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박사가 되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이 말이 참 맞는 말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어요.. 지금 제가 공부하고 있는 과정은 박사과정은 아닙니다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가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보이게 되고.. 그 미지의 세계를 탐구해 들어가면.. 그 너머에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지식이라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보이는군요..
성경의 비밀.. 말씀의 비밀을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공부를 더 하면 할수록 제가 평생을 아무것도 안 하고 말씀만 연구를 하더라도.. 말씀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처음 이신칭의를 접하고 나서 교회 프로그램의 무용론에 빠졌던 적이 있었더랬어요..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교인의 머릿수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들의 태도에 대한 분노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게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저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내지 못한 교회의 무능력에 대한 분노였었는데.. 요즘에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또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대해서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네요.. 그 이야기좀 해보려고요..
구원이 과연 무엇일까요?? 구원은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요.. 물론 이렇게만 설명을 해서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복잡하면서도 풍성한 의미들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오늘은 바울이 이야기를 했었던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한 번 보고자 합니다.. 이유?? 구원의 다양함을 설명하기가 귀찮아서요.. 사실 지금 머리가 멍~~ 하면서 좀 졸립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한 번 머릿속에 논리가 정리가 되었을 때 글을 써서 남겨놓지 않으면.. 내일 일어나면 지금 생각한 논리들을 대부분 까먹게 되거든요.. 글도 생각이 났을 때 남겨놔야 한답니다.. ^^;
이신칭의 교리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한 나라에 한 덜 떨어진 놈팽이가 한 명이 있습니다. 이 놈팽이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 나라 대통령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사실이 안 알려지면 좋았을텐데.. 이 사실이 이 나라의 방방곡곡에 다 알려져버렸습니다.. 한 놈팽이가 대통령의 아들을 죽였다더라.... 결국 이 놈팽이가 그 나라의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그 놈팽이를 고소할 검사가 입장을 하고.. 이 놈팽이를 변호할 변호사가 입장을 합니다.. 그리고 재판관들이 입장을 하고 재판이 시작이 됩니다.. 재판이 시작이 돼었는데.. 이 놈팽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떻게들 생각 하세요? 이 놈팽이가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일단 우리의 현실을 먼저 이야기를 해 볼께요. 일단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사건은 법정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의해서 형량을 감하고나 더 가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법정 형량이 있어서 그 법정 형량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놈팽이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정으로 뉘우친다고 해서 법정은 절대로 무죄를 선고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놈팽이의 상황에서 피치 못할 상황이 참작이 된어서 형량이 일정부문 줄어들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년 이상의 징역을 피할수는 없을겁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사건이 바로 이신칭의 사건입니다.. 웃기지요?? 멀쩡한 사람을 죽여놓고 법정에서 "정말로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했다고 무죄가 선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물론 아무런 댓가 없이 무죄가 선고되는것은 아닙니다. 이 놈팽이가 받아야 할 죄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죄는 그대로 있고,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기억 하세요.. 이 사건은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좌지 우지 될 성격의 사건이 아닌 법정 사건이라는 것을요.. 단지 이 놈팽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신거지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대한 고백과 회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무죄"를 선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과 회개 없이는 "무죄" 선고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죄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진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보셨다시피.. 이 복음이 이야기 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은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이 이야기 하는 reality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ideaology에 가깝다는 거지요.. 이 부분이 참 큰 문제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복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머리로 이해를 시켜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믿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은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복음에서 나타난바와 같이..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그 잘못이 용서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을때에는 보통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댓가를 요구를 받게 되고.. 주변의 다른 이해관계에 의해서 사장을 당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자신의 잘못이 들추어지게 되면 자기 보호를 위해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그렇게 머리로 이해한 것이 머리에만 머물고 실제로 가슴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지는 않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문제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그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 이것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한 것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상대에게 용서를 구할 때 그 잘못이 크던 작던 상대방은 그 잘못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듯이 용서하고 보듭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복음을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느끼고 경험을 할 수가 있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은 이러한 복음을 이해하고 믿고난 후에 비로서 생겨나게 됩니다. 이 복음의 의미.. 구원의 의미를 인정하고 믿기 전에는.. 그게 힘이 드는거지요...
이제는 교회가 가져야 할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교회의 프로그램들은 복음이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교인들이 실제 복음의 원리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수단으로 사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중세의 수도원 운동이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수도원 운동이 다 이러한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수도원 운동이 가지고 있는 영성중에서 굉장히 핵심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일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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