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1. 하나님나라는?
복음서의 여러 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나라(신국)'입니다. ‘하늘나라’(천국)는 마태복음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다른 세 복음서에 가끔씩 등장하는 ‘예수(인자)의 나라' 혹은 ‘그 나라'와 함께 모두 하나님나라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나라가 죽어서 ‘가는 나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주 공간, 하늘(sky)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노래도 그곳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는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 용어일까요? 우선 ‘천국’이나 ‘하나님나라’가 갖고 있는 용어의 뜻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인 ‘천국’은 신구약 성경에서 마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마태는 ‘천국’(하늘나라)이라는 표현을 35회, ‘하나님나라’를 4회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신자들을 주대상으로 쓰여졌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지칭했습니다. 우리말로 ‘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바실레이아’와 바실레이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말쿳’은 ‘영역’이나 ‘영토’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 다스림(통치), 왕권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 다스림(God’s reign and rule) 등과 관계됩니다. 하나님나라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rule or reign)을 뜻하고, 이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범위와 영역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간적 개념을 배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포괄합니다. 단, 그 공간은 공중이 아니라 이 세상이며 미래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인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 21:1-7). 우리는 올 나라에서 누릴 천국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지금 여기서 그 나라(통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We shall perfectly experience the blessing of the Kingdom (reign) in the realm of The Age to come, but we realize the spiritual blessing of the Kingdom (reign) here and now).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나라
1) 구약에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
구약에서 ‘하나님나라’ 용어가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라고 말한 부분에 한 번 기록이 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당신의 통치’ 또는 ‘당신의 다스리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명확한 명칭은 없지만, 하나님나라 사상은 구약에서도 분명하고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영원부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시 95:3-7).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로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시 10:16);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낮으셨도다”(시 47:2,6-8);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시 95:3);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시 145:1); “열왕의 왕이시여…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영원한 왕이시라”(렘 10:7,1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1-2);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가라사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렐 같이 오리라”(렘 46:18, cf. 렘 48:15; 51:57);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출 15:18);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요, 능하도다 그 기사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權柄)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2-3);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시 146:10).
위의 구절들을 종합해 보면, 구약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하늘에 그 보좌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다’(겔 1:26-27),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보시고 서 있다’(왕상 22:19, 욥 1:6; 2:1)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통치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은 왕이심을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며 이 땅의 왕이십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아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은총’때문이었습니다. 은혜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백성 됨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심판하시고 심판의 표로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심판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을 예언하고, 그것을 기다렸습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그들의 기다림은 메시야 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2) 1세기 유대인들의 하나님나라 이해
1 세기, 즉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자가에 달리신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막 15:43, 44).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한번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며 물었습니다(눅 17:20).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행 1:6). 그들이 말한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 ‘예루살렘의 구원’(눅 2:38)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안나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도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믿었지만,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바벨론 포로 상태처럼 포로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 희망은 여러 가지 움직임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회복에 열심을 가진 1세기의 분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듯이, 구체적으로는 주전 168에 유다 마카비가 반란으로 유대인들이 자유를 얻게 된 것처럼, 하나님이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실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당시 또는 그 이전/이후에 여러 명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했으며 무력을 동원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마카비 반란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실패한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립되고 그 왕권이 시행되는 세상이 하나님나라라고 확신했습니다.
3. 하나님나라의 시간성
1)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나라 왕의 탄생이라고 그립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려주었던 메시야, 메시야가 가져올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그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직접 하나님나라 사역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새 출발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다림에 대한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경의 하나님나라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중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완료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3:2; 4:17). 완료형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온 예수님의 나라가 지금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은 마 12:28; 11:12; 눅 16:16; 17:21입니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유를 통해서도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3:44-46의 감추인 보화, 값진 진주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나라가 임했습니다. 사람들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천국을 찾을 수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 같이 그것을 살수도 있게 되었습니다(마13:44-46). 눅 14:15-24의 잔치 비유의 경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이미” 배설되었지만(16-17절) 바리새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18-20절) 그들의 자리가 다른 자들에 의해 취하여지고 있다고(21-24절) 하십니다. 예수님은 “현재” 하나님나라의 잔치가 베풀어져 있으며 “이미”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현재’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씨’와 관련하여 성장에 관한 비유에도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네 종류의 밭’ 비유(마 13:3-9,18-23), ‘가라지’ 비유(마 13:24-30, 36-43), ‘겨자씨’ 비유(마 13:31-32),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막 4:26-29)은 씨앗이 이미 밭에 뿌려졌음과 그 뿌려진 씨앗이 현재 자라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그 시작된 하나님나라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씨가 떨어진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그 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미래라고 생각한 그 나라가 이미 현 세계 안에 침투했습니다. 그 나라가 이미 세상 속에 들어왔고,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람 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미래가 이미 현재 안에 들어 왔으며, 미래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설명이 아니라 현재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역에서 가장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마 12:28, 눅 11:20). 병자들, 가난한자들, 억눌렸던 사람들에게 베푸신 이적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말에 사단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전에 이미 사단을 일차적으로 패배시켰음은 지금 악령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단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단이 왕좌에서 굴러 떨어지고 하나님나라의 왕권이 확립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눅 10:9, l7이하).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활동을 하나님의 나라 운동으로 인정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예수님이 전하시고 보여주신 것과 달랐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생각했고 예수님은 거짓 메시아로 여겨져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입장 차이가 일반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서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렸던 하나님나라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왔다고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1-5).
2) 하나님나라의 미래성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지상사역과 더불어 이미 도래하였음을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 완성은 자신의 재림(인자의 때, 추수 때)과 더불어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씨의 성장에 관한 비유들을 보면, 땅에 뿌려진 씨앗은 성장하여 결국은 결실을 맺어 추수의 때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나라가 결국은 자신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은 왕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십니다(마 13:39-41; 25:1-13; 31-46; 눅 21:31; 22:16-18). 하나님나라의 현재가 예수님 중심이듯 미래도 예수님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심판주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면 그때가 종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범세계적인 사건입니다. 그 날이 과연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는 충고가 뒤따릅니다(눅 12:35-40).
3)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
우 리는 위에서 살펴본 시간/영역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면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래드에 의하면(G. E. Ladd),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두 시대, 곧 “이 시대”(This Age)와 “오는 시대”(The Age to Come)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시간을 모두 가리킵니다. 현재와 연결해 보면, 이 “나라”는 현존하는 실채(a present reality)이거나 내면에 이루어진 구원의 축복이기도 합니다(롬 14:17).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현재 개념과 대조적으로, 이 나라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래에 주어질 축복(a future blessing)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0). “영역”(realm)과 관련하여서는, 이 나라는 지금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이며 내일 들어갈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1).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예수님과 함께 “이미”(Already) 임했지만(구약의 뜻/소망이 성취되었지만), 아직 그 완성을 남겨 두고 있기 때문에(But not yet), 우리는 “이미 그러나 아직” 또는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완성”(G. E. Ladd)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4) 예수님 중심의 시간성
하나님나라의 시간성을 언급할 때는 그것이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상태면 하나님나라는 현재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기에 하나님나라는 미래성을 갖고 있습니다.
4. 하나님나라의 비밀
1) 보여주러 오셨나, 숨기려 오셨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는 나라며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대, 예수님을 직접 만져 볼 수 있었고 대면할 수 있었던 그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라는 언어 기능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지만(막 4:33) 어떤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막 4:12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고 합니다. 논리적 모순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모순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발견됩니다.
막 4:11,12에 의하면 비유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계시와 은닉이라는 정반대의 기능입니다. 비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의 수단이 되지만 완악한 ‘저희’에게는 하나님 나라 비밀을 감추는 기능을 합니다. “너희에게는 주었으나”(계시)와 “외인에게는…저희로…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에서 ‘너희’와 ‘외인=저희’는 각각 누구를 가리킬까요? 막 4:10은 예수님께 ‘너희’가 제자들임을 증거합니다. ‘저희’는 마가복음의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초창기 갈릴리 사역(막 1장)에서는 예수님께 도전하는 자들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점차 확장되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천국 복음 설교를 듣고 예수님에 의해 병 고침을 당하게 되자 비로소 당대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 대항합니다(막 2:16). 비유로 말씀하시기 직전에 당대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을 대변하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모의합니다(막 3:1-6). 그러므로 ‘저희’는 “예수님을 도전하고 모함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하는 당대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 서기관 및 헤롯 당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 4:12은 비유 사용의 목적이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 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셨다? 예수님은 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왜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외인=저희’에게는 은닉하셨을까요? 은닉, 곧 무엇인가를 감추려 한다는 것은 은닉하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알려지지 않았다면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계시와 은닉의 목적이 동시에 이뤄지려면 계시하고 은닉하려는 그것이 이미 상당 부분 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 비밀을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여주신 다음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모든 사람이 비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 비유의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제자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닙니다. 차별없이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대적하는 자들은 누구보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추적했으며 목격했고 분석했습니다. 이처럼 조건은 똑 같은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결과는 달라집니다. 여건은 같습니다. 결과는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비유의 의미를 알고 모르고의 책임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 자신들에게 있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비유와 연결되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기도 하고 가리우기도 하는 것은 비유 자체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비유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예수의 제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제자가 아닌 ‘저희들’은 ‘제자들’과 똑같은 체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여전히 모호했고 가리워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완전히 그리고 모두 안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비유를 해석해 달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은 그들의 신앙에 따라 그 비밀은 점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반면 ‘저희들’은 제자들과 반대로 생각했고 행동했고 비유를 들었으므로 비유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했습니다. 믿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자신들을 심판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출현,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길입니다. 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상태의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 예수님 당대로 본다면 유대적 메시아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 성장하는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으며 성장합니다. 그 성장의 멈춤이란 없습니다. 겨자씨 비유(13:31-32), 누룩비유(13:33),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13:24-30, 36-43)가 의미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비밀리에 시작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며,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점진적이며 결국 승리를 하게 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러합니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씨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 따르면, 씨 뿌리는 자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뿌리신 것입니다(막 1:14-15). 뿌린 씨가 여러 종류의 토양에 이미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농부가 좋은 씨앗을 팔레스틴의 여러 토양에 뿌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다양한 대상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좋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뿌린다’는 동사는 ‘가르친다’는 의미로서 은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셨지만 예수님의 말씀(가르침)과 사역은 여러 곳에서 배척당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지만 마치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할 것처럼, 씨가 완전히 낭비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예상치 않았던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 씨앗이 일단 뿌려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결실할 때까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성장과정에 있어서 반대 세력이 아무리 강해보인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나라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일순간에 완결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성장의 과정을 통해 결실해 가는 방법이며 겉으로 과시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로마 제국을 격파시키고 이스라엘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해방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혁명적 투사나 절대 군주의 모습이 아닌, 이방 세력을 격파시키고 현 세계의 모든 구조와 질서를 뒤바꾸는 혁명가가 아닌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선언하고, 스스로 가난한 자들과 소외받는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죄 용서를 선언하는 그의 모습과 사역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했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말씀을 똑같이 신중한 태도로 전하셨으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결실에 대한 책임을 청중에게 돌리십니다. ‘저희’와 ‘외인들’로 묘사된 적대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이 볼 때 정치, 경제, 군사 등 세계의 모든 질서와 상황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 나라가 여전히 로마의 지배 아래 있고, 이방의 세력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로부터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을 가진 그들로서는 그들과 관점이 전혀 다른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는 자세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장과 번영을 확신하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인내로 받아야 합니다. 무관심, 일시적인 흥분, 유혹을 이겨내고 말씀을 ‘듣고 받아’야 한다. 인내할 때 결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말씀)은 결코 죽지 않으며 마침내는 실패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씨앗의 이러한 운명을 알 때 예수님처럼 고난을 기꺼이 받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에게 관심을 두었다면, 예수님의 해석은 밭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전자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뿌리는 사람의 자세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준비시킵니다.
3) 철저한 요구가 따르는 하나님나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10:37-39; 19:2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화(마 13:44)와 진주(마 13:45-46) 비유들에서도 하나님나라의 통치란 자기 소유를 완전히 포기해야 임하는 나라임을 가르칩니다. 보화의 가치를 안 농부는 자신의 소유를 기뻐하면서 팝니다. 파는 것이 더 큰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보이는 것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철저한 요구가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버리게 만드는 나라인 하나님나라의 속성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4) 사람들을 나누는 하나님나라
씨 뿌리는 자(마 13:1-9,18-23), 가라지(마 13:24-30,36-43), 그물(마 13:47-50) 비유에서 사람들은 양분됩니다.하나님나라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모두가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길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가시떨기, 돌밭), 심지어 배척할 것입니다(가라지). 마태복음 11-12장에는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이를 갈 것입니다(마 13:41-42). 반면, 어떤 사람들은 분명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며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들은 좋은 밭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의 제자들이며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입니다.
5. 하나님나라의 백성들
1) 하나님나라와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기관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격려합니다. 세상의 심판을 언급하면서 요한은 그 가운데서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문제를 안고 있고 어떨 때는 힘없어 보여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2) 하나님나라 백성의 복
마태 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산상설교에 나타난 ‘복’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강조점은 복된 이유를 설명하는 각 복의 두 번째 문장에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왜냐하면…때문이다.”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보면, 애통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복된 사람들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는 사람은 그저 불쌍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원인이 되어 예수님을 따랐고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던 그런 ‘애통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팔복을 말씀하시는 동안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서 이미 그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복됩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의 복은 예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혹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복입니다.
3) 하나님나라 백성의 윤리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성이 복이라면 이 복이 반드시 그 열매로 드러납니다. 비록 연약하여 예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작은 열매를 맺기 시작한 그 부분을 보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성, 예수님의 다스리심, 즉 하나님나라가 상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의 비유에서 보상을 하는 개념이 인간의 표준과 하나님의 표준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한 시간만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얻었습니다. 더위를 견딘 사람이나 할 일이 놀다가 부름받은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앞의 사람에게는 보상이지만 뒤의 사람에게는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에 근거하여 하나님나라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보상은 현재에도 임합니다. 보화인 하나님나라를 얻기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한 사람은 보상을 받게 되는데, 그 보상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에 기독교인으로서 윤리적 모범을 보여도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6.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도 (김세윤 교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기초함)
1) 기도의 주체와 대상: 자녀=하나님나라의 백성, 아버지=왕이신 하나님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b)라며 기도 모범을 부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 Lord's Prayer) 직전에 있는 8절 말씀은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6:14-15에는 ‘너희 천부’, ‘너희 아버지’가 나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 아들은 국민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나라의 자녀, 곧 하나님나라의 국민을 위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국민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사는 국민이 하나님나라 국민답게 살겠다는 다짐과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의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알지 못하는 신을 향해 주문을 외웠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시고 두려운 분이라 생각하여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빠’, ‘아버님’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실제로 사용하셨던 발음은 ‘아빠’이므로 ‘아빠’가 본디 발음과 유사하고 그 의미도 한글의 ‘아빠’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빠’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고 독특했기 때문에, 헬라 말을 쓰는 바울의 교회들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라고 부르는 기도가 남아 있습니다. 롬 8:15-16, 갈 4:6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짖는다고 설명한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바울은 헬라어를 쓰는 로마 사람들이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아빠가 무슨 뜻인지를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빠 곧 아버지”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은혜로 되듯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 역시 은혜로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다른 표현인 ‘하나님의 자녀’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주기도문이 하나님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나라를 위한 기도라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는 주기도문에서 가장 핵심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민족이 해방되고 흩어진 동족을 모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로마 제국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고 흩어져 있는 해외 동포들을 모아주시는 나라를 하나님나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서 열혈(심)당원들은 무력 혁명으로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무력 혁명으로(마카비 항쟁처럼)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우고 신정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가 된다고 해도 다스림의 대상과 주체는 바뀌었지만 ‘억압’이라는 구조는 그대로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억압과 슬픔의 질서는 변하지 않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바뀌는 나라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나라입니다. 혁명을 통해서 세상이 뒤바뀌는 나라는 인간의 나라이지만 겨자씨와 같은 제자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확장된 하나님나라는 온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나와 우리의 세상이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의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기도의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 대상은 ‘아빠’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처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아빠로 부르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빠, 제가 오늘 하루 제 고집대로 살지 않고 저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나라의 성장을 위한 기도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나라가 성장하기를 요청하는 기도인 동시에 기도하는 자신이 성장의 수단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돈 사랑’으로 흔히 나타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으로 그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의지하던 돈을 내어 놓습니다.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확대되므로, 하나님나라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와 연결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일용할양식 뿐만 아니라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약속이며, “일용할양식을 주옵소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하루를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이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는 “우리의 이웃의 죄(빚)를 용서하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4) 사탄의 나라에 대항하여: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세상에는 아직도 사탄의 통치가 있기 때문에는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자주 이끌립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말씀처럼 하나님나라 백성은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완료되었지만 완성의 날은 아직(but not yet) 남았기 때문에 사탄의 통치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통치력이 아직도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심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탄의 통치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사탄 노이로제에 빠지면 사탄과의 전쟁을 너무 과장하여 엉뚱한 논리를 펴게 됩니다. 그에 의하면 가계에도 저주가 흐르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기록하지도 않은 범위까지 확장해서 관심을 갖게 되므로 오히려 귀신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영적 전쟁에 대해서도 살펴 보면, 요한은 계시록에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로마의 황제 숭배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 말씀처럼 순교를 무릅쓰는 것이 영적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11-12에 나타난 영적전쟁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굳게 지키고 진리대로 살고, 전도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내용과 “영적 전쟁에서 이겨 하나님나라 복음대로 살게 하소서”입니다.
5)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도에 있서서 중심 주제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란 인간의 생각과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바꾸려고 설득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 자신의 생각과 목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자신의 삶에 이루어지도록(실현되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 요청하는 것입니다.
7. 정리하며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의 주제로 탐구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다룬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2) 하나님나라는 알려진 비밀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압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의 보화는 비밀로 남겨질 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기에 보잘것 없어보여도 반드시 성장하여 결실을 맺으며, 그 성장과정은 점진적입니다. 과정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은총으로 탄생합니다. 그때그때의 성장이 모두 귀합니다. 예수님은 과정에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나라인 교회는, 제자공동체는 늘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나라 백성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신분은 반드시 윤리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 것도 은총이며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은총입니다.
(5)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도 주제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 삶은 반드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6)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이원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학문 영역에서, 삶의 영역에서, 직업의 영역에서 이원론을 버리고 예수님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마음, 하나님나라 확장의 수단이라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7)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성령님의 나라입니다. 개인이나 단체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운동성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하나님나라답게 되도록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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