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훈련과 관련해서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74년 생이니까.. 이제는 어느덧 저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모태 신앙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나이를 먹은 만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이 30이 넘을 때 까지는 큰 의미 없이 신앙생활을 해 온 저를 발견을 합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큰 의미 없이 지나간 지난날들이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요즘은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고든콘웰에 와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그냥 평신도로 있으면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말씀들과 그 말씀들에 담겨있었던 진리들이 완전히 저를 휘어잡고.. 저를 지탱해주고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서 그리고 지지대로서 큰 힘이 되어주고 있지요. 말씀이 가르쳐 주는대로.. 이야기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고만 있는데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제 신앙과 영성을 보게 되고.. 그에 따라서 인격적으로도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놀랍도록 달라지는 저 자신을 직접 경험하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너무나도 속이 상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배운 것들을 몇 년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여기에서 접한 것들을 몇 년만 더 일찍 접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도 짙고.. 또 이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보면서.. 그 진리들을 빨리 제 것으로 만들어서 제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하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 사역을 시작해도 빠른 나이가 아닌데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잖아요.. 마음이 급해집니다..

지금까지 위와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아쉬운 마음이 들게 만드는 개념이 바로 훈련이라는 개념인 것 같아요..

제 삶을 통해서 이 훈련이라는 개념은 세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제가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 그러니까 이신칭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이해했던 훈련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 구원의 문제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교육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사회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관점이라는 것은.. 뭐..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보아왔었던 권선징악의 관점이겠지요.. 내가 잘 하면.. 상으로 구원을 주고.. 내가 못 하면 그 벌로 구원을 앗아간다는 개념입니다.. 교회에서 믿음과 은혜에 의한 구원을 선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일 뿐..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삶은 그러한 기독교적인 이론, 이상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말로만 은혜에 의한 구원을 외칠 뿐, 교회에서 돌아가는 여러 가지 시스템 안에서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보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잘 하면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이 이뻐해주시고.. 못 하면 교회에서 쫓겨납니다..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조직 자체가 이 이론과 원칙에 의거해 사람을 대우하지 않는데.. 신학적 이해가 전무한 평신도가 이러한 이론에 목숨 걸 이유는 전혀 없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가지고 있었던 "훈련" 이라는 개념은..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을 지키는 단순 행위일 뿐이었고..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고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교회의 설교단에서는 뭐라고 선포하던 상관 없이 현실적으로 잘 해야 인정을 받고.. 잘못하면.. 문제아 취급 당하고.. 목사님들 눈 밖에 나가면 교회 옮겨야 하니까.. 잘 해야죠...

그러다가 고든콘웰에 와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을 했지요.. 처음 고든콘웰에 와서 제가 맞닥뜨렸던 개념이 바로 믿음에 의한 구원.. 이신칭의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대략 1여년에 걸쳐서 이신칭의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제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었었고.. 실제로 그 구절들을 공부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개념이 제가 그때까지 살아왔었던 세상의 가치와는 너무나도 달랐고.. 또 제가 몸담고 신앙생활을 해 왔었던 교회의 현실과도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선경이 이야기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교회도 그 성경의 이론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제가 배운 것들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검증을 해 볼 필요성을 느꼈더랬습니다.. 고든콘웰에서 이단이 나오면 안 될 테니까요.. 제가 선택했었던 검증 방법은.. 말씀대로 제가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었던 마태복음 7장 말씀에 의거해서.. 만약에 제가 이해한 말씀이 잘못된 것이라면.. 제 삶의 열매가 잘못된 것을 저에게 알려주었겠지요.. 정말 우직하고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순간 순간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정말 진리인가.. 하는 의문과 회의가 들었습니다만..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1-2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이신칭의라고하는 교리의 핵심을 이해하고 또 제가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신칭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이해하게 되면서 훈련이라는 단어에 대한 제 관점도 바뀌게 되었는데... 이신칭의 vs. 훈련.. 이런 대립관계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행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포함하게 되는데.. 에스겔 36장에서 이야기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을 얻게되는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훈련을 행위에 의한 구원의 개념과 동일시 하면서 훈련이라는 개념은 교회에서 강조되고 선포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를 했더랬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 학기 교회사 시간에 수도원 운동과 안토니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다시 깨졌습니다. 흔히 수도원 운동 하면 "자기 의" 와 결부시켜서 이해를 많이 하시는 듯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폐쇄적인 삶도 그렇고요.. 저도 아닌게 아니라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요.. 하지만 수도원 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관점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었습니다..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경건훈련을 하게 되는데.. 경건 훈련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계시록과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리스도가 사용하셨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지요.. 계시록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세상을 정복하시는데, 그리스도가 세상을 정복하실 때 사용했던 방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위해서 죽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세상을 위한 사랑이었지요..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아낌없는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계시록의 전체적인 메세지였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의 가장 핵심이었다는 것이지요...

안토니에 대해서 페이퍼를 쓰기 위해 교부 중 한명인 아타나시우스가 쓴 Life of Anthony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안토니의 일생과 안토니가 했었던 말을 기록해 놓은 책인데..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안토니에게서 전혀 "자기 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토니는 평생 혼자 자신의 골방에서 생활을 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연 다른 사람과 만나지도 않고 접촉도 하지 않으면서 과연 안토니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안토니의 일생을 읽으면서 이 부분도 깨어졌습니다.. 안토니는 골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때로 자신의 골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들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의 메세지를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강조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모래와 함께 살던 사람들" 이라는 책에서 방성규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처럼.. 안토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준비시키는 작업을 골방에서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뭔가 시키시면 지체하지 않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계속 자기 자신을 깨고 부수고 훈련시켜 나갔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안토니에 대해 공부하면서 마지막으로 저에게서 훈련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한 번 더 바뀌었더랬습니다.. 훈련은 행위에 의한 구원과 관련이 있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하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에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고 난 뒤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많이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상황에 관계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잘 안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괴롭히더군요..

1.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나를 공격할 때입니다.. 이 경우는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상대방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때는 아래와 같은 마음이 들어서.. 참 마음이 어렵습니다..

a. "저 인간이 나를 무시하나??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내가 그런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나?"
b. "아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 이렇게 무가치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 두 번째로는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같지 않을 때 입니다.. 의견이 다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이 맞다고 주장 하고 싶어지지요. 특히 같이 공동으로 무언가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이런 갈등은 커집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실 내 마음에 드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상대방은 out of 안중(관심)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사랑할 수가 없어지게 되는 거지요..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을 고민을 해 보는데..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 훈련.. 경건 훈련밖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저런 상황이 닥쳤을 때 의도적으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나 주장들을 일단 뒤로하고 대화 주제가.. 사건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화를 하고.. 내가 같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연습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마음 먹는다고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또 아니더군요.. 그래서 이것을 "훈련"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반복되는 연습이 반드시 involving 되어야 하니까요...

이제는 안토니를 이해를 합니다.. 다른 분들은 시리아의 시에몬 (기둥 위에서 평생을 살았던 성자)에 대해서 많이 비판을 합니다만.. 저는 그 분들이 고민했었던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 이해가 되고.. 왜 나는 이런 것들을 미리 알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억울함이 많이 드네요.....

로마서 8장 13절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지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제 삶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을 literal 하게 지키려고 노력 하다보니... 사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걸려들어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그냥 아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깨는 신앙의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느끼게 되네요..

이 사실을 제가 5년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을 텐데.. 하나님 안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직 소갈딱지가 밴댕이 소갈딱지라서..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다들 서로가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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