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몇 가지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창조 사건 이야기 하면서는 하나님의 왕권과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의 왕으로 삼으셨는데 그 왕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대리자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과 진정한 왕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이야기였고, 한 가지 더불어 창조섭리 안에 우리가 거할 때 진정한 행복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반면 이 땅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재고 따지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렸고.. 이걸 우리는 이성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한 이성의 작용에 의해 대리자가 아닌 진정한 왕으로 이 땅에 군림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명백히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반역이고 따라서 우리가 사망의 권세에 눌려살게 되었으며.. 이성의 작용으로 인해서 우리 스스로는 구원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게 타락에 관련된 내용이었고요..

구원으로 topic을 옮겨오면서는 이렇게 helpless한 상황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약속 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

 

지금까지의 내용은 이제부터 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전체적인 background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만 이해해서는 어떻게 구원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할 내용들이 중요합니다. ^^; 앞으로 3주 남았는데 3주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나누게 되는 이야기들이 중요하니..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게 될 내용은 믿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거구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왜 믿어야 할지.. 왜 믿는것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되는지를 이야기 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면 대강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들은 대충 이해 하셨다고 생각 하시면 되고요.. 하지만 사실 정말 많은 기독교인이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많은 교회들은 이 내용을 가르치지 않고 있거나 너무 안이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앞으로저랑 같이 공부하시다 보면 아시겠지만 성경공부 교제 몇 개 놓고서 공부하고 말 수 있는 내용이 아니거든요...

 

1. 창세기 15:6절과 믿음의 상관 관계

오늘은 성경 본문을 좀 많이 참고 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이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본문 보겠습니다.

(창 15:3-5)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제부터는 바울이 이 본문을 이해했던 입장에서 이 본문을 풀어서 설명을 드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이해를 하고나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많은 부분들이 풀려나가고 창세기 22장의 창세기 15장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보게 되면 야고보가 이야기 했던 믿음과 바울이 이야기했던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부분에 주의를 집중시켜 주십시오.. 바울이 10여편 정도의 서신서를 썼었는데 대부분의 서신서들은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거나 또는 개인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2개의 서신서에서 바울의 신학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그 두 가지의 서신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두 개의 서신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구원론을 이야기를 하는데 그 구원론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verification을 위해서 바울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본문이 바로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의 base가 이 창세기 15장 6절이라는 것이지요.. 본문을 보실까요?

(롬 4:1-8) 그러면 육신 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갈 3:5-11)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창세기 15장 6절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셨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 이 본문이 왜 구원의 근거가 되는지 이제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

 

2. 창세기 15:6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이었다.

일 단 질문을 한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셨다는 사실은 신약에서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고 이해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믿음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치 있는 믿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15장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아브라함의 행적들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말로 형편 없는 믿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제대로 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완전히 믿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적에 대한 본문들을 쭉 보시지요..

(창 16:1-3)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창 16:15-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 여섯이었다.

(창 15:5)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잘 아시는 이스마엘 사건입니다. 15장 본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때는 하나님이 아직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사라를 통해서 이삭이라는 아이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지 않으신 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주실지 하갈을 통해 주실지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고.. 사라가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가지라고 하니.. 그럴수 있겠구나 하고 걍 하갈과 동침해 버리고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이라고 믿어버리는 신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뭔가를 크게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아직 모르고 있었던 때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라가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라엘을 낳기 전에 하나님한테 왜 안 물어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축복하실것이 아니라 이삭을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따르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시 창세기 15장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실만큼 온전한 믿음이었나요??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이삭이라는 아이를 아브라함에게 주시려 했었는데.. 이삭을 받을만큼 온전한 믿음이었나요??

(창 17:4-7)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창 17:15-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다음 본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하셨던 축복의 말씀을 다시 반복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삭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까지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 12장 1-3; 13장 14-17; 15장 5절에서 계속해서 하셨던 말씀들을 반복해서 말씀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창 12:1-3)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창 15:5)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가 재미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은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특별한 말씀을 하신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의 약속도 창세기 12장 1-3, 13장 14-17절에서 하신 말씀을 반복하신 것 뿐입니다. 15장에서는 믿었다던 아브라함이 똑같은 약속을 믿지않고 비웃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더 경이롭습니다.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제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 본문들을 보실까요?

(창 18:9-14)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이 아닌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일심 동체라고 하던가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사라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한 사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하듯 같은 태도로 대하십니다. 화를 내시지 않으시고 사라를 안심시켜주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지요..

(창 15:5)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제 다시 질문 들어갑니다.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이 과연 의롭다고 여겨질만큼 온전한 믿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정말로 온전한 믿음이었다면 17장에서 아브라함이 다른 태도를 취해야 했겠지요..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계속 본문을 봅니다.

(창 20:1-7)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사람들에게 자기 누이라 소개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려갔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켜서,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여인을 남편에게로 돌려보내어라. 그의 남편은 예언자이므로, 너에게 탈이 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죽을 줄 알아라."

아브라함이 그랄이라는 지방에 거하면서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부인으로 내어준 사건입니다. 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약속하신 아이를 축복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시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내어주고 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사라를 데리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사라를 통해서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으면 설령 사라가 아름다워서 아브라함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도와주셨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당연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었겠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미련없이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줘버립니다. 16장에서부터 20장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어 오면서 아브라함은 점점 믿음이 커지고 자라고 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떡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된거지요?? 하지만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한 번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화를 내시던가요?? 아브라함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시고 바로 아비멜렉에게 현신하셔서 아비멜렉이 스스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도록 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요..

(창 15:5)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다시 창세기 15장 본문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질문을 한 번 해 봅시다.. 객관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만큼 좋은 믿음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을까요?

 

3. 아브라함을 온전함으로 이끄신 하나님

(창 21:1-3)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약속 하신 것을 지키신 것이지요.. 자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이 온전해서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나요?? 아니죠.. 아브라함이 여전히 불완전함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 그리고 약 17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창 22: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12-18)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말씀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순종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왜 순종했는지가 히브리서에 나와 있습니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창 21:12)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무수히 많은 자손들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뭔가 이상하죠?? 창세기 15장 6절 이후의 아브라함의 모습과 창세기 2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좀 다릅니다..

(창 15:5)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제는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이제 분명해 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의롭다고 여기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정말로 개떡같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이 앞으로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사건들을 쭈욱 돌이켜보면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모습을 상기해보면 이야기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이 잘못했다고 야단치신 적이 없으시고 오히려 연약하고 부족한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면서 돌보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불완전하고 이삭을 받기에 꼭 합당하지도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주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셨던 것이지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실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결국 창세기 15:6절에서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신 아브라함은 창세기 15:6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로운 모습을 가지실 것을 아시고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미리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창세기 22장에서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진정한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모습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의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지금 미리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guarantee 해 주시는 것입니다.

 

4. 바울의 구원관과 야고보의 구원관의 이해

이제는 바울이 이야기하는 구원과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부터 한 번 보시죠..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롬 3: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약 2:19-26)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약 2: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구원을 이야기를 하는데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이야기가 다릅니다. 바울은 행위는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반면 야고보는 행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약 2:14) 이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와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의 포인트가 서로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지만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을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는데.. 바울은 믿음을 이야기 할 때 창세기 15장 6절에서 드러난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만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창세기 22장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약 2:20-22)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은 절대로 아무런 행위가 필요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행위 자체는 결국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아서 창세기 20장까지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엇나갔지만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이 은혜를 얻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에 의한 구원의 요체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야기 하는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가 변화되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야고보가 이야기 하고 있는 행위와 믿음의 관계와 서로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야고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변화되는 과정 자체는 생략하고 마지막 변화된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만나게 되면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구절이 구약 에스겔서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의 가장 중심입니다.

(겔 36:24-28)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창조 섭리와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다면 지금 이 내용들이 이해가 되실겁니다.

 

5.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변화시키셨나?

이 제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를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변화시키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실제로 의롭지도 않을 때에 의롭다고 하시고 결국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인도를 하셨느냐는 것이지요.. 참고할 수 있는 본문 먼저 보겠습니다. 역시 에스겔서입니다.

(겔 36:20-23)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주의 백성이지만 주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았지만, 내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려놓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리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왕권에 대한 것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왕이 누구냐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재개 됩니다. 다른 본문 보겠습니다.

(창 6:5)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창 8:21)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창 11:1-9)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 12:1-3)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1장과 창세기 12장은 항상 세트로 이해가 되어져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타락 이야기가 나오고 창세기 6장과 8장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하다는 이야기가 언급이 됩니다. 그게 인간이 가진 한계이고요.. 이 악하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항상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왕인 것처럼 이 땅에 군림하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본문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입니다. 분명히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부분이 있지요.. 별거 아닌 것 같은 내용인데 이 바벨탑 사건이 큰 이슈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이고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제를 하지요.. 그리고 바로 창세기 12장의 본문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는데 그 축복의 내용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서로 대조가 됩니다. 11장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제제를 가하시고 12장에서 별거 아닌 것 같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한테는 “내가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이 땅의 통치자가 누구이고 진정한 이 땅의 왕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아무런 조건 없이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야단치시지도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빛으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이 진정한 통치자이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보이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이 이유 이외에 중요한 이유가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시려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 아브라함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그러면 아브라함과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창 18:18-19)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롬 4:23-25)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에 대한 완벽한 설명서입니다. 그냥 쓸 이야기가 없어서 성경에 삽입되어 있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통치자 되심과 위대하심을 보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려 주시면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에는 우리를 꾸짖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아끼시면서 도우시면서 위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무엇보다 구원이 우리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완벽한 설명서라는 것이지요.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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