 : BC 510년부터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집권까지

※제정帝政 : BC 29년(논쟁할 여지가 남음)부터 서방 정부(서로마)가 무너질 때까지 - 로마제국 해체

※비잔티움 제국 : 아르카디우스 황제시대부터 AD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에 멸망당할 때까지

(↑그림 설명) 로마역사의 시대 구분. 책에 따라 어느정도 다를 수 있음.

끝에 비잔티움 부분은 생략.

※ 이 페이지 내용은 백과사전 내용을 요약하고 쉽게 풀어쓴 것이다. 처음 로마를 대하는 분들을 위한 설명이므로, 로마사에 대한 통사通史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페이지의 내용이 그리 필요치 않을 것이다.

:: 초기 로마 ::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

로마는 마는 인도 유럽계의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에 의하여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제(王制)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 ·정치 ·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시민은 세 개의 트리부스로 나뉘고, 각 트리부스는 다시 10 클리어로 나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초기 로마의 근본을 이루며, 민회도 클리어회(會)의 형태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중장보병제(重裝步兵制)가 보급되자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종군권(從軍權) ·참정권을 계급화한 재산정치적인 병원회(兵員會:켄투리아회)는 더욱 중요한 민회가 되었다.

시민에게는 파트리키[貴族]와 플레브스[平民]의 구별이 있어, 파트리키의 여러 씨족은 많은 클리엔테스[被保護民]를 소유하고 있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구별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역사가 분명해진 시대에는 파트리키란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영직(榮職)에 있더라도 파트리키가 될 수 없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人)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주체도 바로 이들 파트리키였다.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제폐지에 이어 정원 2명, 임기 1년의 콘술이 선출되어 국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비상사태에는 임기 반 년, 정원 1명의 딕타토르[獨裁官]를 두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와 같은 상태는 BC 4세기 전반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공화제의 초기는 로마의 정치제도가 앞으로 서서히 형성되어가려는,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지금까지 왕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이고도 무제한적인 ‘명령권’에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지게 된 것이다. 즉 명령권 보유자를 민회에서 뽑아 그 정원을 복수로 하여 서로 간섭 ·견제하도록 하고, 또 임기도 1년으로 한정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등 명령권의 운용에 대한 제한체계가 공화제의 조직으로서 완성되어 갔다.

:: 무기 훈련 ::

로마 공화제 초기에 갖가지 제도들이 어떻게 되었든 국가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파트리키였으며, 플레브스는 정권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플레브스의 대다수는 파트리키의 억압하에 있었다. 즉 플레브스는 해마다 종군하게 되어 있어 생업인 농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또 외적의 침입으로 소유지는 황폐화되었으며, 더구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파트리키에게 빚을 지게 되고, 그 이자때문에 드디어는 채권자인 파트리키에 의하여 몸을 구속당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플레브스는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하여 파트리키에 대하여 격렬한 신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생겨나 그 주역으로 활약한 것이 호민관(護民官)이었다. 호민관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 때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마침내 파트리키에게도 승인을 받아 그 ‘신성불가침’의 권력에 의하여 플레브스의 자위(自衛)와 투쟁을 지도하였다. 또 플레브스 자신들도 성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평민단(平民團)으로서의 기구를 형성하고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호민관에게 통솔된 플레브스의 첫번째 뛰어난 투쟁성과는 ‘12표법(十二表法)’이라고 불리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의 성립 ·공개이다(BC 450?). 이에 따라 종래 귀족에 의한 법률지식의 독점이 깨어져 일단 귀족과 평민에게 균등하게 법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법에는 귀족과 평민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심한 반대에 부닥쳐 BC 445년에는 호민관 카누레이우스의 제안에 따라 이 금지는 해지(解止)되었다. 이에 따라 평민 가운데 유력한 자는 로마의 파트리키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어 차차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신분투쟁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BC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法)에 의하여 플레브스가 파트리키와 동등하게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어 플레브스의 정권참여가 확정된 일이다. 이후 수십년 사이에 다른 주요관직도 플레브스에게 개방되어갔다.

이 시대 이후 로마 지배층을 형성한 것은 에퀴테스[騎士]라고 불리는 부유한 신분이었다. 당시 고급관직은 명예직으로서 봉급이 없는 데다 많은 출비(出費)가 요구되었으므로 적어도 에퀴테스로 꼽힐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관도(官途)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퀴테스 가운데서도 정치가 ·장군이 되는 것은 특정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사실상 거의 세습적으로 관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낸 뒤 원로원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원로원은 정치적 전문가를 망라하는 곳으로서 고대 ‘정치인’ 사이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권위에 의한 지배의 안정이 공화제의 전성기(全盛期)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콘술 ·딕타도르라는 국가 최고의 관직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정된 노빌리타스라고 불리는 소수의 가문에 독점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공화제는 노빌리타스를 정점으로 하는 원로원의 권위에 이끌려 민회를 결정기관으로 하고, 정무관직(政務官職)을 집행기관으로 하는 부유한 계층의 지배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정쟁(政爭)은 주로 선거전과 입법의 두 가지 형태로 행하여져 그 어느것도 민회의 투표에 의하였으므로 정치가들은 유권자인 일반시민의 지지를 구하여 그들과 사적인 은고관계(恩顧關係)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은고관계로 이루어지는 피호민(被護民)을 새로운 의미에서 클리엔테스라 불렀다.

그 뒤 로마 정치사는 여러 당파 사이의 세력투쟁으로 충만되지만, 이들 여러 당파의 통솔자는 노빌리타스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군소 정치가를 수하에 두고 광대한 클리엔테스를 거느리는 실력자였으며, 이들은 국가의 ‘제1인자들’로 불렸다.

로마는 왕제시대에 인접국가를 제패하였고,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는 차차 쇠미해지는 듯했으나, 그 후에도 착실히 세력을 넓혀 BC 4세기 후반에는 라티움 통일에 성공하였다. 또한 BC 4세기 후반부터 BC 3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 중 ·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과 싸워 항복시키고, BC 3세기 전반에는 남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싸웠다. 타렌툼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의 도움을 얻어 로마군을 크게 괴롭혔으나, 로마는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켰다.

이리하여 로마는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탈리아의 각 공동체에 대해 내정면에서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 ·외교의 주권만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이탈리아반도는 전승국 로마를 맹주로 하는 일대 군사동맹체로 완성되었으나, 이 군대는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하는 데 대하여 동맹국은 별도로 편성된 보조군이 되어 로마 시민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대였다.

로마제국과 지중해 세계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 이로부터 로마의 지중해 지배에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9세기에 세워졌고,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민족(商業民族)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BC 264년부터 BC 201년에 걸친 제1 ·2차 포에니전쟁에 의하여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서부 지중해의 패권(覇權)을 완전히 탈취하였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왕국 ·시리아왕국 ·아이톨리아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빙키아(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노빌리타스의 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과두정치적(寡頭政治的)인 사고방식이 뿌리를 뻗어, 현 체제에 충실한 자는 ‘훌륭한 인사(人士)’라 하였고, 특히 현 체제의 정상에 선 보수파 족벌집단은 ‘최량의 일족’이라 불렸다. 또 긍지 높은 지배계층에서는 ‘위엄 있는 한가(閑暇)’가 존경을 받고, 위엄 없는 우민(愚民), 한가하지 않은 빈민에게는 절대로 정치를 맡기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로마의 지중해 진출에 의하여 지중해 세계에 널리 강요되었다. 즉 로마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여 거기에 세력을 펴면 원주민 사회의 토착 지배계급에 대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를 유지시키고자 하였으며, 또 로마의 손으로 원주민 사회의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하여야 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부유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부여하였다. 또한 각지의 지배계급도 지중해 세계에서의 로마의 압도적 우월 앞에 자진하여 로마와 손잡음으로써 자기 지위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층 중심 체제에 대하여 지중해 세계의 일반 민중은 반(反)로마적일 때가 많았다. 특히 각지에서 일반민중 사이에 용솟음치는 ‘변혁’에 대한 욕구(특히 借用金의 말소, 토지 재분배 등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여, 로마는 그들과 결탁된 정치세력과 자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주민 사회의 ‘제1인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와 결탁하고, 둘은 로마 이외의 국가와 결탁하고, 셋은 자국의 민중과 결탁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당파(黨派)가 형성되었다. 원주민 사회의 여러 당파의 대립 ·상극(相剋)은 부유한 계급으로 이루어진 친(親)로마파의 우세 속에 전개되어 로마가 해외 경영을 진척시킴에 따라 로마의 ‘제1인자들’의 여러 당파는 전(全)지중해적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불렀으나, 이미 BC 2세기에 지중해는 거의 로마인의 바다가 되었고, 로마의 원로원이나 원로원의원은 지중해 세계의 주민에게는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로마제국의 공화제 말기 위기

로마의 지배계층이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로 웅비할 때, 로마의 대외 발전이 이탈리아에 끼친 경제사적 반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과두정치가(寡頭政治家)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가의 활동 패턴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최량의 일족’으로 불리고, 그것이 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포풀라레스(평민파)’정치가로 불렸다. 배타적인 족벌정치가 속에 포함되지 못한 혁신파 정치가는 ‘포풀라레스’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화제 말기의 ‘최량의 일족’으로는 술라 ·키케로 등이 있으며, ‘민중파’에는 마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나타났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 포풀라레스의 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다. 로마 당국은 이전부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는 병사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BC 107년에 병제개혁(兵制改革)을 단행,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안을 내려, 이후 이것이 종전의 징병보다도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장군과 사병을 특수한 신의관계(信義關係)로 결속시켰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 아울러, 무산자(無産者)인 그들이 퇴역한 뒤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 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의 투표권에 의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공화제 말기의 ‘사병(私兵)’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무력투쟁이 많아진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세계 통일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외인부대가 보조군으로서 쓰이게 되었다(로마 판도 안에 사는 자라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는 외인으로 불린다). 외인부대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적(保護者的)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 짙어 갔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도시화되지 않은 지역이 넓고, 그런 지방의 왕후귀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從士)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인은 이것을 그들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라고 불렀는데, 로마의 유력자들은 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重層的)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戰士層)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의 원로원의원-외지의 제1인자들-그 사회의 일반민’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여 갔다(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 도시 귀족이 된다).

더구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 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 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제정 설립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층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낡은 도시국가적 제도였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엄존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또 이 무렵부터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된 실업가로서의 기사(騎士) 신분을 가진 자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속주민(屬州民)을 착취하였다.

지중해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는 정치가는 로마의 시정(市政)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대립하여 보수적인 원로원에 반역하고 오히려 민회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의 ‘부유한 자’를 살리려는 정치가는 공교롭게도 로마의 ‘부유한 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그룹과 충돌하였고, 그 때문에 로마 시정(市政)에서는 민중파가 지향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私兵)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BC 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을 제1차 내란이라 부르고, BC 40년대 전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을 제2차 내란이라고 부른다.

아뭏든 제정(帝政) 성립 전(前) 1세기의 로마사는 크고 작은 격렬한 정쟁(政爭)으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및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시대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의 당파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세력을 확립함으로써 제정(帝政)이 확립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이것을 보통 제정이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제정 개막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 ·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全帝國)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屬州)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가 생겨나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체제의 영속화(永續化) 문제는 원수가 되는 기본적 원리와는 반대로 세습의 원리, 즉 왕조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皇帝禮拜)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帝國)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 ·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帝位)는 티투스(재위 79∼81)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

로마제국 5현제시대

로마는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아라비아(나바타이)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 ·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 ·제국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제(軍制) 등을 개선 ·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국 도시번영과 위기

5현제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는 ‘도시화’ 정책이 침투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속주민에게는 널리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도시의 번영은 2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랐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 ·바실리카 ·극장 ·원형극장 ·공공목욕탕 ·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문화의 주체를 이룬 것은 도시의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구성하고, 도시의 관리[政務官]에 취임,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편 제국정부는 도시 부유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정책을 취하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 ·인도 ·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이미 5현제시대의 제국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의 번영을 노예제에 의존하여 온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산품의 대부분을 수출하여오던 공화제 말기부터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 노예제 대농장 경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인 동시에 자본투하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공급원의 감소, 투하자본으로서의 불안정, 상품판로의 정체(停滯) 등 노예제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예제 자체가 지니는 비능률성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이 따라다녔다. 확대 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던 제국의 정책과 더불어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소작제로의 이행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산업의 원심적(遠心的) 경향, 즉 중심(重心)의 이동과 경제권의 분립, 게다가 시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수송의 난점(難點)과 신용의 불확실성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또 ‘고대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던 속주의 징세청부와 고리대금자본의 형성 ·발전이 두절되고, 확대재생산도 불가능하여 속주의 각 블록 경제권 번영에도 불구하고 차차 자유로운 사기업이 저지되어갔다. 더구나 시장이 한정되어 있었던 점, 즉 건전한 사회적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반시민이 구매자가 되는 사회가 이룩되지 못했던 점은 번영의 저변이 매우 취약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대토지소유제의 보급은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켜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 및 사유지로 옮아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도시의 노화현상이며, 나아가서는 농촌 및 사유지에서의 계층의 분화였다.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세포라 할 도시들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한편 소작인에게 가하여지는 부담도 점차 무거워져갔다.

로마제국의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였다. 동쪽에서는 강력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서는 한편, 안으로는 수많은 모순을 지닌 제국의 위기에 대처한 것이 세베루스왕조의 여러 황제였다. 먼저 북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에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공동통치자인 동생을 살해한 뒤 212년에 칙령을 공표하여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하였다. 세수(稅收)의 증가를 노린 칙령이었다고도 보이나 이 칙령에 의하여 로마 시민권은 제국 전체에 확대되고, 화폐가치의 하락, 인플레이션의 격화는 멈출 줄을 몰라 안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세베루스왕조 시대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대와 관료가 지배하는 국가체제가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통제경제와 인플레이션이 진전되어 제국의 구조가 변하여가는 시대였다.

이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에 의한 태양신의 국교화(國敎化)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 222∼235)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던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의 아들 갈리에누스(재위 253∼268)는 황제 직속의 기동대와 독립기병대를 창설하여 군의 주력부대로 삼았고, 제국을 중흥시킨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기병을 한층 강화하여 외세의 압력에 대처하고 대상도시(隊商都市) 팔미라를 지배하에 두는 한편 서쪽 갈리아의 지방정권 독립을 취소하고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 통제적 강제국가체제, 더구나 이민족까지 포함한 혼성국가에서는 제권(帝權)의 절대화가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신총제이념(神寵帝理念)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7년 및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내란을 수습한 로마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副帝)인 막시미아누스를 정제(正帝)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稅制)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賦課金)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人頭)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2년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標識)를 보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 로마로 입성한 다음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 그리스도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敎義論爭)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 ·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전제군주 정치하에서 로마 시민의 직업 세습(世襲)과 강제화가 크게 진전되고, 또한 세제의 강화와 함께 징세의 임무를 맡는 도시참사회원 신분의 세습화도 촉진되었다. 더구나 농촌에서는 소작인의 이동이 금지되어 ‘콜로누스’로서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F.C.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전통적 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고제(古制)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게르만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로마에는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人)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란(亂)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族)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匈奴)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停滯)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정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380),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카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武將)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政情)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 ·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戴冠)은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또 ‘로마황제’라는 호칭은 오토 2세 이후 줄곧 사용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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