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3절에서 예수님은 구원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고 또 의지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헌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또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부분입니다. 현재 개혁신학의 효시가 된 칼빈은 그가 쓴 기독교강요 첫 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을 더 잘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게 되면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들이 더욱 명확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함과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공부도 역시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인간의 지위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레퍼런스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 1:26-28절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의도를 설명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구절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부분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으로 이 두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보통 이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의 천지가 만들어지는 구조의 순서에 주목을 합니다.

 

 

첫째 날 빛과 어두움 해, 달, 계절
해는 낮, 달은 밤을 주관
넷째 날
       
둘째 날 궁창과 하늘 바다의 생물
하늘의 새
다섯째 날
       
셋째 날 땅과 바다
채소와 나무
땅의 짐승, 가축 여섯째 날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 여섯째 날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 일곱째 날

 

위 자료는 천지가 만들어지는 순서를 정리해놓은 자료입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Gordon-Conwell의 휴겐버거라는 교수님께서  정리하신 자료를 좀 인용하겠습니다. 이 창조 구조에서 재미있는 현상은 먼저 지음을 받은 창조물이 나중에 지음을 받은 창조물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지음을 받은 창조물들은 먼저 지음을 받은 창조물을 다스리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첫째 날에 지어진 빛과 어두움은 해와 달 같은 빛을 내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 것은 전에는 빛과 어두움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개념이 지음을 받았다.. 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이 빛과 어두움이라는 개념이 넷째 날 창조를 받은 해와 달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둘째 날의 하늘은 다섯째 날의 새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셋째 날의 땅과 바다는 각각 다섯째 날의 바다의 생물과 여섯째 날의 땅의 짐승 및 가축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또한 셋째 날의 채소와 나무는 역시 여섯째 날의 땅의 짐승 및 가축들의 먹거리가 되고 또한 인간의 먹거리가 되어 봉사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미 처음 천지와 만물이 지어질 때 희생이라는 개념이 존재 했다는 사실입니다.. 채소와 나무는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 다른 생물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다른 창조물들을 만드신 후 여섯째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인간을 창조를 하십니다. 이 때 인간은 이 창조 구조의 맨 마지막에 위치를 하게 되고, 따라서 지금까지 지어진 모든 창조물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궁극적인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창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는 않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창조물 위에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위의 창조 사건의 구조로 보았을 때, 결국 진정한 왕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기에서 왕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지는데, 인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쥐고 흔드는 그런 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 세계를 통치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은 다른 창조물들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와 같은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창세기 1장 26_28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루면서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부분은 분명히 인간에게 주어진 왕의 권세를 형상화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왕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왕권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다릅니다...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대리 통치자일 뿐입니다.

 

 

창세기 1:26-28절을 통해 나타난 인간과 다른 창조물과의 관계

 

이제는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다른 창조물들과의 관계적 측면을 한 번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상을 정의할 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 중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 한 나머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치중하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하는 우상에 대한 정의 자체도 우상에 대한 온전한 정의는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고 우상은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의지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 (인간을 포함한)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 중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창조물들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그림은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행동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일(Serve)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Obedience)이 중요해지기도 하지요..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동격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Unlikeness)

반면 인간과 다른 창조물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조금 달라집니다.. 다른 창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Likeness) 비록 인간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인간의 모습을 통해 다른 존재들에게 드러내서 다른 존재들이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이해하고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듯이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또 보살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존재들은 그러한 우리 인간의 사랑에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두 가지 방향으로 인간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만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는 조금 더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의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됩니다. 과연 그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 모습이었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으로 아직 모든 내용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또 제가 많이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는 몇 가지 창세기 1장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적 측면 때문에 세 가지 정도로 인간이 수행해야 할 사역을 정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래 내용은 메리데스 클라인 교수님이 구분하신 것을 살짝 수정해서 옮깁니다.

 

: 인간은 먼저 창조물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이 권위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입니다. 단 주의할 점은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통치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대로 통치해야 합니다..

왕으로서의 인간의 권세는 단순히 다른 생물들을 통치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판단을 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권세입니다.

 

제사장: 인간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직접 통치가 아닌 인간을 통한 대리 통치의 방법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만물들의 중간에서 서로를 연결해주는 가교의 역할을 역시 감당하게 됩니다.

제사장은 구약적 전통 안에서의 단어인데, 구약 시대에는 신약 시대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모세나 기드온, 다윗과 같이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이 직접 만나주심으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정해진 장소에서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기능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가교의 역할을 감당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사람들은 제사장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나 원하는 것들을 탄원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과 다른 창조물들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제사장적 역할이 부여되고 있습니다.. 다른 창조물들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그러한 구조라는 것이지요.

 

선지자: 인간과 다른 창조물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마지막 역할은 선지자로서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하시고 싶은 말씀을 직접 하실 때도 있습니다만, 보통 그분의 메신저를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물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이 세상의 만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 가지 정도의 기능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기능적인 역할들은 모두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나타내고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역할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역할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같이 요구되어지는 역할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고 하나님을 선포하고 알려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들이기에 이 세상에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할 존재들일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통해 나타난 인간과 노동의 관계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노동의 의미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한 번 정도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을 할 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주제는 과연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이냐 하는 점이다...

창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 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4절부터 나오는 장면들은 창세기 1장의 rephrase 이다.  창세기 1창의 천지 창조를 인간을 중심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보면 들에 초목이 아직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던 이유로 땅을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천지가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땅을 위해서 또 초목을 위해서 누군가 노동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5절과 15절에서 "갈다", "경작하다" 에 쓰인 동사는 아바드(עָבַד)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Work, Serv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말로 표현을 하면 일하다, 또는 섬기다 라는 뜻이 된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에베드(עֶבֶד) 라는 단어로 그 뜻은 종이다. 따라서 아바드라는 단어는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섬긴다는 뜻이다.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에서 그 동산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위해 종처럼 봉사를 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다. 이 부분은 창세기 2장 26-28절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게 되는데,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은 왕으로 창조를 받았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인간은 종의 모습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왕" 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군림해서 섬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섬기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어쨋든 이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을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존재라는 근거는 없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노동을 근거로 필요를 공급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고와 인간의 양식의 관계는 창세기 3장,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17절 이하는 인간이 수고한 만큼 소산을 얻는 것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 까닭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즉 타락하기 이전인 창세기 2장은 인간의 수고와 인간의 양식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노동을 적게 하든 아니면 많이 하든 관계 없이 인간은 생활하기에 충분할 만큼 소산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노동이 양식과 관련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왜 노동을 해야 했을까?? 무슨 동기로 노동을 해야 했을까? 그것은 철저히 예배자로서의 삶에 근거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예배는 그 특성상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반응에 있다... 하나님은 끊임 없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 인간을 돌보시고 공급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노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그것 자체로 예배가 된다. 따라서 창세기 2장에서의 인간의 노동은 그 자체로서 예배의 일 부분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비유가 하나 나온다. 제 삼시와 육시, 구시, 십 일시에 각각 한 사람씩 사람을 불러서 포도원에 보낸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는데 일 한 시간과 관계 없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다. 자신이 수고한 만큼 댓가를 받는데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사실 각기 다른 시간 동안 노동을 했는데도 같은 댓가를 받는 상황이 이해하기가 힘이 들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엿볼 수 있는 노동의 의미를 생각을 해 본다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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