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다룬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살펴보고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즉 창조 질서로의 회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처음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을 알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때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가장 핵심적인 일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희생적 죽음이기에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도 결국 그 희생적 죽음의 길임을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것은 다시 두 가지 정도로 그 의미를 나누어서 생각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다스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피지배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단순히 예수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계속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낮추고 희생적 죽음을 선택하게 될 때에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당신의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그 죽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희생을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으로 인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계속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계속 십자가의 삶을 본받고 그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로 사랑을 꼽는 것이고,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activity는 이 사랑에 근간을 두고 해야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셨겠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이게 가슴으로 잘 내려오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아는 만큼 내 삶이 바쳐주지를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는 태생적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될까요?? 사실 기독교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 비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I. 롬 4:3 믿음으로 의인으로 여겨진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롬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계속해서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이야기를 했었던 그 논지의 근거는 로마서 4:3절과 갈라디아서 3: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사실 창세기 15:6에 있는 내용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 장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75세가 넘었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60세가 넘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인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을 하시니까 그 약속을 그냥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이 두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들을 보면 사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의심합니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게 된 동기가 과연 아브라함의 행위 때문이었냐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창세기 15:6절의 상황에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행동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어떤 행동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 받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이후에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증표로 할례를 행하도록 요구를 하십니다.. 차례 차례 보도록 하겠습니다.

 

A. 창세기 15:6절 믿음의 온전성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창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먼저 이스마엘 사건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사건이 언제 벌어졌는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 16:3절을 보면 사래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갈과 동침하게 한 사건이 일어난 때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0년 후라고 합니다.. 하갈이 아이를 낳았을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라고 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을 했을 때는 대략 85세 정도로 추정을 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대략 75세 정도였겠네요. 따라서 15장의 사건은 10년 안에 어느 때인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겠지요..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나름대로 유추해서 방법을 마련 합니다.. 자신의 종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지요..

당신의 정서로는 한 사람이 시집을 오게 되면 그 여종도 의례히 그 남자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더랬습니다.. 따라서 그 여종을 취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시기를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계획 하셨던 그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에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믿었다는 것이지요..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창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즉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13년이 흐른 뒤에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생뚱맞게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자라도록 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창세기 16장 15-16절과 17장 1절 사이에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간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에 대해 언급이 없으셨던 듯 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라고 믿고 13년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13년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정말로 사라를 통해 아이를 낳게 된다고 말씀을 하셨으니 아브라함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요..

어쨋든 이 상황은 15:6절에서 아브라함이 가졌었던 믿음이 얼마나 불완전한 믿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실체를 몰랐던, 아니면 알고도 모른척 했던 관계 없이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는 17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15장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적어도 17장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은 의롭다고 여겨질만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창 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 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이후에 18장에서 사라가 아브라함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살짝 비웃은 것이지요.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창 20: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 20: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창 20: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 20: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창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20장에서는 사라가 임신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신의 누이로 소개하였고 결국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처로 보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믿음도 아니었거니와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행동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좋았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과 같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하겠지요..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런데 창세기 22장에서 그려진 아브라함의 모습은 그 전에 보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이야기를 했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을 준행한 것이지요.. 100세가 되어서 낳은 자식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낌 없이 바치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굉장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모습이었는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대로 실천을 하는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서 항상 신실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엇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신하기도 하는 등.. 아브라함은 완전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항상 신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무지와 행위와는 관계 없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삶으로 경험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경계한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닐까요??

이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통해서 보게 되는 믿음과 구원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구원은 온전한 믿음이 있을 때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비록 그 믿음이 불완전하더라도)이 있으면 그때 구원은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셔서 그 사람이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비록 15장에서부터 21장까지 나타난 모습은 불완전한 모습이었지만, 22장에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한다는 평을 얻어 내었듯이 말입니다..

 

B. 할례와 믿음에 의한 의로움의 순서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 17: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창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후손의 축복을 주실 것을 다시 확인을 하시는 한 편 이번에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할례를 할 것을 요구를 하십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맺는 언약의 표징인 것이지요.. 그런데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부분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구원이 조건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신 사건이 이 할례 사건의 앞인 15장에 있었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보장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 할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면 할례를 받는 것이고,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할례를 받지 않겠지요..

 

고전 7: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롬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롬 4: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롬 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계속 할례를 받지 말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왜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에 명하신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도 할례와 의롭다 인정을 받은 그 순서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때가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고 할례를 받기 전이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할례라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바울 이후로 우리들은 더 이상 할례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할례는 완전히 없어진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른 포맷으로 여전히 이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침례)입니다.. 할례가 세례(침례)로 바뀌게 된 근거는 할례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징표로 사용이 되고, 침례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징표로 사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이 언약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II. 믿음에 의한 구원과 행위의 관계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서를 보면 바울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아닌 행위를 상당히 많이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야고보는 믿음과 아울러 행위가 뒷받침 된 구원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justification(믿음에 의한 구원)과 야고보가 이야기 하고 있는 행위가 동반된 믿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사도들은 각기 아브라함의 삶 중에서 다른 시점의 믿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는 믿음은 창세기 15:6절의 믿음입니다... 불완전한 믿음이지요... 야고보가 이야기 하는 믿음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25년간의 연단과 단련을 통해서 상당히 탄탄해진 믿음입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는 믿음은 행위 자체를 완전히 배제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것이 바울이 이야기 하는 믿음에 내포되어 있다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야고보가 이야기 하는 행위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행위는 항상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 열매로 이해를 합니다. 즉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이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모든 연단과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점점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전 인격적인 변화와 아울러서 행위도 바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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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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