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동안 많이 고민하면서 생각해 왔던 주제를 하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그 동안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번번히 그 노력들이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해 왔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가 다른 사람들이 제가 말씀에서 배운 가치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이었습니다. 평생을 신앙생활을 해오신 제 어머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시더군요..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나름대로 그 고민의 흔적을 좀 남겨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결과는 우리 기독교 교육이 지식 위주의 교육이나 또는 행동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성 중심의 교육이 아닌 행동의 원천이 되는 가치관 중심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가장 흔히 듣는 설교가 도덕 설교입니다..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니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패턴의 설교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설교는 결과적으로는 성도들의 머릿속에 지식만을 쌓아주고 마는 설교가 되기가 쉽습니다.. 이런 설교보다는 성도들에게 기독교적인 가치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을 띄워 주는 게 더 효과적이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I. 동양 교육과 서양 교육의 차이
KBS에서 2007년 5월달과 6월달에 걸쳐서 유교의 역사를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이름은 "유교, 2500년의 여행"이었는데 총 4부작으로 편성이 되어 있었지요.. 유교의 역사를 각각 인, 의, 예, 지라는 관점으로 풀어갔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유교 교육의 핵심은 "가치관" 이었습니다. 즉 사회 전체를 꾸려나갈 수 있는 건강한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 공자가 추구했었던 유교교육의 핵심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유교사상은 나중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유교사상은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대신했었다고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유교사상이 조선시대의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EBS에서 2011년 1월과 2월에 걸쳐서 3부작으로 방송했었던 "서당" 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것 같습니다. 유교 자체가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룬 학문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교육목적은 "배운대로 행하면서 사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교육의 주요 내용이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교육 목적은 서구식 교육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참 생소한 경우인데요 합리성을 많이 따지는 서구식 교육방식에 의해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교육은 인격이 아닌 주로 직업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를 살펴보면 동양 문화는 정신 세계.. 즉 가치관을 중요하게 여겨왔다고 한다면 서양 문화는 효율성을 더 중요히 여겨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동양 문화에서는 기술이 천대를 받는 일들이 있어왔고.. 서양에 비해 기술적인 발전은 관리가 잘 안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면에 서양 문화는 일의 효율성을 많이 강조하게 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가치관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이 쇠퇴했다고 볼 수가 있을 듯 합니다. 한 사회를 지지해주는 근간은 결국 사회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치관에 대한 고민이 쇠퇴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부분이 결국 개인주의로 빠져들게 되고 다시 개인 이기주의 또는 집단 이기주의로 빠져들 수 밖에 없게 됨을 봅니다.
동양식 교육 방법과 서양식 교육 방법.. 어느 것이 옳을까요?? 양쪽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따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철학은 상당히 서구적이기 때문에 동양적 교육철학이 담고 있는 부분.. 즉 가치관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많이 듭니다.
II. 기독교 교육 안에 나타나는 서양 교육적 측면과 동양 교육적 측면
기독교 교육과 관련해서도 이러한 부분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일선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방법도 그렇고 특히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 방법도 상당히 지식 위주의 교육 방법이 많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교육생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는데 교육생 또는 학생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잘 알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느냐는 교육생의 성취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전혀 또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본질적인 부분을 보면 유교가 추구했던 교육 목표와 같은 목표를 사실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는 그 전체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배워서 습득하고 나면 그것을 삶으로 체화시켜서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부분이 반드시 포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배운대로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말씀을 잘 배워서 지식적으로 잘 알고 그렇게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치고 또 교회에서 봉사를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그 핵입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겉 모양 뿐 아니라 그 내면의 뼛속의 골수까지 모든 것이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독교 교육과 관련해서는 서구적인 방법은 분명히 그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 방식은 그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식과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그 교육 방법의 특성 때문에 한계가 있음을 짚어낼 수 밖에 없겠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제는 지식 교육이 아닌 가치관 교육으로 방향을 좀 틀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공부를 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배움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운 말씀을 얼마나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치느냐가 배움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III.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의 대립
이제 가치관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관과 기독교적 가치관은 본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치관만을 따지게 되면 단순한 생각의 차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이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동의이고 결국 이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우도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아닌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뚜렷한 점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따라가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가장 큰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에 대해서 한 번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전개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 이념으로서의 가치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 계속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또 진정한 크리스챤으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살펴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가 완벽한 국가입니다. 비록 이 땅에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국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로서 완벽한 국가이고 따라서 지금 우리한테 낯익은 민주주의와 같은 국가 통치 이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전개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나라의 국가 통치 이념과 이 세상의 국가 통치 이념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조금 더 확실하게 규명을 해 보고자 합니다.
1. 세상적 가치관
예전 조선시대는 조선이라고 하는 국가 전체를 통제하고 유지해왔었던 가치관이 유교사상이었습니다. 유교사상은 "예"라고 하는 가치관을 그 척도로 삼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예"를 갖출 때 그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또 보존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편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서방 세계를 관통하고 결국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가치관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라고 하는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이 둘에 기초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고 따라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 아래 한 국가의 권력의 기반을 그 나라의 모든 국민으로 삼는 통치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궁극적인 국가의 의결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지요..
한 국가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해서 그 국가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고 국가를 계속 건강하게 유지시켜 나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국가의 통치이념.. 즉 해당 국가의 가치관을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가치관의 교육은 이미 유치원에서부터 시작이 되며 우리나라에서 또는 미국에서 정규 교육을 거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 우리나라와 미국이 공통적으로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뼈속까지 민주주의 시민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는 그 특성상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정치 참여가 아주 중요합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인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가르치며 또 강조합니다. 그 교육 효과가 예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 박정희 유신때와 5공때 민주주의를 위해서 데모를 했던 사람들이 가장 줄기차게 외쳤던 부분이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어릴때부터 이렇게 받아왔던 민주주의적 가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그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 왔습니다.. 이 것은 아주 무서운 교육적 효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민주주의와 아울러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가치관이 또한 자유 시장 경제 체제입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는 상품의 가치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체계를 이야기 합니다.. 공급이 많아지고 수요가 적어지면 상품의 가치가 떨어져서 수익을 많이 남길 수가 없고 반면 공급이 적고 수요가 많아지면 상품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어서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더 큰 수익을 남길 수가 있게 되는 체계가 바로 이 시장 경제 체계입니다. 이 시장경제 체계는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이며 각 국가들은 이 시장에 대해서 공정한 경쟁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제 외에는 건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장 경제는 거대한 소비 문화를 형성을 하게 되는데 공급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대중들의 소비패턴을 분석을 하고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상품들을 공급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또 다른 권력 구조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소비자가 권력의 핵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두들 "소비자가 왕이다" 라고 하는 구호를 한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시장 경제 체제 하면 기업과 소비자간의 관계만을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개념은 현재 자유 민주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의 모든 요소에 적용을 시키는 우리 삶의 가치 체계로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업이 내놓는 상품 뿐 아니라 학교도 시장 경제 체제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학교들도 학생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어필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학생을 유치를 할 수가 없게 되고 학교의 수익 구조가 어려워져서 결국 학교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게 되겠지요.. 따라서 학교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사회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정치도 이러한 시장 경제 체제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정당은 정책 공급자이고 유권자는 정당이 내어놓는 정책의 수요자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보아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이 되는 정당이나 인물을 투표를 해서 정치권으로 들여보내지요..
심지어는 교회도 이러한 시장 경제 체제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마케팅 방법은 많은 분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은 이제는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경쟁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더 끌어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사람들의 성향에 맞게 교회 안의 프로그램이나 컨텐츠들을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교회들의 이러한 경향은 정확히 교회가 시장 경제 체제의 가치관을 받아들여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주 심각한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상당히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확실한 가치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에서 어떤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한 학문분야가 아닌 경우 그 어떤 기관도 일반 대중이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그르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중 자체가 이미 권력화 되어 있고 대중이 옳다고 인정한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게 되면 결국 대중이라고 하는 절대권력에 등을 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몇 년 전에 있었던 쇠고기 파동입니다. 당시 정부는 아마도 쇠고기 협상을 한미 FTA 협상 카드로 사용을 하면서 위생상의 문제를 우리 국민에게 크게 해가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정부분 미국에 양보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때 정부 입장에서는 분명히 쇠고기 협상에서 약간 위생상의 문제를 양보하는 것보다 FTA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협상을 진행을 했을 것이고 또 쇠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정부가 보였던 반응은 그때 판단이 옳았던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들고 일어났을 때에는 합법적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입고 출범한 국가 권력도 결국은 대중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의 옳고 그른 문제의 판단 기준은 결국 일반 대중이 쥐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언제나 대중에게 휘둘리고 다닙니다. 소신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묵묵히 실천해나가는 정치인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지지를 그 원천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집단들인데 자칫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다가 유권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결국 자신들의 정치 생명이 끝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2. 기독교적 가치관
이제는 세상의 가치관은 돌아보았으니까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대해서도 한 번 돌아보도록 하지요.. 하나님 나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의 국가 통치 이념은 민주정이 아닌 왕정에서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국가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것이 기독교 가치관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의 국가 체계는 중세 봉건영주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 왕이라는 것이 우리 위의 절대 군주를 두는 왕의 개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전 우주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 우주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또 다른 왕으로 창조를 하셨고 당신의 소유물중 일부를 우리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부분들을 다스리는 통치 이념인데 인간은 맡겨진 영역을 다스릴 통치이념을 스스로 만들도록 허락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 이념에 따라서 다스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점은 민주정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큰 차이점을 만들어내게 되는데요. 국가의 권력의 핵심은 국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결정권은 왕에게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왕적 권세를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 위에는 모든 왕들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결정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결정 할 때에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는 일반 대중이 아닙니다. 모든 왕들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일반 대중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자유 시장 경제의 가치관 아래에서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또한 권력의 핵으로 등장을 합니다만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는 이것 또한 부인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떠한 존재도 하나님 위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시장 경제 체제의 가치관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시장 경제 체제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관계 안에 있습니다. 공급자는 소비자가 필요한 상품을 공급을 해주고 소비자는 공급자가 필요로 하는 돈을 공급을 해 줍니다. 따라서 이 두 파티는 서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가치관 안에서는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공급자입니다.. 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의 공급자도 또 소비자도 진정한 우리의 공급자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기독교적인 가치관 안에서는 소비자가 권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공급자가 되었든 소비자가 되었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창조물들이고.. 따라서 절대 권력은 늘 하나님께 있을 뿐입니다.
3.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의 충돌
인간은 생각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들입니다. 특히 전혀 새로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의 여성들의 적응력은 가히 놀랍기까지 합니다.. 사실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이것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대로 실천하면서 살지 않는 공동체에서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 놓여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 가치관의 차이는 바로 왕정과 민주정의 서로 완전히 상이한 두 가치관의 대립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치체계에서는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자가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종 결정자가 대중입니다. 특히 사회 구조상 소비자라고하는 대중이 가지는 절대권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대중 사이에는 서로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서 과연 어느 권력을 따라야 할 지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실제 권력인 대중이 내리는 결정에 대항해서 "NO"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대중이라고 하는 권력을 따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보통 교회의 설교시간에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자고 이야기를 하면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하고 자신들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하지만 이 대중이라고 하는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 배워온 가치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상 내 주변에 있는 절대 다수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틀렸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인간은 쉽사리 반대 주장을 내놓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절대 다수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가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어려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과 관련해서는 EBS에서 방영을 했었던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EBS는 주변 상황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매우 다양한 실험을 한 결과를 바탕으로 "상황의 힘" 과 관련된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난 결과는 인간은 주변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을 자신도 모르게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실험을 하나를 소개를 하겠습니다. 3부작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던 인간의 두 얼굴 2부에 있었던 실험입니다. EBS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퀴즈게임을 하나를 했었습니다. 한 강의실에 7명을 모아놓고 이 7명이 진행자가 보여주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6명은 이미 제작자와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는 연기자들이었습니다. 이 연기자들을 실험이 시작이 되어서 문제가 나오면 모두 같은 답을 이야기 하도록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답은 모두 틀린 답이었습니다.. 이 6명 안에 실험 참가자들이 한 명씩 들어와서 앉습니다. 그리고 질문자가 질문을 하면 먼저 제작자와 약속이 된 6명의 연기자들은 틀렸지만 서로 약속된 오답들을 정답이라고 순서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실험 참가자는 맨 마지막에 6명의 오답을 모두 들은 후에 자신이 생각을 하는 정답을 이야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봐도 정답이 확실한 간단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 결과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분명히 정답을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틀린 답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답을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다른 사람들과 같은 답을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실험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제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 뇌에서 어느 부위가 활성화가 되냐면 신체적으로 우리가 아픔을 당할 때 활성화되는 그 부위가 활성화 됩니다. 똑같은 부분이. 그게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들 속에 포함되려는 아주 강력한 동기가 있다는 거지요"
아래의 영상은 위의 실험 부분만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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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실험 내용은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상황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옳고 그름을 판단을 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우리 주변의 상황이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다른 이웃들이나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운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왜곡할 때 우리는 굉장히 쉽게 그 왜곡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명확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을 구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기독교 교육의 중심이 가치관 교육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다음으로는 설령 우리가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분별해 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리를 실천하는 데에는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 보다 몇 배나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위의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반박을 하려면, 즉 대중이라고 하는 권력이 내린 결정에 대항해서 "NO" 라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쓰러지고 있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인간은 적응력이 상당히 뛰어난 존재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이야기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에 인간을 놓아뒀다면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정도의 적응력을 발휘를 해서 꽤 잘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에 인간을 놓아두고 기독교적인 가치관대로 살아가라고 요구를 하게 되면 이 것은 mission impossible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III.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시작해야..
세상과 기독교와의 이 차이는 결국 국가관.. 즉 국가 통치이념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핵심이 국민에게 속해있는 민주주의와 국가권력의 핵심이 왕에게 있는 군주제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처해있는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ideal한 방법은 사실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신정국가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국가들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성경 자체를 헌법으로 인정하는 신정국가가 세워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마 가장 ideal한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을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비롯한 상당히 다양한 국가 통치이념들이 있는 다수의 국가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신정국과는 전혀 상이한 통치 이념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지금 있는 나라들을 전복시키고 무력으로 신정국가를 세우려는 시도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aggressive한 방법으로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인터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나 몇 몇 기독교 단체에서 최바울 선교사님의 신학사상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그 분이 쓰신 책을 근거로 삼아서 비판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최바울 선교사님과 그 분의 신학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요즘 일어나고 있는 비판이 사실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저 역시 우려를 표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단군 신상을 때려 부수고 절에 가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오셔서 로마에 대항해서 하셨던 행적과 또 십자가의 의미를 곱씹어 볼 때 철저히 기독교적이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조심스러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로마를 완전히 전복시켜서 무력으로 세계 통일까지도 이루실 수 있는 물리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할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그들을 불살라 버릴 수 없으셨기 때문에 조용히 십자가상에서 참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법들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예수님이 멸망시킬 수 없으시기 때문에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단군 신상 때려부수고 절간 불살라버리는 것이 무슨 큰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을 바라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지만 잠자코 보고 계시는 것이지요..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 할 때 물리적 강요 또는 강압에 의지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를 포기하라고 이야기 해서는 기독교와 대립만 생길 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독교적인 가치를 설명하고 그 가치 위에서 살 수 있도록 이 사회에서 기독교 가치운동을 벌이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군주 정치제도나 심지어 북한이 채택하고 있는 공산주의까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모두 비슷한 고민과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와 주민들이 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인 것이지요.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진 국가 통치 이념이 자유 시장경제와 복합된 민주주의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의 선택일 뿐 그 자체로 완전한 국가 통치 체제는 아님을 보게 됩니다.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민주주의 통치 체제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빈부의 격차 문제 소외되고 있는 계층의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남아있습니다...
효과적인 국가 통치 체제를 생각을 해볼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가 이 모든 사회 문제를 일소해 버리는 완벽한 통치체제입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버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군주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롭고 복된 사회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 모두가 꿈에도 그리고 있는 장차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임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꼭 군주제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하나님 나라의 가치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면서 살아도 현재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상당히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완충작용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문제 자체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문제를 억제시키고 약화 시킬 수는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여깁니다. 이러한 가치가 이 사회에 정착이 된다면 고아와 빈민층에 대해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자발적이면서도 사회적 support를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를 끌어가는 리더쉽 부문에 있어서는 군림하는 리더쉽이 아닌 섬기는 리더쉽이 강조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머리는 좋지만 개인적인 영달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다수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일반 서민들로부터 이익을 챙기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에 상당히 적절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대 사회적으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 중 하나인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어 줌으로 서로가 협력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또 유지시켜가는 모습을 기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도 각 개인이 독단적으로 사회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사회와의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가 건강함을 유지할 때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 안의 각 지체들이 각기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구성원들도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대 사회적인 책임을 각자 감당을 해야 하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나갈 때에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인 가치는 이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시키고 사회의 문제를 완화시키면서 풀어가는데 있어서 이 세상에서 제시되는 어떠한 사상과 논리와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비 기독교인들하고 대화가 가능하고 또 기독교적인 가치의 우수성을 알리고 이 사회에 그러한 기독교적인 가치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 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우리 크리스챤들의 운신의 폭을 넓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을 완화시켜서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데 조금 더 편한 사회로 유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주저리 주저리 쓰다보니까 말이 조금 길어졌는데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잘 지키지 못하고 사는 가장 큰 걸림돌은 기독교적 가치 자체를 부인하면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조금이나마 말씀을 지키면서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심어서 사회 전체가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친숙하거나 최소한 인정은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고려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의외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국가 통치 이념이며 따라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를 제공을 합니다.. 이 가치는 기존의 사회에 나타나는 문제를 최소화 하면서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나온 그 어떤 세상적인 가치 및 사상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매우 우수합니다.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얼마든지 비 기독교인들과 소통이 가능하며 우리의 가치관을 설명하고 이 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 운동을 벌여나가서 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최소한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인정만 해 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있어서 더욱 편한 환경을 기대할 수 있을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가치관에서 결판이 납니다.. 우리가 기독교적인 가치관 또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바르게 서 있어야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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