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일반적으로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22장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의 그 믿음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죽여서 바칠 정도로 위대한 믿음을 지녔던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만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조상으로 치켜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시고자 했던 믿음은 이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굉장히 장황하게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제는 실제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원했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지요.

사도 바울이 구원을 선포할 때에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구체적인 예로 들었던 본문이 창세기 15장 6절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겨졌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서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이었길래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셨고 그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이었길래 하나님이 창세기 12장 1-3절까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낌없이 주셨을까요??

15 장 6절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땅에 거하고 있을 때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소돔왕이 엘람왕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었는데 주변의 몇 몇 왕과 함께 어느날 엘람왕 그돌라오멜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군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돌라오멜이 동맹국 세명의 왕과 함께 소돔왕과 주변의 네명의 왕들을 쳤던 것이지요. 이 전쟁에서 그돌라오멜군이 크게 승리하고 소돔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먹거리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 와중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도 끌려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훈련시킨 사병을 움직이게 되고 결국 그돌라오멜의 군대를 쳐부수고 롯과 롯의 가족들 그리고 소돔과 기타 다른 성읍에서 빼앗긴 물건들까지 전부 찾아 옵니다. 그 전쟁에서의 승리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공을 돌려 드리고.. 그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떼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인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주고 나머지 것들도 자신이 취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하나님이 예쁘게 보셨던 거 같고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보상을 해 주시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을 하십니다. 이 scene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아무런 대책 없이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렇게 대책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버리니까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던 것이고요.. 그게 15장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대책 없는 믿음이 과연 온전한 믿음이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16장에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에는 사라를 통해 주시겠다고는 아직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 상속자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사라가 계속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한 가지 편 법을 씁니다. 사라의 이집트인 몸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줘서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던 아이를 얻고자 했던 것이지요.. 정황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삭이라고 하는 확실한 축복덩어리를 어떻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렇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하갈을 취하기 전에 왜 하나님께 미리 그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 남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려고 했었던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고요.. 결국 이 이야기를 보면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썩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던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이스마엘을 통해 오는 게 아니었지요.. ^^;

다음 사건은 17장에 나옵니다. 앞 부분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열국의 아비요 어미로 세우겠다고 하는 약속을 반복 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나왔던 축복이지요?? 그 축복의 말씀을 다시 상기시키시며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17장 16절에 사라를 통해 아이를 주시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 바로 다음절에 아브라함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17장 17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가요?? 웃습니다. 그리고 백살이 다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아이를 준다고 하셨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합니다. 이거 재미있지 않나요?? 15장 6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식을 주실 것을 믿었었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어여쁘게 보셔서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17장의 내용은 15장 이후의 내용이고 따라서 지금 상황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이후의 일입니다.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믿음이 17장에서 보면 의심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비단 아브라함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8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계속 확언하고 계십니다. 그 이야기를 사라가 들었는데 사라의 믿음도 뭐 아브라함과 비교해서 만만치 않습니다. 11절과 12절에 사라가 이야기 합니다. 경수가 끊어졌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고..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의심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 하시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통해서 보아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아브라함의 의심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대처하시는지가 핵심입니다. 화를 내시지 아니하시고 이전에 하신 말씀을 계속해서 두 번 세 번 반복하십니다. 17장 18절 아브라함이 의심하지 19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다시 확인 시키십니다. 18장 11-12절에 사라가 의심하자 13-14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십니다. 안 믿었다고 안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주시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신실하신 모습을 보이십니다.

더 황당한 이야기가 20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13장에서 애굽 왕에게 사라를 한 번 팔아먹은 일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라가 이쁘니까 애굽 사람들에게 사라를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누이동생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결국 애굽의 왕인 바로가 사라를 취해 가게 되지요..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집니다. 그랄 땅으로 내려갔는데 그랄 사람들에게 사라를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소개를 하고 그래서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데려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5장 6절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이 의롭게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17장과 18장에서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상속자를 주신다고 약속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가 죽을까 두려워서 그 약속의 사람을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줘버린 것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겨질 만한 믿음인가요?? 이쯤되면 뭐 막 가자는 이야기지요?? ^^; 이 믿음은 정말로 개떡같은 믿음입니다. 누가 봐도 의롭다고 여겨질 만한 그런 믿음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찌 반응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20장 14절부터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각종 재물들을 아브라함에게 안겨줍니다. 왜요?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서 사라로 인하여서 아비멜렉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립니다. 그 때문에 아비멜렉이 두려워해서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내신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일로 아브라함을 꾸짖으시고 책망하셨나요?? 그런 구절 안 보이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전히 신실하신 모습을 보이십니다.

드디어 대망의 22장입니다. 21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안겨 주십니다. 이 이삭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보신 여러분들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셨을 것입니다. 이삭은 전적으로 자신이 자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평생을 걸쳐서 경험한 아브라함이 2절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실제로 바칩니다. 그래서 결국 22장 12절 천사로부터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고 하는 선포의 메세지를 듣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17-19절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구절은 창세기 21장 12절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선포를 하시지요.. 그런데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자손을 축복할 것이라고 했던 말은 온전히 믿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많이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결론을 맺어 볼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출중하고 월등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의롭다고 여겨질 만한 그런 순도 높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서와 같은 위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인내와 기다림과 신실하심이 결국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신 이 믿음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요..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한 가지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누구였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그 허물 많은 아브라함을 인내하심으로 이끄셨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누구이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면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의 믿음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그런 사랑을 받기에 적당한 사람이었냐는 질문과 함께 과연 나는 하나님한테서 그런 사랑을 받기에 적당한 사람이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하나님이 저렇게 끝없는 신실하심을 보이셔야 하셨는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시 창세기 12장 1-5절 그리고 창세기 11장 4절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창세기 11장 4절처럼 항상 자신의 이름만을 높이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높여주겠다"라고 선포 하시면서 창세기 11장 4절의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들을 경고하시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세기 12장 1-5절의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사람과 하나님 중에서 누가 더 큰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 스스로 판별해서 사람을 섬기든 하나님을 섬기든 양자 택일 하라는 메세지 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이심과 아울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 중 하나인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켜놓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가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고 주인이시며 또한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을 보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섭리의 일 부분입니다.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창세기 3장 타락 쪽과 4-11장 인간의 본질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던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 없이는 인간은 절대로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결 국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겪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 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같은 은혜를 베푸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 은혜를 통해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메세지들이 선포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창조질서의 회복입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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