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첫사랑" 이라는 단어가 솔솔하게 언급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보통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또 듣게 되지요.. 오늘은 이 첫사랑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 이 첫 사랑이라는 단어가 인용이 되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것을 좀 설명을 해 보려 합니다..

첫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구절은 제가 알기로는 계시록이 유일합니다. 계시록 2장 1-7절까지 이지요.. 본문은 위와 같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과연 2장 4절에서 이야기 하는 처음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 처음 사랑의 대상은 예수님일까요? 아니면 다른 존재일가요? 보통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할 때에는 그 첫사랑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생각을 하고 많이 사용을 합니다만 적어도 계시록 2장에서의 첫사랑은 그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 같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썰을 좀 풀어보도록 할께요..

계시록은 약 A.D. 95년쯤에 요한이 소아시아 남쪽에 있는 섬인 밧모섬에 유배된 후 쓴 책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형식으로 볼 때에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하는 형식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있었던 실존하는 교회였으며 따라서 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요한이 계시록을 쓰던 당시 에베소 교회의 실제 문제를 꼬집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당시 에베소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회의 어떤 점을 꼬집은 것인지 당시의 시대적, 그리고 역사적인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 A.D. 95년 당시에는 교회를 위협하는 몇 가지 공통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들은 비단 에베소 교회만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니었고 계시록에 등장하는 7개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로마로부터의 박해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황제 이름이 도미티안이었는데 로마의 황제를 신격화 시키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던 황제였으며, 따라서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가혹하게 처벌을 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kr.blog.yahoo.com/yydeokk196/12176

두 번째로 유대인으로 부터의 공격이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은 바울의 전도여행이 시작되면서 이미 있어왔는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했던 이유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독교인들.. 특히 바울과 시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모든 율법을 동일하게 지키면서 사는 삶을 포함하게 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바울 서신을 쭈~욱 읽어보면 이 할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오지요..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을 하며 정통 유대인의 믿음에 대항을 하고,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바울에 대항합니다.. 여기서 할례는 단순히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한 가지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는 비 유대인이 유대인이 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관문에 해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유대인이 지켜야 할 모든 율법들을 지킬 책임과 의무가 생기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 없다는.. 꼭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은혜로 인해서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은 정통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질서와 뿌리를 뒤흔드는 엄청난 위협으로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바울과 바울을 추종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없애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유대주의의 반박이 바울의 시대뿐 아니라 그때로부터 약 20-30년이 흐른 계시록의 시점에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영향은 계시록 2장 9절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위의 두 가지 박해- 로마로부터의 박해와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왜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참고 견디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을 해 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교묘히 왜곡된 복음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의 인본사상으로 인해서 인간의 이성이 상당히 높이 평가를 받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매우 다양한 철학 및 종교적인 사상들이 나타났었고, 이러한 다양한 철학 사상들이 서로 상호작용 하면서 또 다양한 사상들이 만들어지던 시대였습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도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당시 나와 있었던 수 많은 철학사조들 중 일부로 받아들여졌었고 따라서 교묘하게 변질된 복음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따지게 되면 신천지나 구원파나 이런 이단 내지는 사이비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왔던 것이지요.. 이러한 이단 및 사이비 사상들이 교회 내부로 들어오기도 했으며, 따라서 교회는 여러 가지 이단 사조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었던 책임을 떠 안게 됩니다. 계시록 2:6, 15절의 니골라당이나 14절의 발람의 교훈, 20절의 이세벨은 이러한 이단이나 사이비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타 교회별로 있을 특수한 상황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위의 내용들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 세 가지 문제에 더해서 각 개교회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수한 문제들이 더해져서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일곱 교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대처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 각 교회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 및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은 이러한 각 교회의 대처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중간 평가정도라고 이해를 할 수 있겠네요..

 

여기까지가 Introduction이었고요.. 조금 길었지요.. 에베소 교회 역시 위의 문제들을 공통적으로 겪게 됩니다. 계시록 2절과 3절을 읽어보면 에베소 교회는 외형상으로는 나름대로 잘 대처를 한 것 같습니다. 먼저 여러 가지 이단들에 대해서 그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를 잘 테스트 해서 거짓된 것들을 잘 드러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3절을 보면 잘 인내하고 참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로마나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에 대해서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처를 해 왔다는 사실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한 가지 책망거리가 있다고 하시는데.. 뚱딴지 같이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5절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설명이 되는데 먼저 회개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이 흥미로운데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4절과 5절의 문맥으로 보아서 4절의 처음 사랑과 5절의 처음 행위는 서로 동일한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 의미상의 동의어라는 것을 아실 수가 있습니다.. 즉 이전에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하지 않게 된 어떤 행위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의 감정이 아닌 행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에베소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는 사실 우리의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한 내용을 제공합니다. 이 내용은 사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생활을 하면서 상당히 범하기 쉬운 잘못이기에 그렇지요.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여러가지 전통적인 교리 및 가치관의 도전에 대처한 에베소 교회의 대처방법에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를 위협하는 잘못된 또는 건강하지 않은 교리를 공격하는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십자가의 가치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십자가의 가치는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대표되는 조건 없고 무한한 사랑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교리싸움에 너무 치중을 하다 보니까 이 사랑의 감정을 잃어가기 시작을 했었고.. 결국 기독교 교리는 지켜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켜내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비단 에베소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여러가지 이단 및 사이비 사상들과 우리가 싸울 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싸워야 할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에베소 교회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해야 할 때에, 특히 우리를 공격하는 다른 사람들과 싸움을 해야 할 때에는 어떤 가치를 염두에 두고 싸워야 할지.. 한 번 생각을 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상에서 영적 싸움과 관련해 우리가 취해야 할 것들을 설명하고 있는 가장 적절한 구절은 전신갑주를 예로 들고 있는 에베소서 6장이라고 보여집니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믿음의 방패,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이 것들이 에베소서 6장에 있는 영적 싸움을 위한 전신갑주인데.. 이 전신 갑주들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공격용 무기가 거의 없는 것이지요.. 모두 방어구입니다. 성령의 검.. 즉 말씀만이 상대방을 공격을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습니다만 말씀은 공격과 방어 두 가지를 모두 담당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전에는 그리스도의 원수였다고 분명히 증언을 해 주고 있는데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취했던 방법은 그들을 공격해서 힘과 지혜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굴복시킨 방법은 십자가였던 것이지요..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동시에 유일한 공격 무기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와 있는 전신갑주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이 많이 사용했었던 방법은 그 전신갑주의 의의를 당시 로마의 군대에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전신갑주의 비유를 사용을 했을 때 로마의 군대장비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서 그렇게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항상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로마의 문화는 기독교에 있어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로마는 예수님의 사역과 정 반대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힘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압제해서 굴복시켜 상대방의 위에 서는 로마의 군대 시스템에서 뭔가를 끌어왔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바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의 문화에서 끌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관점이 또 있습니다. 이때는 이사야 59장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전신갑주와 관련된 내용이 구약의 성경상에 한 번 등장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59장입니다. 이사야 59장 17, 18절을 보면 공의로 갑옷을 삼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신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갑옷과 투구, 그리고 속옷을 입는 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사야 59장에 나타나는 메시야는 강력한 군사적 메시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사야 59장에 따르면 예수님이 공의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보복으로 속옷을 입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과 예수님이 입으셨던 전신갑주를 생각해보면 에베소서 6장에 나타나 있는 전신갑주의 의미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과 계속 부딪혔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의 논쟁을 한 번 생각을 해 보지요.. 희한하게도 예수님은 그 사람들과의 논쟁 중에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격한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예수님의 생각을 방어하기 위해서 논쟁을 하셨지요.. 즉 예수님의 태도는 항상 나 자신을 방어하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서 논쟁을 펼쳤지, 예수님을 공격하고 예수님을 못살게 구는 상대방 공동체 또는 상대방의 누군가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 논쟁을 하신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할 때에 상대방이 결과적으로는 무력화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일부러 상대방을 무력화 시키려고 의도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워낙에 진리에 서 계셨기 때문에 진리 자체가 드러났을 때 상대방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이 입으셨던 공의의 갑옷, 구원의 투구, 또한 보복의 속옷 까지도.. 공격용 아이템은 없었습니다. 모두 방어용 아이템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상대방을 공격했었던 최선의 공격은 십자가.. 그 위에서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는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59장에 나타나 있는 전신갑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기술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신갑주의 의미는 우리 기독교 공동체를 공격하는 누군가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서 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특히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배워왔었던 그 복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위해서 취하라는 것이었겠지요.. 어떠한 외부의 공격이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요....

 

에베소 교회는 아마도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어를 위한 변론을 했었던 것이 아니라 공격을 위한 변론을 했었고 따라서 그 마음에 상대방을 감싸 안아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점차 사라지고 상대방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 상대방을 어떻게든 무너뜨리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에베소 공동체에서 자라났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고 결점을 덮어주고 상대방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주는 마음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신약에서의 탕자의 비유를 기억해 보시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가실겁니다. 잘못을 했더라도 상대방을 계속 감싸 안는 자세가 반드시 요구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공격해서 무력화 시키려는 자세를 가지게 되면 이러한 사랑이 불가능해집니다. 상대가 뭔가 잘못을 했을 때에 상대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가 없게 되지요.. 그 잘못을 빌미 삼아서 상대방을 무너뜨려야 하니까요.. 결국 예수님에게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에베소 공동체 안에 있었던 그 사랑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듣게 된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계시록 2:1-7절에 나타난 "첫사랑" 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3:34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셨던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한 편 이렇게만 결론을 짓고 이야기를 끝내버리면.. 그러면 "첫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느냐고 질문을 하실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런데 관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5를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인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을 하면서 이웃에게 베풀었었던 그 "처음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에베소 교인들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사랑" 을 예수님에 대한 "처음 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계시록 2:1-7절에 나타난 처음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그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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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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