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인간이 모든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진정한 왕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예배자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인간의 타락 사건은 이 관계가 깨어지는 사건입니다.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에서 이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 통치하는 통치자로 변모하는 사건이 바로 인간의 타락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반역을 꾀한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의 스타일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뒤바뀌게 됩니다. 오늘은 이 타락 사건에 대해서 좀 분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타락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런 존재는 살려둘 수가 없는 것이지요.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위의 스토리는 인간이 타락하게 되는 동기와 과정이 설명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꼬셔서 선악과를 먹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논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뱀은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6,27절에서 쓰인 형상은 히브리어로 젤렘(צֶלֶם)이라는 단어로 이 단어는 실체가 있는 다른 존재의 모형을 뜻합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를 우상을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을 합니다. 즉 인간을 지칭할 때 젤렘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모형이라는 뜻으로, 인간 자신이 하나님일수는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5절의 "하나님 같이 된다" 는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달리 말을 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26-28절의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 혹해서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고, 또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줘서 먹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실제로 뱀이 이야기 했던 것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위의 창세기 1:31절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까지 창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좋았더라의 "좋다" 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브(תוֹב) 라는 단어로 이 단어는 pleasant, agreeable, good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선과 악의 관점에서 선하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기쁨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31절에서 하나님이 "좋았더라" 고 말씀을 하실 때에는 이 두 가지 뉘앙스가 모두 포함이 되어 있다고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천지가 창조되었을 당시에는 선과 악을 가르는 판단의 잣대가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시다고 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과 악의 관점이 창세기 2:25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벌거벗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벌거벗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바라보았고 따라서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에 대해 하나님과는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벗은 모습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이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자신들의 벗은 모습에 대해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졌다" 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면 선한 것이고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면 악하다고 받아 들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는 완전히 독립된 자기들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제부터는 아담과 하와는 이 땅의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를 하게 됩니다..

창조 당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에 보여주고 드러내야 할 책임을 가졌기에 철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치해야 할 역할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부터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는 별도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창조 세계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들이 뒤틀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에 의해 통치를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 역시 인간에 의해 지켜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도전을 하게 된 이상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반역한 인간에게 벌을 내립니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15절은 원복음이라 불리우는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내려가는 인간의 구원을 예언한 구절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루면서 같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참고를 원하신다면 아래의 링크에서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http://yyht.tistory.com/1007

타락의 댓가로 하와에게는 임신과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고, 아담에게는 평생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벌이 내려졌습니다. 또 아울러 땅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그 통치를 받는 땅도 역시 영향을 받았습니다..

 

 

 

타락 이후의 결과

 

타락과 관련해서는 타락한 이후에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연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였을 때 어떤 인간의 환경과 관련해서 어떤 점들이 달라졌고, 또 타락하기 전과 타락한 후의 인간의 처지를 비교했을 때 언제가 더 나은지를 비교해보는 것은 구원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창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 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위의 본문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아벨을 죽인 이후 하나님에 의해 저주를 받는 장면에서 가인이 자신의 목숨으로 인해서 염려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창세기 4장 14절에서의 가인의 염려는 가인 이후 모든 인류의 염려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 때는 그 사람이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입니다.. 가인도 역시 자신의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목숨을 보증하여 주십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한 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예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가인의 목숨을 보전하여주시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밑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 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 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 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위의 본문은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두 명의 처와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놀랍게도 라멕은 자신의 상처로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뜻 이 이야기를 보면 단순히 라멕이 한 사람을 죽인 단순한 이야기로 보아 넘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라멕이 왜 소년을 죽여야 했는지 그 상황을 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목숨을 보장하여 주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이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보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염려는 인간이 타락 하기 이전에는 할 필요가 없는 염려이겠지요. 하지만 어쨋든 인간은 타락하였고, 그 이후의 인간들은 누구나 자신의 목숨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옛 속담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먼저 상대방을 공격해서 죽이려는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라멕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어린 소년을 죽여야 하는 모순 가운데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타락 이후의 인류의 역사와 사회 구조적 패턴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했고, 씨족에서 부족사회, 그리고 더 큰 국가를 이루어 가면서는 자기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안녕과 목숨을 지켜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적들을 꺾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고 따라서 이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상대방보다 더 강한 힘이 없으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도 지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항상 남들보다 나은 사람,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 사람들이 조직을 움직이면 우리는 더 나은 경쟁력, 더 나은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며, 그 경쟁력이 우리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 것이지요...

그 힘의 모습은 세대마다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씨족, 부족 사회는 인구 수와 물리력이 힘의 원천이었고, 국가 시대에는 물리력 뿐만 아니라 정치력과 경제력도 역시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고도의 과학 기술력이 국가의 힘의 원천이었고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지식과 정보력이 힘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깨지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질문: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이 살 수 있을까요? 죽은 이후의 영생은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어느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는 있습니다. 위의 본문과 또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삶과 하나님 없이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무엇이 다를까요?? 하나님 없이 이 땅에서 사는 삶은 계속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삶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그 궤를 완전히 달리 하겠지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밟고 올라 설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따르는 힘의 원리에 의지해서 승리를 하시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세상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 힘의 원리에 따르지 않는 것이 승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 입니다..

 

눅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누가복음 22장 25-30절을 보면 아주 이상한 비유가 있습니다. 25절은 이 세상의 왕들이 자신들의 왕권을 행사하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25절의 주관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쿠리유오우(κυριεύω) 라는 단어로 이 단어는 have control rule over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말 그대로 자신이 무엇인가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지요. 그 뒤의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을 컨트롤 하기 위한 힘을 가지는 수단을 이야기 하시는 것일 겁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가 로마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고려 할 때 아마도 로마의 황제를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로마의 황제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논리로 그 땅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큰 자는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겨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29절과 30절을 보면 그 제자들에게 왕권을 주고 또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이 부분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으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권의 행사는 다른 사람을 아래에 두고 밟고 서는 것으로 실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역시 타락 이전의 인간의 처지와 타락 이후의 인간의 처지를 비교함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게 되는데 타락 이전의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힘을 키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책임 지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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