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영신대 M. Div. 다니면서 영성사라는 과목을 들었습니다. 그 과목 수강하기 이전에는 영성 하면 생각하게 되는게 교회에서 신나게 박수치면서 찬양하다가 주여삼창 한 후에 전력을 다해 기도하면서 "성령 주세요" 외치는 거였는데 이 과목을 들으면서 그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좁은 안목을 굉장히 많이 넓혔던 계기가 되었더랬습니다.

방성규 라는 이름을 가진..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교수님이 강의를 하셨었는데 그 분은 영성을 이렇게 정의 하더군요. "방법과 상관없는 하나님과의 만남". 결국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막교부들의 경우에는 사막으로 들어가서 척박한 환경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었다고 하는군요. 이들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동기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묵상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A.D. 3세기 이전에는 믿음 안에서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직접 와닿는 단어였답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와 유대교로부터 이중으로 박해를 받던 시대로 그때는 누군가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실제로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오던 그러한 때였으니까요. 그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내고 죽음을 영광스럽게 맞는 그러한 장면들이 실제로 있었지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성찬식의 의미를 재 해석 하시는데, 그때당시의 성찬식은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찬식을 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골수분자 기독교인들이었는데, 행여나 그 중 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모이는 기독교인들을 로마 행정부에 알리거나 그러면 모두가 삶을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거지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듯이 그들도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맛보는 상황에 놓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당시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증거가 뚜렷한 사람들로만 구성이 되어져 있었고, 그 성찬식에 첨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여라도 자신의 믿음이 외부에 알려져서 죽음의 위협속에 놓이더라도 꿋꿋하게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하더군요.그런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 이후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오히려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박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믿음을 위한 죽음이 재 해석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놓이게 되었고, 그 죽음이라는 단어를 실제적인 죽음보다는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절대성만을 인정하는 내면적인 죽음으로 해석이 된거였지요. 이러한 것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삶에 대한 욕구, 권세, 재물 이런것들에 대한 욕구들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내 삶 자체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드리기 위해서 생각해낸 가장 좋은 방법이 사막으로 들어가서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가운데 자기 자신을 가두어두고 그곳에서 자신의 온갖 욕망과 욕정을 다스려가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것이지요.

중세 수도원에서는 Lectio Divina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려고 했답니다. 이 방법은 성경말씀을 한 구절씩 묵상하는 건데 이 묵상이 언제 끝나냐 하면 그 말씀이 완전히 내 삶의 일부가 될때 끝나는 거랍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다면 내 스스로 삶 가운데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중간에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다 이겨내고 이 말씀이 완전히 내 삶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실천이 될때 그제서야 비로서 다른 말씀으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재미있는게 이 당시는 아직 활자기술이 발달되어 있는것도 아니었고 또 말씀을 번역하는거 자체가 죄악시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말씀이 라틴어로 적혀 있었지요.. 그러한 이유로 한 사람이 성경의 온전한 말씀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답니다. 누구는 시편조가리 조금, 누구는 잠언서 조금, 누구는 복음서 조금.. 이런식으로 말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완전한 말씀을 가지고 있기에 생겨난 방법이라고 하는군요.

중세 신비주의 운동이 있었지요. 이 방법도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결국 해석을 하시더군요. 중세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였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는 라틴어로 드려졌답니다. 라틴어가 뭐 하나님의 언어이고 따라서 성경도 라틴어로 쓰여져야 하고 예배도 라틴어로 드려져야 한다더라.. 뭐 이러한 논리 때문에 말이지요. 하지만 라틴어는 이미 죽은 언어로 그 시절 사람들이 쓰던 언어가 아니었다더군요. 따라서 교회에 가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찬양을 해야 하고 설교를 들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욕망과 열망이 여전히 남아 있었거든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갈망하는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고 시도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라고 하는 은사주의로 빠졌던 것이라고 합니다. 신비주의는 필리핀에서 교회사 배우면서 잠깐 다뤘던 기억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운동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 중요한 것은 신비주의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콥틱 교회라는 것이 있답니다. 제가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공부해보지도 않아서 어떤 교회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리이스 정교처럼 기독교 분파중 하나인거 같더군요. 이 교회는 예배 스타일이 매우 특이하다고 합니다. 일단 설교가 없고 교인들이 저마다 교회에 와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한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영발을 받아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느끼면 일어나서 막 뭐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쨋든 지금 우리들이 드리고 있는 이러한 형식에 구애받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 아예 예배 형식이 없는 교회라고 이야기를 들었던거 같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가지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오순절 운동의 경우 유명한 아주사 스트릿 사건이 있었지요.. 뜨겁게 기도하면서 찬양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강한 은사들을 체험하게 되는...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 거의 영성을 얻기위한 표준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방법도 사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인류가 역사적으로 취해왔었던 다양한 방법중 한 가지 였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

참 훌륭한 강의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중세 수도사 운동을 연구하셔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으로 나이도 이제 50대를 바라보는 젊은 나이셨는데 고질병이 있으셔서 아마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신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성,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명제를 개인적 명상의 관점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서 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정의할 수 있도록 도움을 많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라는 분을 찾고 추구하게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셨던 분이 이 교수님이셨거든요. 저는 성격이 뭔가 나름대로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정리가 안되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성격이라.. 공부하면서 부족한 부분들이나 궁금한 부분들이 있으면 자주 찾아뵙고 조언도 구하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었던 분이신데 하나님이 너무 일찍 데려가셔서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취한 방법은 첫번째 사막의 교부들이 취한 방법입니다.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지식도 없고 영어도 짧고 믿을거라고는 하나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현실로 저 자신을 내 몰아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살아남음으로 말미암아 제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하나님을 만나보려는 것이지요.. ^^;

여러분은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 한 번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는지 정리해보시는 것도 괜찮을거 같아서 이 글을 남깁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하는 그런거 말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른 사람이 만나주는거 아니니까 나한테 맞는 나만의 방법이 있어야 하는거니까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조재감이 느껴지더라.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더라. 뭐 그러한 하나님과의 접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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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y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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