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배운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해 보려고요.. 사랑...
일단 제가 살아온 백그라운드부터 조금 이야기를 해 볼께요..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하는데..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셔서 결혼을 하신 것이 아니래요.. 이 이야기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흠.. 마음이 많이 슬퍼지더라고요... 나는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났구나.. 뭐 전에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는 있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시는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을 하고 나니까.. 흠.. 우리 집.. 콩가루 집안이구나.. ㅜㅜ..
할머니가 어머니를 이쁘게 보셨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며느리 하자고 6개월을 쫓아다니셨대요.. 아버지의 의사는 상관없이.. 그렇게 두 분이 결혼을 하신 거에요.. 할머니의 중매로.. 물론 두 분은 서로 사랑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할머니가 하자고 하시니까 따라간 거고요.. 어머니의 할머니의 집요한 요청과 정성에 감동하셔서 그러마 하신 거고 아버지는 효자시걸랑요.. 할머니가 하자 하시면 그냥 따라가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한 집안 식구가 된 거래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할머니가 마음이 바뀌신 거에요.. 어머니의 모습이 결혼하기 전에 할머니가 상상하셨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닌 거지요.. 여러 가지 할머니가 원하지 않으셨던 모습도 있으신 거에요.. 그러니까 이 단순하신 분이.. 어머니를 미워하시고 구박하시기 시작 하신 거에요.. 아버지는 할머니가 그렇게 하시니까 속이 상해서 같이 거드시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지요..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고 당신이 좋다고 데려와 놓고는 이제는 싫다고 하시니..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할머니는 어른이시고 어머니는 젊은 사람이니 할머니 편을 들어서 어머니가 뭔가를 고치도록 말씀 하신거 같아요.. 어머니는 더 팔짝 뛸 노릇이지요.. 22살 어린 나이에 할머니 보고 시집왔는데... 이 할망구가 결혼하고 1달 이후부터 구박을 하기 시작 하는 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태어났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진 것이 아니고 때 생활고에 고부 갈등에 이렇게 노출되어 있다 보니.. 자식 사랑이 제대로 안 된 거지용.. 특히 아이를 보호하고 감싸주어야 할 어머니가 나이도 어린데다 항상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있고.. 특히나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 보니.. 저를 의지했대요.. 제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심리학적으로는 정신적인 남편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던데.. 제가 남편 역할을 해야 하는 거였지요.. 그러다 보니 저는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못 받고 자란 거에요.. 제가 조금만 뭘 잘못해도 어머니는 가차없이 매를 드셨거든요..
어려서부터 저는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항상 마음이 불안했었고.. 모든 일에 의심이 많았고.. 그랬었지요.. 대인 공포증도 있었고.. 특히 그 대인 공포증이 자매들에 대해서는 많이 심했어요.. 여자들한테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거지요.. 자신감이 없으니까.. 내가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그냥 그렇게 산 거지요.. 힘들게.. 불편하게.. 답답하게...
헤어진 자매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이런 부분이 부담으로 작용을 했었어요.. 그냥 불안한 거에요.. 자매들이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버리면 어찌하나.. 이러다 싫어!! 하고 떠나버리면 어찌하나... 그런데.. 제가 자매들을 대할 때 저를 속였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한다고 많이 혼이 났기 때문에.. 저는 누구를 대하든 거짓으로 대하지 않아요.. 항상 진심으로 대하고..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지용.. 그러니까 웃기는 거에요..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는.. 제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해서 떠나버리면 어쩌나 항상 걱정하고 근심하고.. 흠.. 떠나버릴 것을 걱정 하다 보니까... 마음을 다 못 주겠는 거 있죠 ^^; 사랑한다 말 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은 못 하는 거지용.. 결국 그 때문에 자매가 떠나간 거 같기는 하네요.. ㅋㅋ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하셨어요.. 미국에 들어오기 1년 쯤 전에 21일 금식기도 할 때.. 금식 3일째인가 4일째인가.. 뭐 사랑의 종으로 쓴대나 뭐래나... 사랑의 종으로 쓰실 생각이 있으시면.. 좀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런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게 하시던가.. 도대체 아무리 생각을 하고 머리를 굴려봐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사랑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할 것이고.. 다른 사람 사랑할 줄은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의 종 노릇을 하겠냐고용.. 헤헤.. 어찌 했게요?? 그렇게 쓰실 생각이 있으시거든.. 그렇게 만들어보라 그랬어요.. ㅜㅜ..
그러다 지난 여름에 치유상담 프로그램에 다녀왔어요.. 여기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함의 정체를 보게 되었어요.. 사랑이더군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결국 불안함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울러서 사랑이라는 것에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도 아울러서 알게 되었고.. 태초에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교제의 끊어짐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이었는지도 아울러서 알게 되었어요.. 엄청난 발견이었어요..
사실 자매들을 대하는 것은 두고 두고 큰 숙제였는데.. 지금은.. 많이 편해졌어요.. 누구를 대하든.. 지금은 자신 있게 대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지요.. 제가 배운 사랑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 들어 갑니당.. ^^;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이야기 하자면.. 안정감이에요.. 불안함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지요.. 하 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제가 인정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인해서 저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안정감이었어요.. 마음에서 불안함이 사라지고.. 불안함이 사라지니까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고.. 그렇게 차분한 마음이 드니까 무슨 일을 하던.. 일의 능률이 올라가고.. 뭐.. 그런 현상이 나타나더군요... 헤헤.. 수 십년 간 저를 괴롭히던 문제가 그냥 날라가는 순간이었어요.. 제 안에 있던 끊임없는 불안감들.. 특히나 자매들을 대할 때 마음에 있었던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불안감들이 그냥 한 순간에 날라가 버린 거에요.. 왜 그럴까?? 궁금하잖아요??
거기에 대한 이유는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제가 발견한 성경적 원리에 의해 설명해 볼께요.. 제가 심리학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제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항상 불안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저 자신을 대상으로 이런 저런 연구는 많이 했어요.. 그 이유를 알려면 우리의 심리 조금 더 깊이 있는 잠재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위의 것은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서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이야기 한 것이고.. 그 내면의 깊숙한 원리는 성경적 원리에 있어요.. 사랑이 가지는 내면적 위력과 의의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건 내 목숨과 내 생명의 보장이에요.. 내가 사랑 받는다는 이야기는 결국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 안정감을 준다는 거지요.. 이 사실은 Creation And Fall Story와 관련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일 단 사람은요 항상 자신의 생명에 대한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지요..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죽음도 포함 되는 거 같아요.. 누군가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을 때만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서 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부터 격리될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도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는 거에요.. 따라서 심리적으로 보았을 때 창세기 2장 17절의 죽음이.. 그냥 예사롭게 넘겨선 안 되는 거지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언급된 죽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그냥 단순히 죽게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앞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거든요...
구체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도록 지어졌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타락함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끊어짐을 당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이 이야기가 실제 창조와 타락의 사건에서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되느냐 하면요.. 온 천지의 만물이 창조될 때 순서를 보면 사람이 제일 마지막에 창조가 되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그러한 것들을 인간에게 주기 위해서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고요.. 그건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지내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인간이 살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이미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은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는 거에요.. 지금처럼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죽음으로부터의 공포를 느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러한 상황을 표현해주는 단어가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때.. 그 이면에는 이러한 메세지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 내가 이미 네가 살기에 적합하고 합당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 놓았단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들은 내가 다 공급해 줄 테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거라.. 내가 너로 하여금 죽지 아니하도록 계속해서 공급하여주고 너로 하여금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께..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항상 안심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거라.." 이것은 우리 목숨을 보전해주겠다는 메세지인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우리는 불안함이 사라지고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당.. 위에서 설명 드린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했어요.. 이 부분은 바로 우리의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식물과 환경의 공급처로 하나님이 계셨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러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고 강퍅해지는 거고요.. 이제는 죽을 까봐 벌벌 떨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에요.. 따라서 조금이라도 내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원들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런것 들을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얻게 되는 거지요...
우리의 실제 생활 이야기를 한 번 해 볼께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볼께요.. 성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자력으로 자신을 support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 된답니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자신을 먹일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은 자력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옆에서 support를 해 줘야 하는 거지요.. 따라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는 그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아주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두려움이 없고.. 비교적 원만한 성격을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그렇지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 못한 아이들은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네가 잘났든 못 났든 네가 성장하고 자라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엄마가 책임져 줄께"하는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외부로부터의 안정적인 공급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부모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메세지를 던져주면 아이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안정될 수 밖에 없어요..
반면에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어릴 적부터 이런 메세지를 듣고 자랍니다. "네가 잘 하고 네가 열심히 해야 너는 살아남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너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어린 시절..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helpless한 아이들이 이런 메세지를 듣게 되면 매 순간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이 공포는 자기도 모르는 공포에요.. 정서적으로 엄청나게 불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했을 때 최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들을 하게 되겠지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도둑질을 한다거나..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에서 부모님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한다거나..
뭐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다는 못합니다만.. 따라서 부모님의 사랑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부모의 사랑은요 창세때 하나님이 인간을 먹여주고 보살펴주시던 모습의 모형이에요.. 부모와 자식간의 모습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모습으로 확장되는 거거든요.. 우리들이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이 붙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사랑을 누릴 때 마음의 안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그러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님의 사랑.. 특히나 자신의 힘으로는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단 사랑에 대해서 상담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육체적 목숨을 염두에 두고 설명을 했습니다만.. 영적으로 느끼는 영적 생명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영적 차원의 일은 구지 설명을 안 하겠지만.. 영적 차원의 사망까지 생각을 한다면..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얼마나 큰 개념인지 대충 감이 잡히실 거라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이유..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셨던 이 고통의 외침은.. 바로 이 영적 생명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니까요.. 예수님까지도 괴롭게 만드셨던.. 하나님과의 끊어짐은 우리로서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공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죠.. 과연 인간이.. 부모들이 참된 아가페적인 사랑을 줄 수가 있느냐 하는 거에요.. 정답은? 삐~~~ No 입니다..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인 아가페적인 사랑을 어느 정도는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못 줍니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를 절대적인 안정과 절대적인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게 문제인 건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은 구분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조건 없는 사랑이라 불리우는 부모의 사랑도 온전한 아가페적인 사랑은 아니라는 거지요..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사랑은 우리가 우리의 주변에서 보는 그런 흔한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에요.. 나한테 잘해준다고 사랑하고.. 나한테 잘 안 해준다고 미워하는 그런 유한한 사랑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가치관에서도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셨던 그러한 그리스도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야기를 해요.. 어떤 경우에도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런 사랑을 경험하고 이런 사랑을 체험하면.. 모든 것이 달라져요.. 내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여전히 보호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인할 때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가 물 밀듯이 몰려들어오고.. 엄청난 기쁨과 희열이 찾아 들어와요.. 세상 모든 것이 일 순간에 바뀌고 변하는 경험과 체험을 해요.. 못해도 되니까.. 안 해도 되니까.. 어떤 일을 하건 간에 일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져요.. 하다가 안 되면?? 다시 하던지 다른 것을 하면 되죠.. 일 못해도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 잖아요... 이 것이 진정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경험했을 때 찾아오게 되는 우리 안에서의 변화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자유와 해방.. 기쁨이고.. 그 때문에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을 때의 그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유?? 간단해요.. 예수님의 사랑을 보이라는 거에요.. 그러한 아가페적인 사랑에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짜 능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부부관계에서의 사랑... 특히 헤어진 자매와의 사이에서 제가 배우고 있는 사랑이 이런 거에요.. 먼저 헤어진 자매에 대해서는..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 비록 섭섭함이 많이 있고.. 인간적으로 보면 화가 날만한 일도 있지만.. 그게 그 자매가 사랑을 받기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자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 자체가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조건 없는 사랑을 이미 경험한 저로서는 당연히 어떠한 경우에라도.. 설령 그 자매가 저를 힐란 하고 죽인다 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거지요.. 저한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도 좋은 연습기간이에요.. 쉽지는 않아요 순간 순간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는 때도 있고..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이게 예수님이 요구하고 있는 사랑인걸요.. 떠나간 자매뿐 아니라.. 앞으로 제가 만나야 할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사랑해야 할 테니까요..
부부간의 사랑은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해요.. 서로 수십 년 이상을 다른 문화에서 다른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맞춰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그 삶은요.. 하나님의 특별 보너스에요.. 일단 부부간에 요한복음 13장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예수님의 그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지 못하면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해요.. 그런데 부부간에 그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서로 감싸주고 덮어주고 하면.. 정말로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거에요.. 예수님이 나랑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거에요.. ^^; 심적으로 엄청난 안정을 찾을 수가 있고.. 심리적으로 이렇게 안정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어요.. 얼른 이런 가정을 가져보고 싶은뎅.. ^^; 기대가 되요 ^^;
결혼하는 부부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가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말씀 안에 충만히 거하고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연습을 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그렇게 했을 때 가정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한 번 경험해 보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엥..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서 쩝.. 별로 불 만족스럽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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