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을 살짝 복습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던 이유는 하나님과 다시 교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울러 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내용이 신명기 31:16-21절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셔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이지요.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있는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으시고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도록 유도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셨었다고 정리를 드렸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남쪽 유다의 멸망을 가지고 온 장본인 므낫세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은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1. 왜 구약이 필요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큰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에스겔 36장 말씀인데요..

겔 36:24-28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말씀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으셨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밖에 없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요?? 그리고는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닫게 내버려 두셨을까요??

6:9-12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그 때에 내가 여쭈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이사야에 있는 매우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밑에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물론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서이기는 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것은 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셨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을 먼저 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제 전공이 될 부분이고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요 17: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과 하셔야 할 일들은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예수님이 예언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상황이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왕이 누구인지 어떤일을 하실지.. 이런 정보가 없으면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더라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매우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사람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릴 때 어떻게 알렸겠습니까? 구약에 나타나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을 통해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를 하나 하나씩 설명해 주면서 알렷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오랜 기간의 구약시대를 만들어 놓으시고 특별히 구약 성서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행 8:26-38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 빌립은 일어나서 가다가, 마침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으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올라와서 자기 곁에 앉기를 빌립에게 청하였다.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사 53:7-8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이사야 53장과 관련된 text를 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text를 읽으면서 당연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 했을텐데.. 거기에 대해서 빌립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립 공의회 제사장들에게 잡혀서 가야바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님 스스로를 위해서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고 모든 굴욕을 다 당하셨던 부분을 이야기를 하고, 결국 말 없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음을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다니엘 9:26-27절 말씀이 인용 되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이해할 때에는 구약에서 예언된 예수님의 모습과 신약에서 성취되는 모습을 같이 보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을 만들어 놓으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5:39절의 의미인 셈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는 기본적인 구조가 됩니다.

단 9:25-26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 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아무도 그의 임무를 이어받지 못할 것이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서, 성읍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홍수에 침몰되듯 성읍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까지 계속되어,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다루지는 못 할 듯 합니다. 제 내공도 많이 부족하고 또 시간도 부족하고.. 오늘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예언이 되어 있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그 일들을 어찌 이루셨는지 몇 가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2. 구약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략

지금부터는 구약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먼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3강 구원을 다룰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이브를 이야기를 하고 여자의 자손은 이브의 후손을 이야기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자의 후손 중에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암시하고 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울러 성경을 이해할 때 이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 키 포인트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지요..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17: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22: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6: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35:11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갈 3: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위의 내용은 대략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축복하시면서 약속하시는 부분들입니다. 공통적으로 자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또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 자손에 대한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들들, 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들 가운데서 태어나게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에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아무런 조건 없이 축복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 그중 중요한 이유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을 드린적이 있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도록 작정을 하셨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무조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따라오도록 인도하셔야 하셨던 것이지요..

창 49:9-12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갈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리는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 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가장 좋은 포도나무 가지에 맬 것이다. 그는 옷을 포도주에다 빨며, 그 겉옷은 포도의 붉은 즙으로 빨 것이다. 그의 눈은 포도주 빛보다 진하고, 그의 이는 우유 빛보다 흴 것이다.

계 5:5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창세기 49장의 내용은 야곱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그냥 그렇게 축복을 하는데 유다에 대해서 축복하며 예언을 하는 장면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야곱은 유다를 사자에 비유를 합니다. 그리고 유다를 통해서 권능의 왕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권능으로 그의 자리에 앉으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라는 예언이 같이 튀어나옵니다. 성경에 유다 지파에서부터 나올 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딱 두 번이 나오는데 그 두 번이 위와 같습니다. 다른 한 번은 계시록 5:5에 나와 있습니다. 계시록 5:5절의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다로부터 나온 사자는 창세기 49장에서 따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셨던..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왕들이 나올것이라는 이야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께요.. 창세기 3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매우 희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거치고 야곱의 대에서 유다까지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조급씩 구체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욱 더 구체화되어갑니다.

삼 하 7:8-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어서,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쳐 주었다. 나는 이제 네 이름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빛나게 해주겠다. 이제 내가 한 곳을 정하여, 거기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심어, 그들이 자기의 땅에서 자리 잡고 살면서, 다시는 옮겨 다닐 필요가 없도록 하고, 이전과 같이 악한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는 일도 없도록 하겠다. 이전에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사사들을 세워 준 때와는 달리,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나 주가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는 것을 이제 나 주가 너에게 선언한다.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 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나단은 이 모든 말씀과 계시를, 받은 그대로 다윗에게 말하였다.

요 7:42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것이요,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삼하 7:12; 미 5:2)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다윗에 대한 축복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로 위 야곱을 통해 유다를 축복하셨던 하나님의 예언의 재확인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입을 통해 유다로부터 한 임금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예언을 다시 한 번 재탕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바로 유다지파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삼상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친히 선택하시고 기름 부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으 그냥 아무나 막 고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약속 하셨던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부러 유다지파에 속해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 하시고 고르셔서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에게 영원한 나라와 보좌를 약속을 하십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보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보좌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경우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총애를 거두었다고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윗이 설령 잘못을 하더라도 사울과 다르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면서 하나님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큰 그림에서 사울과 다윗의 예는 창세기 11장과 12장의 대조와 판박이입니다.

사 9:6-7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2)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3)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사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사 53:3-12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십자가 사건)

사 61:1-3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마 11:5)

단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단 9:25-27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 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예순두 이레가 지난 다음에,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부당하게 살해되고, 아무도 그의 임무를 이어받지 못할 것이다. 한 통치자의 군대가 침략해 들어와서, 성읍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홍수에 침몰되듯 성읍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끝까지 계속되어, 성읍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 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몇 가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뽑아보았습니다. 사실 이거 이외에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 본 것이고요.. 이사야 9장과 1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 이새의 뿌리라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지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죵..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법정과 가야바 대 제사장의 뜰에서 왜 잠자코 계셨는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흔히 이 부분은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접근을 하기 쉬운데..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과 가야바 대제사장의 뜰에서 침묵을 지키셨던 것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61장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었던 메시야가 맞느냐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61장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 말씀의 맥락과 비슷한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이 성경에서 예언되어져 있는 메시야 이심을 간접적으로 시인을 하십니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하실 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장은 인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7장에 나와 있는 인자는 그냥 단순한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과 더불어 하늘 보좌의 권세를 나누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 사람의 형상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6장 대 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 내용을 풀이해줍니다.

마 26:63-65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그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이 이상 증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64절에서 말씀하신 인자가 바로 다니엘 7장의 인자를 표현한 것이고 대제사장은 그러한 예수님의 표현을 정확하게 알아들은거지요.

다니엘 9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지어진 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을 부음을 받은 왕이 살해될 것이라는 것을요.. 이러한 여러 가지 예언들을 보시고 나면 이제는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마 26:52-54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요 4: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요 5:30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요 6: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시면서 전적으로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것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십니다. 그 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 가운데 전적으로 순종하시면서 사신 것이지요..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메시야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이고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직접 Son of God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은것에 대해서 매우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을 하신 적은 없으시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 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행동으로요 ^^;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에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신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복음 19:30절을 보면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순간으로 다가옵니다. 이 땅에서 사신 33년이라는 시간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3. 예수님과 성전에 대해..

성 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전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주제거든요.. 일단 성전의 의미부터 생각을 해 보아야 겠습니다. 성전이 뭘까요? 하나님께서 성전을 왜 주셨을까요? 이 이야기는 다시 타락으로 올라갑니다. 타락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거로 같이 거하면서 교제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하게 되면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 사건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다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를 합니다. 창세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이 거하시면서 같이 사셨지만 타락 이후에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가 되었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이스라엘 민족의 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와 같이 사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넘어간 후에는 한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12:8-11 오늘 여기에서는 우리가 저마다 자기의 소견대로 예배를 드리지만, 거기에 가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땅에 아직 이르지 못하고, 그 곳에서 누릴 안식을 아직 얻지 못한 지금은, 당신들이 소견대로 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땅에 정착할 때에는, 또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들의 위협을 물리치시고, 당신들에게 안식을 주셔서, 당신들을 평안히 살게 하실 그 때에는,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것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주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모든 서원제물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하신 그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이 예배를 받아주실 수 있는 곳에서 드려야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성막과 성전이었습니다. 구약의 세팅에서는 다른 곳에는 안 계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출애굽 시절에는 성막으로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었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간 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이후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뜻했습니다. 그냥 단순한 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었지요..

출 40:33-37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왕상 8:10-13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주님의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찼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성전을 가득 채워서, 구름이 자욱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솔로몬이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께서는 캄캄한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계시기를 바라서, 이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이 집은 주님께서 영원히 계실 곳입니다."

스 6:14-19 학개 예언자와 잇도의 아들 스가랴가 성전 공사를 격려하였다. 유다의 원로들은 계속하여 성전을 지었고,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과 페르시아 왕 고레스와 다리우스와 아닥사스다의 칙령을 따라서, 성전 짓는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성전 건축이 끝난 것은 다리우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이다.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하나님께 이 성전을 바치면서, 그들은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는, 이스라엘 지파의 수대로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그렇게 한 다음에, 그들은 갈래별로 제사장을 세우고, 무리별로 레위 사람을 세워서,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이들은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켰다.

성전 건립과 관련해서는 세 구절이 참고가 되는데 출애굽기, 열왕기상, 에스라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벗어나서 광야에서 떠돌고 있을 때입니다. 한 자리에 정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성전을 짓도록 하지 않으시고 천막같이 옮겨다닐 수 있는 성막을 짓도록 하십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때입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고 난 이후 성전을 재건할 때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구절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계실 하나님의 전이 새로이 지어질때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열왕기상에는 공통적으로 있는데 에스라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지어진 이후에, 그리고 열왕기상에서 성전이 완성되고 모든 집기가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되고 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소 안에 충만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에 나와 있는 세 번째 지어진 성소는..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이 문제는 굉장히 큰 이슈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품어주시지 않으실까??

말 2:7-11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제사장이야말로 만군의 주 나의 특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바른 길에서 떠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버리고 곁길로 가도록 가르쳤다. 너희는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어겼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다. 너희가 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한 탓이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느냐? 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서로 배신하느냐? 어찌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조상과 맺으신 그 언약을 욕되게 하고 있느냐? 유다 백성은 주님을 배신하였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땅에서, 추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아끼시는 성소를 더럽히고, 남자들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까지 하였다.

아직 이스라엘중에 만연해 있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세태가 안 없어졌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중에 주신 율법을 철저히 배격하고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라기서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인 성전에 오시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할까요? 다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소에 찾아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느헤미야, 에스라.. 구약의 마지막 세대를 풍미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공통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주십니다. 실제로 스가랴와 말라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수 많은 예언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곧 메시야가 오실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찾아오는 문제와 맞물려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이후부터는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톨레미, 셀류키드, 로마로 이어지는 속국의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직 벌을 받고 있고.. 그런데 언젠가 이사야에서 에언된 다윗의 뿌리로부터 진정한 왕이 나타나면 그 왕이 자신들을 구해주고.. 결국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분위기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주장했던 내용들과 일맥상통한 것이지요.. 율법을 지키자..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면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소망하며 기다리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바리새인들이 참 율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지해왔었던 전통을 예수님께서 깨시자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에게 대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지요..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영욕을 위해서 그런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영욕 더하기 이러한 실질적인 종교적 믿음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성소 문제가 신약에서는 어떻게 설명이 되지요? A.D. 70년에 에스라 시절에 지었던 성전이 다시 무너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나 열왕기상에 나타나셨던 것과 같은 그러한 임재하심을 당신의 성전에서 두 번 다시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어찌된걸까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지 않으신 건가요??

예수님이 성소이시며 성전이십니다.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성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얼굴 맞대고 이야기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건물로서의 성소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요 4:20-24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 1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단이나 벧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지를 물어보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거 상관 없이 예배드릴때가 온다고 말씀 하시면서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성전이고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요 2:18-21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마 27:50-52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막 15:36-37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누 23:44-45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 한 것이라고 클리어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단순히 예수님의 몸 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거 같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인데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헤롯 성전의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이거든요.. 물론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완전히 파손된 이후로는 지성소라고 하나님이 임재해 계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만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가 외부에 완전히 드러납니다. 이제는 지성소가 지성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은 지성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지성소라고 하는 좁은 공간에만 임재하시지 아니하시고 더 넓은 공간으로 나오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넓은 곳이 어디인지는 고린도 전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고 전 3:16-17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의 몸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6: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기시고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 오셔서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몸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약에서 예언 하셨던.. 당신의 성전을 다시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성취가 된 것이지요.. 지금 이 내용은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고 어떻게 교제하시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4. 두 번째 아담, 진정한 이스라엘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한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답이 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거지요?? 이제는 그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부분은 이야기는 장황하고 길었지만 한 가지 주제로 압축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 예언해 놓으신 그 예언들을 성취하기 위해 평생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었던 것이고요.. 이제는 충분히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이해들을 하셨으리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셔야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하나님 뜻대로만 살아야 했을까요??

여기에서 제시되어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사건 때 만들어 놓으신 아담의 모습입니다. 신학쪽을 하다보면 두 번째 아담이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롬 5:14-15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고전 15:45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벽한 아담의 모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샘플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샘플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처음 창조사건과 타락 사건을 이야기 할 때 말씀 드린바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선은 절대 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악이라 말씀하신 것은 악이라고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진정한 아담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관저와 가야바의 뜰에서 그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던 것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예언되어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였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문제인 것이지요.. 그것을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무조건 겸손하고 조용하게 그렇게만 있어야 한다고 논리화 시켜버리면 굉장히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화를 내시며 성전의 상인들과 상인들이 팔던 것들을 다 뒤집어버리신 사건은 이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성전의 이야기는 스가랴 14장과 다른 구약의 본문의 말씀들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선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방 사람들과 자신들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른 말씀들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했던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신명기와 출애굽기 레위기등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굉장히 분명히 밝혀놓으셨는데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이스라엘이 섬기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부분을 걱정하셔야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서 세상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바라셨던 모습이라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선이라 말씀하신 것을 선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지킬때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온전한 공급을 경험하고 결국 이 땅에서 사람처럼 살 수 있게되는 그러한 복을 하나님게서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고.. 이 모습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셧을 때 아담과 이브에게 바라셨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대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짐을 다시 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면서 따라가야 할 모습인 것이지요.

아울러 구원에 대해 이야기 말씀 드릴 때 말씀드렸던 내용인데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사단의 권세를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사단은 유혹하고 미혹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는 존재이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것 자체가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영적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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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같이 공부를 하시면서 이제는 성경을 어찌 보아야 할지 대강 감이 잡히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알게 모르게 성경의 구조를 말씀을 드렸거든요.. 마지막으로 성경의 구조와 더불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흔히들 구약은 재미없는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들로 많이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거 같아요.. 그런데 꼭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필수적입니다. 성경 공부를 진행을 하는동안 주로 다뤘던 본문들은 구약의 본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했던 컨텐츠들은요 다 신약의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진행했던 방식은 신약에 이러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런데 신약에서 왜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그것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구약으로 돌아가서 구약의 내용을 살펴보았던 것이거든요.. 이것이 성경이 쓰여진 원리이고요.. 또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원리거든요.. ^^;

신약의 저자들은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구약에 나타나 있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따라서 이 성경 저자들에게는 구약에 있었던 사건들과 내용들을 가져다 쓰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왜 하는지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그냥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개를 하는 거지요.. 우리들 입장에서는 구약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신약의 내용이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복음서를 쓴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은 예수님이 어떤 큰 기적을 행했다든지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다든지.. 이런 우리 눈에 보이는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 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였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안 보이면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비롯한 복음서 이외의 성경들은 복음서에 기초한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알지 못하면 서신서들을 읽어도 서신서의 저자들이 왜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감 잡기가 매우 애매해 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신서의 내용들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라고 권고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드리고 말씀드린 내용들은 절대로 성경 말씀의 다가 아닙니다. 단지 성경의 framework을 살짝 일러드렸을 뿐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성경공부가 시작이 되어야 하고요.. 이제부터 진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 알아가며 그 분의 놀라우심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솔솔한 즐거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강의는 사실 구원론을 중심으로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는데.. 다음에 강의를 한다면 구약을 이번처럼 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서 구약의 역사를 한 번 쓱 훑어보는 것도 괜찮을거 같고.. 신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지 신약서론 개념으로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거 같기도 하네요 ^^; 실제적으로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행적을 쫓아가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도 재미있을거 같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당..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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